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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24화 (124/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24화

“우린 저 오브 제작을 의뢰한 녀석을 찾기 위해 왔어. 계약서나, 기록된 장부 있어?”

“주면 살려주실 건가요?”

“봐서.”

사내는 흠, 하고 생각에 잠겼다.

태연하게 살인 예고를 하는 진희도 그렇지만, 이 상황에서 고민에 빠지는 사내도 만만치 않았다. 서한은 별 괴짜들이 다 있다는 생각에 한 걸음 물러났다.

“좋습니다. 드리죠.”

“쉽게 대답하는군.”

“제가 입을 다문다면 죽이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갈 것 아닙니까? 어차피 들킬 거 안 아픈 게 낫죠.”

타당한 결론이었지만, 제 목숨을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서한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는 방구석에 있는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서랍을 뒤지는 사내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진희가 한마디 했다.

“혹시 반격하거나 탈출할 아티팩트 찾는 거라면 조심해. 마력 쓰는 순간 다리가 잘릴 거야. 하반신이 없어도 입은 열 수 있으니까 괜찮지?”

“……아, 여기가 아니었군.”

사내는 서랍을 닫고, 반대편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푸핫, 진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유쾌한 사내였다.

사내가 꺼내 온 건 가죽으로 된 수첩이었다. 수첩 안에는 오브를 제작해 달라는 내용의 계약서와 함께 입금 명세서까지 잘 정리되어 있었다.

“꼼꼼하네.”

“이쪽 일은 영수증 챙기는 게 기본 규칙이거든요. 나중에 물건 받은 뒤 입 닦는다거나, 증거 인멸하려고 죽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구나.”

진희는 수첩을 서한에게 건넸다. 서한은 수첩을 살펴보고, 계약서와 명세서를 비교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가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서한이 보기엔 신뢰성 있는 서류들이었다.

“오브를 만들 때 사용한 수정구 납품서랑 대상자에게 공급하기 위해 사용했던 계획서도 내놔.”

“……만만치 않게 꼼꼼하시네요.”

“이런 일은 전문이거든.”

기업 후계자로 태어나서 정산을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니다. 서한의 능숙한 일 처리에 사내는 말없이 다른 서류철을 건넸다.

“이 정도면 됐어. 실물도 좀 챙겨가면 증거로 쓰긴 어렵지 않을 거야.”

진희가 카온에게 오브와 무기를 몇 개 챙기라고 지시했다.

일은 손쉽게 마무리가 되었다. 경찰을 부른 것인지, 바깥에서 사이렌이 울리는 게 들렸다. 몰래 범죄도 돕는 녀석들 주제에 경찰을 부를 깡은 있었나, 진희가 서한과 카온에게 올라가자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당신 이름이 뭐야?”

“……박영입니다.”

“그래, 박영 씨. 나도 이주민인 거 눈감아 줄 테니까, 당신도 이번 사건 적당히 모른다고 잡아떼. 기절당했다고 증언하면 되겠네.”

사내, 박영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감.”

물론 바르그가 도와준 덕분이다. 이주민의 영혼은 지구의 영혼과 살짝 다른 점이 있다며, 바르그는 사내를 마주치자마자 다른 세상에서 온 자라고 귀띔해 주었다.

“아, 대신 오브를 의뢰했던 녀석들이 와서 물어보면 자세히 대답해 줘도 돼. 거기까지 무시하면 당신 죽을 거 아냐.”

“친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렇지? 내가 좀 상냥해.”

진희의 뻔뻔스러운 대답에 결국 박영이 혀를 찼다. 무표정한 얼굴이 처음으로 무너지자 진희가 즐거운 웃음으로 보답했다.

“자, 이거.”

“뭡니까?”

“내 연락처.”

“잠깐!”

진희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던졌다. 제작한 명함은 아니고, 아이들이 색연필로 만들어준 간이 명함이었다. 서한이 진희의 손을 막으려 했지만, 이미 명함은 그녀의 손을 떠나 박영에게 날아갔다.

솜씨 좋게 그것을 받은 박영이 명함의 글을 읽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명필이시군요.”

“칭찬 고마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거기로 연락해.”

“제가 브리온에게 말해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말하든가. 어차피 이기는 건 나일 테니까, 나중에 줄 잘못 탔다고 울게 될 거야.”

진희의 말엔 조금의 허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모두 진심이다. 그걸 느낀 박영은 가만히 진희의 강아지 가면을 바라보다, 이내 명함을 곱게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기보다 훨씬 나은 대우를 해줄게. 당신 마음에 들었거든.”

오브를 만드는 솜씨도, 무신경한 말투도 모두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주민이란 점도 걸렸지만, 그의 몸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도 눈길이 갔다.

진희의 말뜻을 눈치챈 박영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습니까?”

“물론이야. 파란 하늘을 보고 싶으면 연락해.”

그 말을 끝으로 진희는 바깥으로 나갔다. 바깥, 지상으로 올라가는 진희의 뒷모습을 보며 박영은 습관처럼 손목을 어루만졌다.

* * *

쉴 틈은 없었다.

“다음은 연구소 습격이에요.”

박영에게 받은 서류를 PD와 현성에게 넘기고, 진희는 다음 날 곧장 회의를 열었다.

“클로이를 부르세요. 습격하는 건 이틀 후, 그전까지 준비를 끝마칠 겁니다. 현성 씨는 준 자료를 토대로 언론에 고발할 자료를 만드세요. PD는 아는 인플루언서에게 자료를 모조리 뿌려.”

“네.”

“이번 습격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김유나예요. 저번에 의뢰한 추출기에 대해서도 분석이 끝났다고 하니까, 연구소에서 발견한 것들도 유나에게 모두 맡길 예정이에요. 습격에도 따라올 테니까, 모든 단원은 유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행동하세요.”

진희는 이번엔 라이샤를 가리켰다.

“이번에 이곳을 지킬 사람은 라이샤야. 작전 당일 아이들을 지켜줘.”

“나도 가고 싶어.”

“안 돼. 넌 아직 전투 적응도 덜 됐어. 공장을 습격했을 때랑 상황이 달라. 재수 없으면 A급 이상이랑 마주칠 수도 있어.”

브리온은 어엿한 S급을 가진 기업이었다. 최악의 경우 서한, 현성과 비슷한 수준의 헌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강해.”

“네가 강한 것보다, 우리가 강한 게 중요해.”

서한, 현성, 카온은 호흡을 맞춘 지 제법 오래된 파티다. 그저 공격만 할 수 있고 검술도 깨우치지 못한 라이샤가 그들을 대신하는 건 불가능했다.

“널 데려갈 순 없어. 이유는 알고 있지?”

“……알았어.”

결국 라이샤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가 가르쳐 준 무술과 파티의 기본을 익히지 못한 건 라이샤의 책임이었다.

진희는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해 주는 단장이었지만, 성과를 못 내면 가차 없이 파티에서 제외하는 편이었다.

“PD는 영상을 찍을 테니까 전투에 참여 못 해요. 유나에 이어서 두 번째 우선순위입니다.”

참가하는 파티는 총 일곱 명으로, 진희, 서한, 현성, 카온, PD, 유나, 그리고 클로이였다.

“목표는 연구소 무력화 및 이주민 구출. 그리고 브리온의 고발.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니까, 위험해지면 곧장 튀세요.”

진희의 농담 어린 말에 회의실 안에 웃음기가 돌았다.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 각자 준비하고, 이틀 후에 모이도록 하세요.”

진희가 손뼉을 치며 회의의 끝을 알렸다.

“기사단도 슬슬 모양이 잡혀가네요.”

회의에 뒤늦게 참가했던 유나가 진희에게 다가왔다.

“늦었네.”

“죄송해요, 민혁이가 도망쳐서.”

“민혁이 탓이야?”

“당연하죠.”

요즘 이능력에 대해 물으려고 했는데 순순히 잡히지 않은 민혁 때문에 늦어졌다는 말이다. 유나의 대답에 진희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주신 추출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유나는 밀폐 용기에 담긴 추출기를 진희에게 내밀었다.

“보고서도 있긴 한데, 가져다드려요?”

“말로 설명할 수 있어?”

“네.”

유나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정령을 사용한 것인지 청량한 기운이 손끝에서 나와, 칠판에 글을 쓰는 것처럼 허공에 글자를 만들어냈다.

“추출기의 역할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영혼의 추출, 두 번째는 정제(精製). 추출은 말 그대로 영혼을 뽑아내는 거고, 정제는 이 영혼에서 불순물을 걸러내는 작업을 뜻해요.”

유나는 1번이란 단어를 적고, 그 아래에 사람 형태의 영혼을 그렸다. 그리고 2번 아래엔 동그라미 하나만을 그렸다.

“인간의 영혼은 복잡하고 거대해요.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영혼을 집어넣었다간 단숨에 백치가 되어버릴 정도로요. 영혼에는 기억과 업적이 기록되어 있어서, 자의식이 강하거든요.”

“업적?”

“네, 그 사람이 살아온 흔적이죠. 이번에 분석하면서 혜수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는데, 업적이란 단어도 혜수 선생님이랑, 방인 선생님이 알려준 거예요.”

헌터 길드장이자 정령사인 혜수와 그의 남편인 정령 왕 김방인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둘은 바르그 못지않게 영혼, 성벽, 운명에 대해 빠삭한 이들이었다.

“이렇게 영혼에 기록된 게 너무 많다 보니, 둘 이상의 영혼이 충돌하면 한쪽이 무너져 내릴 수 있어요. 자의식이 있는 영혼은 온전한 융합이 불가능해요. 그래서 추출기를 만든 사람들은 정제란 단계를 추가한 것 같아요.”

자의식을 없애고, 부담스러운 기억이나 필요 없는 업적을 삭제하여, 사용하기 좋게 커팅한다.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고, 온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영혼으로 재단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게 가능해?”

“글쎄요. 분석하면서 이런 기능이 있다는 건 알아냈지만, 원리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말해 인간의 마법 능력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거든요.”

유나가 분한 듯이 중얼거렸다.

“이 추출기를 만들어낸 사람은 엄청난 천재이면서, 악랄한 인간일 거예요. 이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도구는 본 적이 없어요.”

사람을 죽이는 도구는 흔하다. 하지만 사람의 본질인 영혼을 뽑아내 잘라내고, 한낱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방식은 정령사인 유나로선 상상도 못 할 악행이었다.

“그렇게 정제된 영혼의 사용처는 어떻게 될까?”

“그건…… 아마 영혼의 강화겠죠.”

유나가 턱을 괴며 말을 정리했다.

“마력 같은 에너지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SC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생각하면, 녀석들은 정제된 영혼으로 사람들을 강화시키는 데 사용했을 거예요. 추출기가 있으니, 당연히 영혼을 주입할 주입기도 있겠죠.”

“만약 내 영혼을 누군가가 사용한다면, 그 사람은 나처럼 강해지는 거야?”

“설마요. 그런 건 환생이나 다름없잖아요. 재단한 영혼으로 가능한 한계는 아마 한 단계 위의 성장 정도일 거라고 봐요. 그 이상은 말이 안 돼요. 인간의 몸은 그런 갑작스러운 성장을 버틸 수 있게 설계되어 있지 않으니까.”

다른 건 몰라도, 이 방면에선 확신이 있는 유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영혼의 강화는 곧 마나 홀이나 마력 회로, 그리고 재능의 개화에도 영향을 미칠 거예요. 실제로 정령의 진화도 비슷하게 이뤄지거든요. 그것만 따져도 엄청난 성장이긴 하네요.”

정령들은 속성에 따라 융합하거나 서로 기운을 나눠 진화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한다.

정령사인 유나와 혜수는 이 영혼 추출과 조합을 정령의 진화에 빗대어 분석했다.

“보고는 이 정도지만, 솔직히 틀린 부분도 있을 거예요. 임상 실험을 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 마.”

“안 해요. 아무리 저라도 이런 불길한 물건 쓰고 싶진 않아요.”

실험광인 유나를 보며 진희가 따끔하게 말하자, 유나는 질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금 전 민혁이의 내부(마력 회로)만 궁금하단 말이에요.”

그것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진희는 말을 삼키며 추출기가 담긴 용기를 서랍 안으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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