기사와 헌터의 겸직 125화
“길드장님은 요새 어때?”
“바빠요. 관리 본부가 터져 나가니까 일이 엄청 밀려 들어왔거든요. 그래도 저번에 받은 보고서는 정말 감사하대요. 다음에 꼭 보답하겠다고 하셨어요.”
진희는 혜수와 한배를 탄 입장에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었다. 관리 본부의 비리 보고서를 그녀에게 전했고, 혜수는 정부의 동태를 꾸준히 진희에게 알려주었다.
현성이 방위대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 지금 정부에 남겨진 진희의 귀는 혜수뿐이었다.
“부담 갖지 말라고 전해 드려.”
진희도 혜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으니 굳이 은혜를 느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너도 이틀 후에 알지? 늦지 않게 와.”
“민혁이는 안 가나요?”
“위험하니까 안 가지.”
“흐응.”
그럼 가기 전에 민혁이를 더 만지고 가야겠다며, 유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희가 쓰게 웃었다.
“자, 그럼. 다음엔…….”
껄끄럽지만, 꼭 연락해야 할 대상이 남아 있었다. 진희는 휴대폰을 들어 다이얼을 눌렀다.
-네, 바제트 경.
“안녕 클로이, 반갑진 않지만 할 말이 있어 전화했어.”
클로이의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
-말씀하세요, 전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 * *
“이상해.”
서혁은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훑어보아도 이상했다.
“이걸로 브리온이 얻는 게 대체 뭐지?”
SC 프로젝트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하면서 줄곧 품어왔던 의문이었다. 이에 대해선 클로이도 아는 게 없다고 했고, 진희도 또렷한 대답을 내지 못했다.
SC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기적에 가까웠다. B급 수준의 헌터를 양산하는 기술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마법이었다.
처음 SC 프로젝트에 대해 접했을 땐, 브리온이 이걸 이용해 전력 증강을 노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브리온 소속의 헌터들에게 또렷한 변화가 없자, 이 기술력을 다른 곳에 팔거나 상용화할 셈인가 예상했다.
하지만 브리온의 행보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브리온은 오로지 국내의 혼란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비인증 헌터들의 범죄 급증, 던전 공략 방해와 특별 관리형 던전 개방…… 그냥 망나니들이잖아.”
겉으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뒤에서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거나, 아니면 특정 단체를 공격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움직임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날뛰고 있을 뿐이다. 쓰레기 헌터들에게 힘을 쥐여주고 멋대로 놀아보라고 방생하고 있는 게 현 상태였다.
혹시 SC 프로젝트와 아예 별개로 뭔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브리온 정도라면 서혁의 눈을 속이고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리온에서 애지중지하는 클로이조차 모르는 사업이라니. 브리온에서 클로이의 입지를 생각하면 현실성이 없었다.
“대체 뭘 노리는 거지? 그리고 클로이는…….”
브리온과 클로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건 둘 다 마찬가지였다.
그간 경쾌하고 밝은 이미지를 어필했던 브리온이 왜 이런 혼돈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브리온에서 발굴해 키워줬던 클로이가 왜 브리온을 배신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정말 싫어하는데 말이야.”
서혁이 아픈 눈가를 주무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보상으로 일하면서 가장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의뢰주의 정체와 목적을 알 수 없고, 의뢰 대상자의 형태가 아무리 조사해도 구체화되지 않는 답답한 상황.
정작 클로이와 진희는 표면적인 정보만 원하고 있었지만, 서혁의 성미에 겉핥기식 조사는 만족할 수 없었다.
알아내고 싶다. 알아내야만 한다. 오랜 기간 정보상으로 일한 서혁의 직감이 고해왔다. 브리온에겐 아직 감춰진 무언가가 있다고.
“근데 모르겠다고오오.”
끄아아, 서혁은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쿵쿵, 몇 번이고 머리를 박은 그가 붉어진 이마를 매만지며 다시 허리를 폈다.
“아예 방향을 달리해 볼까.”
서혁은 새삼 브리온의 이력에 대해 조사를 시작해 보았다. 브리온이 언제 설립되었고 어떻게 성장하였는지,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는 것들을 굳이 헌터 커뮤니티와 정보상들의 웹을 뒤져가며 찾았다.
“……어?”
그러던 도중, 그는 정리한 자료에서 드디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스크롤을 넘기던 서혁이 중얼거렸다.
“금강이 여기서 왜 나와?”
비밀스러운 브리온의 이력에서, 있어선 안 되는 이름이 거론되고 있었다.
* * *
“요즘은 던전 안에다 뭐 차리는 게 유행이야?”
진희는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헌터 집단을 보며 혀를 찼다.
“모두 B급이군요. 게다가 실력자입니다.”
“브리온이 맞네, 장비도 좋아.”
현성과 서한도 각각 자신만의 감상을 남겼다.
기사단은 브리온의 연구소를 습격하기 위해 클로이가 말한 장소로 찾아왔다. 서울 외곽에 위치한 깊숙한 숲에서 그들은 게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고가 고속도로 아래의 숲에 연구소가 있다니. 살다 보니 별일도 다 있네요.”
PD가 주변 풍경을 카메라로 찍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연구소와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차가 다니는 소음과 자라다 만 잡초들, 어중간한 키의 나무들로 숲다운 풍경조차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니까 의심을 안 받는 거랍니다.”
클로이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PD는 흘끔 클로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클로이를 믿지 말란 진희의 말이 떠올랐다.
“다들 준비는 됐죠?”
진희가 일행을 둘러보았다. PD는 카메라를 들었고 유나는 정령을 소환하여 주변을 살폈다.
서한과 현성, 카온은 평소처럼 준비했다. 익숙한 무기와 익숙한 진형이었다. 단지 클로이의 포지션만이 이질적이었다.
“좀 떨어질래?”
“제가 길 안내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희는 자신에게 착 달라붙은 클로이를 털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연구소에 대한 정보는 클로이만이 알고 있으니 그녀가 무리를 이끄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클로이의 집착 어린 눈을 계속 마주하고 있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그럼 앞으로 가.”
“전 바제트 경의 곁이 좋은걸요.”
현성과 서한, 카온의 살벌한 눈길이 클로이에게 쏟아졌다. 그 이름을 꺼내지 말란 무언의 표시였지만 클로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음, 하지만 조금 늦긴 했네요. 전 좀 더 빨리 바제트 경이 절 불러주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어요.”
“나도 할 일이 있었거든.”
“계속 기다렸는데, 아쉽게 됐네요.”
“적당히 해.”
진희가 클로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제트란 이름도 작작 쓰고, 적당히 징징거려. 이따위로 나오면 협력자고 뭐고 너부터 잘라 버리는 수가 있어.”
“……후후, 네.”
진희는 이내 클로이를 무시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울려 주다 보면 끝도 없이 들러붙으리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일행도 클로이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진희를 따라갔고, 그 뒷모습을 보며 클로이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일행이 게이트 앞으로 다가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헌터들이 일행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누구냐!”
평범하고 흔해 빠진 대사다. 클로이 때문에 마음도 불편했던 진희는 빠르게 손을 털었다. 정리하란 의미였다.
“어, 어어?”
“아악!”
동시에 카온이 앞으로 나섰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그는 무리를 단숨에 정리했다. 주먹질 세 번으로 다섯 명이 나가떨어지는 걸 본 PD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여긴 괴물들밖에 없네.”
그러면서도 카온의 활약상은 착실히 카메라에 담았다.
“바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응. 그 녀석들은 묶어놔.”
“죽이지 않아도 됩니까?”
“우선 놔둬 봐. 안의 상태를 보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아.”
카온의 물음에 진희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게이트 안이 클로이의 말처럼 연구소인지 확인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혹시나 애먼 사람을 잡을 수도 있으니 진희는 우선 공격 태세를 갖추지 말자 제안했다.
일행은 조용히 게이트를 통과했다. 게이트 앞에 경비가 있던 것과 달리, 게이트 안은 적막한 장소였다.
“신전?”
게이트 안에 펼쳐진 풍경에 일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름한 숲속의 게이트 안에는 멋스럽게 장식된 신전의 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엔 금박을 칠한 장식물이 달려 있었고, 모든 기둥엔 추상적인 그림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장엔 천사의 날개를 가진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이 그려져 지구의 성당과 비슷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던전은 들어올 때마다 새롭다. 그런 감상을 품은 진희가 다시금 진열을 갖추고 전진했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화려한 신전 내부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조용했다. 일행의 발소리만 울리는 거대한 신전에 압도된 PD가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들은 바로는 인력 배치가 많이 되어 있진 않았어요. 경비는 매일 바뀌지만, 연구하는 인원은 많아봤자 열 명 정도였어요.”
“이주민의 숫자는?”
“한 부족이라고만 들어서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네요. 적어도 스무 명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연구소라고 하긴 너무나도 단출한 숫자였다. 당장 오브를 생산하던 공장만 하더라도 수십 명의 헌터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이 연구소의 규모는 중요도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했다.
풀리지 않는 의구심을 품고 일행은 계속 전진했다. 이윽고 신전의 최심부에 다다를 때쯤, 일행은 들려오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거…….”
“신음 소리, 죠?”
새파랗게 질린 안색의 PD가 말했다.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린 것이다.
“저쪽이에요.”
정령을 이용해 소리의 출처를 알아낸 유나가 길을 안내했다.
신전의 풍경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금색과 은색으로 도배된 화려한 신전에서, 지저분한 바닥과 피가 얼룩진 불길한 던전으로 변했다.
“피가, 모두 오래되지 않았어요.”
유나가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유나만 아니라 일행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벽에 묻은 피는 아직 생기가 남아 있었다.
일행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여기, 네요.”
이윽고 그들은 신전의 최심부에 도달했다. 그곳에 있는 건 붉은 색상의 재단과, 그 주변을 둘러싼 정체불명의 기계들이었다.
팔다리를 묶어 피를 빼는 기계, 정체불명의 액체로 가득한 통, 관처럼 생긴 고정틀까지.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그러나 현성에겐 익숙한 기계들이었다.
“맙소사.”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광경에 현성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수많은 시체가 그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성한 모습이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열 명 남짓, 신음을 내던 건 그 열 명의 사람이었다.
“괜찮습니까!”
현성과 유나가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둘은 지혈을 위한 마법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큰일이네요. 세상에나.”
서한과 카온도 현성과 유나를 도와 사람들을 옮기기 위해 움직였다. 시신은 서른이 조금 못 되는 숫자였다.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인지, 아직 몸이 따뜻한 시신이 다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