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22화 (12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22화

“전 전생에서 그녀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깊은 인연은 아니었지만, 제법 곁에서 지켜보곤 했죠.”

“……부단장님의 호칭도 그때 붙여진 건가요?”

“네, 맞아요. 물론 지금도 부단장이긴 하지만, 그때도 부단장인 건 똑같았죠. 제 운명도 아이러니하군요.”

레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부단장이 전생에서 진희의 부하로 살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부단장은 전생에서 적룡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활동한 전적이 있었다. 그간 누구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었다.

“걱정 마세요, 그녀에게 충성을 다한 건 아니니까. 좋은 상사였지만, 저도 목적이 있어서 기사단에 들어갔던 거거든요. 아시잖아요. 전 모든 인생에서 소속을 바꾸며 살아왔다는걸.”

“지금 단장님도 아시나요?”

“아직 주무시는 중이니 모르겠죠. 반신의 저주가 생각보다 오래가고 있으니까요.”

반신.

흉흉한 단어에 부단장이 입이 쓰다며 혀를 찼다. 그들이 성벽을 파괴하기 위해 활동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반신 때문이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서 주구를 모으려던 것 아니셨습니까? 정작 모은 주구는 두 개밖에 없습니다만.”

그때, 건너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경을 쓴 남자, 마노였다.

이곳은 마노의 거주지이자 부단장이 새롭게 마련한 피난처였다. 마노는 레인에게 수고했다며 머리를 토닥이곤, 부단장에게 음료를 건넸다. 마력 회복을 돕는 약초 음료였다.

변장을 하고 난 후엔 후유증이 뒤따른다는 걸 알기에, 마노는 임무가 끝나면 약초를 준비해 두곤 했다.

“고마워요. 주구라면 괜찮아요. 저희가 가진 두 개로도 충분해요.”

“분석이 끝나셨습니까?”

“네, 헤르메스의 총서를 사용한 마야는 한동안 요양이 필요할 지경이지만요.”

부단장이 급히 레인을 찾은 것도 마야가 활동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진희의 기사단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수정구 말고도 부단장이 모은 주구는 두 개였다. 모든 주구는 반신의 저주나 마력이 담겨 있기에, 함부로 다루기엔 매우 위험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이미 두 개의 주구를 완벽히 분석해 냈다. 반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은 진작 발견했다.

“그럼 왜 저희에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노가 불편한 안색으로 물었다. 부단장은 곧잘 이렇게 일의 진척이나 과거를 의도적으로 숨기곤 했다. 부단장은 쓰게 웃으며 마노의 어깨를 어루만졌다.

“미안해요. 제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는 방법이라, 여러분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방법이 뭡니까?”

“그건 나중에 알려줄게요.”

또 말을 바꾼다. 부단장은 불만이 가득한 마노를 달랜 후, 거처로 발을 옮겼다.

“그럼 영감이 가지고 있다던 주구도 이젠 필요 없는 겁니까?”

“필요 없어요. 무엇보다 선생님이 가진 주구는 이미 기능을 상실했거든요.”

“상실? 누가 이미 사용했습니까?”

“네.”

부단장이 영감을 찾은 이유는 주구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물론 기술을 배우겠다는 호기심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여러 번 방문한 덕분에 그는 영감이 가지고 있던 주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구로 인해 뜻하지 않은 정보를 얻게 되었다.

“주구 안에서 기억의 회랑을 발견했어요. 누군가 사용한 후였고요.”

기억의 회랑. 환생자의 전생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저주의 장소.

그곳에서 부단장은 어떤 사람의 남은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주구를 사용한 사람이 지금 사태를 기획한 흑막이에요.”

진희를 만난 타이밍은 안 좋았지만, 오늘의 방문으로 마침 흑막의 정체를 가려낼 수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만약 부단장보다 진희가 먼저 그곳에 도착했다면, 흑막에 먼저 도달하는 건 진희였을 테니까.

잔여 기억에 남은 집착과 광기는 누가 흑막인지 완벽히 가리키고 있었다.

“작은 세계인데도, 악당이 많군요.”

부단장이 그 말을 끝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상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 * *

“즐거워 보이셔서 좋네요.”

공원 의자에 앉아 있던 진희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공원 반대편의 작은 운동장에서 영감이 아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참, 어른스럽네요.”

곁에서 같은 광경을 보고 있던 현성이 작게 중얼거렸다.

진희는 영감을 보육원으로 초대했다. 테러범이 언제 드나들지 모르니 몸을 피신하라면서,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안전한 장소로 보육원을 추천한 것이다.

현성과 진희가 거주한단 사실에 납득한 영감은 보육원에 온 후, 아이들의 애정 공세를 받기 시작했다.

진희가 미리 전화로 영감이 온다는 걸 귀띔한 상태였다.

“사랑받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이니까요.”

진희의 말에 현성이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을 빠르게 눈치챈 아이들은 살갑고 아이다운 반가운 태도로 일행을 맞이했다.

“할아버지! 이것도, 이것도 만들어줘요!”

“야! 저리 가! 내 벅스봇 개조가 먼저야!”

“아이고, 허리 끊어진다, 이놈들아!”

보육원의 아이들은 긴 시간 동안 어른 없이, 사랑해 주는 가족 없이 지내왔다. 진희가 처음 왔을 때도 느꼈지만 이 아이들은 주변의 눈치를 너무 잘 봤다.

어른이 기분이 나쁠 땐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슬프거나 섭섭한 일이 있으면 순진한 얼굴로 다가와 위로해 주려 한다.

어린아이가 눈치를 보며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건 꽤나 서글픈 일이었다.

“하여간 영감님이 오브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세요?”

“경기도 근방에 ‘공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불법적인 일을 하는 곳은 아닌데, 방식이 그 공장과 똑 닮았다더군요.”

“아티팩트를 만드는 공장도 있어요?”

“보통 마법사의 연구소나 기업에서 만들긴 합니다만, 공장도 드물게 있긴 합니다. 대부분은 공방이라 부를 정도로 작은 규모지만, 이 경우엔 제법 크다고 하더군요.”

영감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오브라고 확신했다. 마감 처리 방식이나 규격이 공장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수준이라고 덧붙였다.

“평소엔 아티팩트 제작 능력이 떨어지는 중소기업들의 외주를 해주는 곳입니다.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곳이에요.”

“흐음, 함부로 기습하긴 힘들겠네요.”

“네, 어떻게 꼬투리라도 잡아서 방위대 이름으로 영장 발부를 할 순 있지만…….”

“됐어요, 현성 씨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닌걸요.”

“죄송합니다.”

현성은 아직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언론에서 관리 본부의 비리가 연신 터져 나가고 있는 지금 섣부른 활동은 금물이었다.

“괜찮아요, 영장 없어도.”

“네?”

“변장하면 되니까.”

이번에 테러범을 만나면서 새삼스럽게 배운 것이 있었다.

변장. 들키지만 않는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진희가 오랜만에 스산한 웃음을 짓자 현성이 불안한 기색으로 신음을 삼켰다.

* * *

“이거 재밌네.”

지엑스의 A급 헌터, 정재민은 휘파람을 불며 과장스럽게 놀란 척을 했다. 그의 앞에선 처참한 몰골의 박민성이 숨을 허덕거리고 있었다.

진희가 손상시킨 마력 회로를 다시 재생시키기 위해 상위 마법사에게 의뢰하던 도중, 재민은 또다시 정체불명의 정보상에게 연락을 받았다.

정보상은 자신이 브로커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브리온을 소개해 주었다. 최근 브리온이 큰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사업을 위해 지엑스와 협약을 하고 싶단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근거도 없는 권유를 무시했을 테지만, 정재민의 직감이 발을 잡았다.

이 정보상도 뭔가 목적이 있는 게 분명했다. 박민성을 알려줬을 때도 느꼈던 사실이었다.

‘우릴 이용해 누굴 엿 먹이고 싶은 거겠지.’

박민성은 우연이라 하더라도, 이번 권유는 그 의도가 뻔히 보였다. 브리온의 편인지, 아니면 정부의 편인지 모르겠지만, 정보상은 뒤숭숭한 목적으로 그에게 접근한 게 뻔했다.

재민은 거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네가 날 이용하려 하는 만큼 나도 널 이용해 주마.’

그리고 브리온에게 공유받은 이 기술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효과를 보였다.

“대단하네. 단박에 회복했어.”

“허, 허억, 허억!”

“가서 좀 씻고 와. 피비린내가 장난 아니다.”

민성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인 후, 재민을 지나쳐 걸어갔다. 온몸의 혈관에서 피가 터져 고통스러울 텐데도 걸음걸이는 힘이 있다. 그놈의 복수가 뭔지, 그의 증오는 재민마저도 혀를 찰 지경이었다.

“신기하게 생겼단 말이야.”

재민은 민성의 가슴에 꽂았던 송곳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푸른빛을 띠던 수정의 송곳은 이젠 빛을 잃고 평범한 돌로 변해 버렸다.

브리온은 이것을 카트리지라고 표현했다. SC 프로젝트의 최종 산물로, 안에는 다수의 영혼이 압축되어 있었다.

카트리지는 이 영혼을 사람에게 주입하여 반영구적으로 마력 감응력, 마력 회로, 마나 홀을 강화시키는 도구였다.

“비현실적이군.”

온갖 기적이 마법으로 실현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이 물건은 정도가 심했다. 그저 꽂는 것만으로 상처가 치료되고, 마력을 증가시키는 도구라니, 억만금을 줘도 모자랄 엘릭서나 다름없었다.

물론 조건은 제법 있었다. 카트리지를 투여할 대상자가 심신이 안정되어 마력으로 방어를 하지 않는 무방비 상태여야 하며, 설령 투여된다고 하더라도 부작용이 존재한다.

부작용은 폐인이 되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다.

재민은 민성의 사례를 보며 부작용이 왜 그렇게 험악한지 알 수 있었다. 투여에 성공했는데도 핏줄이 터지고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니, 실패했을 땐 예외 없이 죽을 듯했다.

‘우리에게 너무 친절한 것도 찝찝하긴 한데.’

브리온은 카트리지 수십 개를 지엑스에게 지원했고, 심지어 SC 프로젝트를 위한 연구소를 만들 수 있도록 인력까지 내주었다.

멋진 미소를 매달고 계약하러 왔던 브리온의 패스파인더 팀장이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미소였다.

‘뭐, 나야 실적이 되니까 상관없지만.’

지엑스에선 이 협약이 재민의 덕분인 줄 알고 온갖 특혜를 쥐여줬다. 같은 A급 헌터들을 부하로 다룰 수 있는 지휘권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활동 예산까지. 주는 걸 거절할 생각 없는 재민은 그것들을 냉큼 챙겼다.

“만약 이걸 한 번 더 사용한다면…….”

돌로 변한 카트리지를 손으로 부러뜨리며 재민이 중얼거렸다. 카트리지는 부작용만 무시한다면 몇 번이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만약 C급의 마력으로 돌아온 민성에게 이 카트리지를 한 번 더 사용한다면, 그는 B급까지 성장할 수 있을까? 관문급을 돌파해서?

재민이 불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목표이자 사랑하는 연인인 이선이 떠올랐다. B급이 되겠다고 비루한 재능으로 아등바등 노력하는 그녀가 우스웠다.

이런 기적 같은 도구 하나로 B급이 될 수 있는데, 아직까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수련하고 있을 그녀를 지금 당장에라도 보고 싶었다.

물론 그녀에게 카트리지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카트리지를 미끼 삼아 추악한 명령을 내리거나, 진전이 없을 그녀를 절망시킬 도구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아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