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3화
“끝났습니다.”
“이제 좀 볼만하네. 그럼 가볼까?”
핼쑥한 얼굴로 다가온 민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사전 작업하러 가야지. 보육원에 인원 체크도 할 겸.”
“괜찮나요?”
“뭐가?”
“금강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금강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대기업이다. 아무리 A급을 다수 보유한 지엑스라고 해도 넘볼 수 있는 기업이 아니었다.
“뭐, 그래서 나도 처음엔 직접 부딪히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말이야.”
보육원에 정체불명의 시민 연대를 보내 상황을 보려 한 건 모두 재민의 계획이었다. 그는 금강의 눈을 피해 이선과 접촉해서,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혀 알아서 떨어져 나가게 설계할 셈이었다.
이선은 한 집단에서 오래 있을 수 없는 성격이다. 본인에게 과격할 정도로 엄하고, B급에 매달려 헌터의 본분을 등한시하는 그녀는 어느 단체에서나 골칫덩이였으니까.
그녀에게 희망이 없음을 계속해서 각인시켜 주면 결국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브리온이 있다면, 부딪혀 볼 만하지.”
브리온은 금강에 못지않은 전력을 가지고 있다. 국내에선 금강에 비해 조금 뒤처지는 평가지만, 유럽 쪽에선 금강보다 좋은 성적을 내는 기업이었다.
“브리온은 국내 시장의 혼란을 바라고 움직이고 있어. 반대로 금강은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인력을 투입하고 있지. 둘은 충돌할 수밖에 없고, 우린 거기에 좀 편승하는 것뿐이야.”
금강은 사회 안정과 유지를 바라는 보수적인 기업이었다. 금강의 후계자들이 비인증 헌터들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단 소식은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저쪽엔 S급의 실력자도 있는데요.”
“진짜 S급일까? 뭐, 그건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우리에겐 병사가 있으니까.”
“……A급에게 카트리지를 사용할 셈이시군요.”
“응.”
재민은 화사한 얼굴로 웃었다. 재민은 지금 지엑스에서 준 명령권으로, 부하가 된 A급들에게 카트리지를 사용하겠다 말한 것이다. 민성은 순간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의 잔인하고 냉정한 성미를 모르지 않았다. 카트리지를 내밀 때도 거절하면 비밀 유지를 위해 목숨을 가져가겠다고 웃으며 말하던 그였다.
자신도 사용 가치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내버리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자신을 이 꼴로 만든 그 여자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자신의 처신과 안전만 중요시하던 과거의 민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 가자.”
“예.”
복수를 위해선 이 인간쓰레기를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민성은 경멸을 숨긴 눈으로 재민의 뒤통수를 바라보았고, 재민은 그 시선을 느끼며 즐겁다는 듯 입술을 적셨다.
* * *
“그래서 이게 뭐라고?”
“변장이라니까요.”
“이 조잡한 게?”
“조잡하다고 하다니, 애들한테 이를 거예요. 특히 서한 씨 건 민하가 만든 건데.”
“…….”
서한은 곰 가면을 고쳐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와 서한, 그리고 라이샤와 카온은 영감이 말한 ‘공장’ 부근에 도착했다. 현성은 영감의 안정을 위해 보육원에 남았고, 정예라 할 수 있는 네 명이 공장을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일행은 각각 동물 가면을 사용해 변장했다. 모두 아이들이 만들어준 작품으로, 서한은 갈색 곰, 카온은 도마뱀, 라이샤는 백호, 진희는 강아지 가면이었다.
강아지 가면이라니, 새삼 C급 헌터였을 때 들어갔던 던전이 떠올랐다. 그때도 ‘강아지’란 가칭을 사용하고 던전을 공략했었다.
“답답해.”
“참아. 괜히 떨어지면 안 되니까.”
가면은 마스크까지 덧붙여 얼굴 전체를 가리는 형태였다. 보이는 건 귀와 머리카락뿐이라, 이런 가면에 익숙하지 않은 라이샤는 연신 답답하다며 꼼지락거렸다.
라이샤는 백발을 가리기 위해 조잡한 털 뭉치까지 달았으니 답답할 만도 했다. 곁에 있던 카온이 대신 라이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계획이 뭔데.”
현성과 대화를 한 후 괜히 진희와 마주하는 걸 꺼렸던 서한은 오랜만의 대면에서 시선을 돌렸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자신과 맞대면을 피한 서한의 변화를 눈치 못 챌 진희가 아니었다.
“뭐야?”
“흐음.”
진희는 서한의 앞에 다가와, 그의 양 볼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똑바로 자신을 보도록 고개를 돌렸다.
“제가 아무리 좋아도 공과 사는 구분하죠?”
“뭐…….”
서한이 순간 할 말을 잃자 진희가 키득 웃으며 볼을 놓아주었다.
“괜히 설레지 마시고, 똑바로 해요. 실패하면 화낼 테니까.”
“…….”
또다시 진희에게 놀아난 기분이다. 하지만 아까보다 진희를 보는 게 한결 쉬워지긴 했다. 긴장을 풀게 해줄 속셈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장난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서한은 자신을 맹렬히 노려보는 도마뱀의 눈길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래서 계획이 뭐라고?”
“‘암행어사 출두야!’예요.”
“제정신이야?”
“전 언제나 진심이에요.”
그래, 넌 언제나 진심이었지. 서한이 깊은 한숨을 꾹 눌러 참았다.
“정정당당하게 대문으로 들어갈 거예요. 당연하지만 사상자가 나오지 않게 되도록 평화롭게 제압하세요. 날붙이 무기도 지양하고, 오브를 제작하고 있는 담당자만 찾아내면 돼요.”
“대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도망칠 텐데.”
“물론 도주로는 차단할 거예요. 라이샤가 공장 부근에서 대기하며 도망치려는 사람을 모두 포획할 거니까요. 저와 서한 씨는 대문에서 돌격, 카온은 혹시 있을 비밀 장소나 탈출구를 찾기 위해 우리가 소란을 끄는 동안 잠입하고.”
“정정당당한 게 아니잖아.”
“당당하니까 됐잖아요.”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괜히 어울려 봤자 피곤할 뿐이란 걸 잘 아는 서한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이 암행어사지, 뜯어보면 적의 빈틈을 노리려는 평범한 기습이었다.
“그럼 가죠. 가는 길 어두워지기 시작하니까 조심해요.”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붉은빛의 노을이 공장을 밝히고 있었다.
공장은 거대한 컨테이너와 주택 단지가 겹쳐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공장이 아니라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들의 밀집이었는데, 가까이 가기 시작하자 농밀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티팩트를 다루는 곳이란 게 실감이 들었다.
“누구시죠?”
경비원이 의심쩍은 눈길로 그들을 막아섰다. 이미 카온과 라이샤는 임무를 위해 빠진 상태였다. 강아지 가면과 곰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다가오자 경비원은 지금 당장에라도 공격할 기세였다.
‘C급.’
일반 공장을 지키는 경비원이라기엔 고급 인력이고, 아티팩트를 다루는 곳에서 일하기엔 너무 약하다.
진희는 가면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다가오지 마시고, 거기서 용무를…….”
“암행어사예요.”
“네?”
“출두라고요.”
쾅-!
진희의 주먹이 공장의 대문을 단숨에 부숴 버렸다. 단단한 철문이 우그러져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경비원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진희가 공장 안으로 발을 디뎠다.
“오.”
“그래도 대응은 빠르군.”
경비소 안에 있던 다른 경비원이 재빨리 비상벨을 누른 듯했다. 건물 전체에 커다란 비상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그리고 공장 안쪽에서도 소란이 일었다.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기 시작하자, 진희와 서한이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들어갈까요? 아까 말했지만 사상자 안 생기게 주의하세요.”
“누가 할 소리. 너나 조심해.”
손 맵기론 진희를 당할 자가 없다. 서한이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대답하자, 진희가 이제야 서한다워졌다며 그의 등을 후려쳤다.
진희와 서한의 진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공장 내부엔 경비원보다 강한 헌터들이 즐비해 있었지만, 모두 속수무책이었다.
“뒤, 뒤를 노려라!”
뒤통수를 노리던 화살은 진희의 손에 모두 잡혔고.
“한꺼번에 들어가!”
인해전술로 승부를 보려던 이들은 서한의 주먹 한 방에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너무 쉬운데?”
최근 어려운 상대만 만나봐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손맛을 덜 느낀 서한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단한 전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싱거운 습격이 될 줄은 몰랐다.
“가장 강한 헌터가 B급 정도네요.”
명치를 맞아 기절한 헌터를 복도 구석에 던져 버린 진희가 말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서한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죽은 거 아니지? 명치 좀 세게 때리던데.”
“안 죽었어요. ……아마?”
진희도 불안했는지 자신이 던진 사람에게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했다. 다행히 숨소리는 잘 들리고 있었다.
“근데 공장이라길래 레일이나 기계가 있는 곳을 생각했는데, 별게 없네요.”
오히려 오피스텔 단지를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마다 복도를 향해 커다란 창문이 달려 있단 것 말고는 특별한 점이 없는 건물이었다.
물론 아티팩트의 양은 진희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많았다. 흘겨본 것만으로도 어림잡아 수십의 아티팩트가 방마다 널브러져 있었다.
“아무리 마법과 과학이 발전했어도, 아직 아티팩트를 기계화된 장비로 만들지는 못하니까. 그나마 마법진 조각 정돈 할 수 있지만, 마력을 다루는 건 사람이 해야지.”
“좀 실망이네요.”
“관광하러 온 것 아니다.”
“네네.”
진희가 강아지 가면을 고쳐 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지는 층들은 대충 다 돌아본 것 같았다.
이미 실력 있는 헌터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실이 널리 퍼졌는지, 만나는 헌터마다 비명을 지르고 도망갔다.
덕분에 수월하게 공장을 투어하게 된 진희에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카온이었다.
“찾았어?”
-네. 오브가 많은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위치는?”
-지하입니다. 주변에 결계를 쳐서 마력의 방출을 막아둔 것 같습니다.
공장의 입장에서도 오브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던 것 같았다. 진희는 서한에게 손짓하며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계단 수 개를 뛰어넘으며 지하로 도착한 진희는 한 남자를 제압하고 있는 카온을 발견했다.
카온에게 눌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는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도망가려 하길래 잡아뒀습니다.”
“놔줘 봐.”
느껴지는 기운은 B급이다. 이제 와서 덤비거나 도망치려 해봤자 소용없었다. 진희의 명령에 카온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를 놔주었다.
사내는 사람 같지 않은 창백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을 굴려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가 이 일행의 우두머리란 걸 눈치챈 듯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창백한 안색에 어울리는 가래 섞인 목소리였다.
“당신이 이 오브를 만든 제작자야?”
진희는 지하 방구석에 놓인 무기들을 가리켰다. 형형색색의 무기들 곁엔 아직 아티팩트가 되지 못한 수정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닙니다.”
“거짓말이면 팔부터 부러뜨릴 거야.”
“맞습니다.”
솔직하니 보기 좋다. 진희가 방긋 웃으며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