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1화
“초기에 만들어진 시장이라 그럽니다. 재건축 이야기도 나오고 있긴 한데, 글쎄요. 이젠 오는 사람만 오는 곳이 되어서요.”
“영감님은 인기 많지 않아요?”
진희의 말투에 웃음을 터뜨린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는 사람만 찾아오니까요. 영감님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다들 소속 기업에서 아이팩트를 처분해 주지, 본인이 직접 발품 파는 일은 적습니다.”
현성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들으며 그들은 허름한 상가 건물로 들어섰다. 도착한 곳은 헌책방이었다.
책 내음이 가득한 상점에 들어서자 현성이 벽에 달려 있던 종을 울렸다.
“영감님, 계십니까?”
“안에 있다-”
대답은 안쪽에서 들려왔다. 현성은 진희에게 따라오라 말한 뒤, 먼지가 가득한 책들 사이로 나아갔다.
헌책방의 가장 안쪽, 녹슨 철문을 열자 책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밝은 빛이 그들을 반겼다.
외견과 달리 깔끔한 회색 벽과 밝은 조명, 새것 같은 철제 탁자 위엔 수많은 아티팩트가 즐비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엔 작업복을 입은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굽은 등의 백발의 노인은 날이 선 눈빛으로 현성을 바라보았다.
“옆엔 누구냐.”
“서진희 씨입니다. 최근…….”
“뭐냐, 역천검인가 하는 걔냐?”
역천검이라, 인터넷에서나 불리던 낯 뜨거운 별명에 진희가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무협 소설에서나 등장할 법한 별명은 들을 때마다 어색했다.
“근데 왜 데려왔는데? 손님 소개는 한동안 안 받는다 했다.”
“손님이 아니라,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요.”
현성을 대신해 진희가 대답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현성 앞으로 나와 영감에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외모는 늙어 보이지만, 눈동자만은 젊은이들 못지않게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장사꾼이지 심부름 센터가 아냐.”
“영감님, 부탁드립니다. 중요한 일이에요.”
“아무리 네가 부탁해도 지금은 안 돼. 나도 선약이 있어.”
영감이 끌끌 혀를 찼다. 그리고 턱 끝을 돌려 구석 탁자를 가리켰다. 온갖 아티팩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이 그곳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등까지 내려오는 사내가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었다.
“전 괜찮습니다, 선생님.”
“요새 바빠서 제자 좀 가르치려 했더니, 괜한 불청객이 와버렸어.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돼.”
“하하, 제가 다음에 오면 되죠.”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현성과 비슷한 키의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진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잔 의미였지만, 진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제자인 김민철이라고 합니다.”
“제자? 영감님, 제자도 들이셨습니까?”
현성이 깜짝 놀라 영감에게 물었다. 영감은 오랜 세월 혼자 일하고 있었다. 심부름꾼이나 제자 한 명 두지 않고 가게를 운영해 왔는데, 처음으로 제자를 들인 것이다.
영감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그래, 나도 허리가 아파서 잡일 대신 할 제자가 필요해서 데려왔다.”
“하하, 제가 부족해서 많이 배우고 있답니다.”
김민철은 다시금 진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진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현성이 왜 그러냐는 듯 진희에게 물으려 하자, 그녀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녀석의 영혼에서 징조가 보이는군. 흑색이다.]
“당신 누구야?”
“……네?”
진희가 그의 손을 잡지 않고, 대신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 몸이 굳은 민철이 뒷걸음질 치며 그녀의 손을 피했다.
“얼굴, 잘 바꿨네.”
“…….”
“세 번째 보는 게 아니었다면 속았겠어.”
얼굴을 바꾼다는 이야기에 현성의 얼굴도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곧장 주머니에서 부적을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서리 내린 벽을 오르는 거미들아.]
그가 발동시킨 결계가 방을 가뒀다. 새하얀 서리가 주변을 가득 메우자, 안 그래도 밝았던 방이 창백한 색을 띠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민철이한테서 떨어져!”
“잠시만요, 영감님.”
“뭘 잠시만이야! 이 은혜도 모르는 놈이, 저리 안 비켜!”
영감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오려 했지만 현성이 막아섰다. 영감도 마력을 다룰 줄 아는 헌터였지만 현성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영감의 필사적인 외침을 뒤로하고, 진희는 턱을 괴며 말했다.
“내가 운이 좋은 건지, 너희가 운이 나쁜 건지 모르겠어. 어떻게 어디 갈 때마다 이렇게 마주치는 걸까?”
“…….”
“왜 대답이 없어? 그 ‘얼굴’은 난처한 표정 짓기 어려운가?”
“놀랍군요. 이 변장을 꿰뚫어 본 사람은 지금껏 없었는데.”
민철의 목소리가 변했다. 호쾌했던 목소리가 낮아지고, 나른하고 권태로운 목소리로 그가 웃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영감이 순간 말을 잊었고, 현성은 주머니에서 다른 부적을 꺼내 들어 언제든 제압할 준비를 갖추었다.
“우리의 관계는 우연이라고 표현하는 것보단 운명이란 단어가 어울리죠. 당신과 우리는 운명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나랑 엮지 말아줄래? 테러범이랑 같은 사람 취급당하고 싶진 않아.”
테러범.
현성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정구의 던전을 공략하고 난 후, 진희는 테러범들이 외견을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었다. 서한이 데려왔던 ‘마야’가 바로 외견을 바꾼 테러범이었다.
하지만 서한과 현성의 눈썰미론 도저히 간파할 수 없었던 완벽한 변장이었다.
외견을 바꾼 이들을 세 번째 마주한 진희도 그들의 변장을 간파할 능력은 없었다. 그저 직감과 바르그의 조언 덕분이었다.
“흠, 이렇게 눈이 좋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어떤 방법으로 눈치챘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민철이 곤란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의 질문에 진희가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라면 알려주겠냐?”
사실 모르지만, 아는 척하며 진희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뽑자마자 동시에 그의 목을 노렸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이었으나, 민철은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검을 막았다.
‘마법.’
아무런 주문도, 마력을 움직이는 낌새도 없었는데 그는 손에 방어 마법을 두르고 검을 막아냈다.
“아쉽게 됐군요. 선생님껜 아직 배울 게 많았는데…….”
검을 잡은 채로 민철이 고개를 돌려 영감을 바라보았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어리둥절한 모습의 영감에게 민철이 쓰게 웃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폐를 끼쳐 드렸군요.”
“미, 민철아, 너…….”
“나쁜 손님이 들렀다고 생각하세요. 그동안 실례했습니다.”
“누가 보내준대?”
진희의 검에서 번개의 마력이 뿜어 나왔다. 바르그의 힘까진 막을 수 없었는지, 민철이 손을 털어내고 곧장 뒤로 도약했다.
하지만 그 뒤에서 기다리는 건 현성이었다. 그는 민철에게 부적을 던져 도망칠 수 없도록 퇴로를 차단했다.
“다음에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서진희 씨. 이런 우연 말고 제대로 된 자리에서요.”
부적이 날아오고 있음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진희가 대답하지 않고 파고들어 그에게 검을 찔러 넣으려던 찰나.
“비켜.”
그녀의 앞에서 게이트가 출몰했다. 검은색 공간에서 튀어나온 한 소년은 진희를 막아서고, 민철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검을 막은 건 소년이 들고 있던 불길한 검은색의 지팡이였다.
[아악!]
그때 지팡이에 닿은 바르그가 비명을 질렀다. 놀란 진희가 황급히 검을 다시 되돌리자, 소년이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다시 게이트로 몸을 날렸다. 익숙한 얼굴의 더벅머리 소년, 레인이었다.
레인은 진희를 증오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민철과 함께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 * *
“민철이는 두 달 전에 나타났다.”
잠깐의 전투였지만, 결계와 마력의 충돌로 상점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진희와 현성은 넋이 나간 영감 대신에 주변을 정리한 후 영감의 앞에 앉았다.
의자에 앉은 영감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10년은 늙은 초췌한 안색으로 말했다.
“싹싹한 놈이었어. 물건 감정 맡긴다고 찾아왔으면서, 내 대신 손님도 맞이하고 물건도 정리해 주더구나. 썩 나가라고 화를 내도 사람 좋게 웃으면서 도와줬어.”
그동안의 영감이었다면 이런 속 보이는 호의에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늙었다.
20년 동안 홀로 버텨온 그의 마음속 빈틈을 민철은 자연스럽게 파고들었다.
“난 게이트로 아들을 잃었다. 그리고 민철이는, 내 아들과 똑 닮았었고.”
민철이 사라지고 한참 난동을 부리던 영감이 현성의 ‘변장’이란 단어에 넋을 잃은 이유였다.
민철은 떠난 아들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아들처럼 어리진 않았지만, 아들이 성장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영감은 차츰 민철에게 마음을 연 것이다.
“자주 오진 않았지만, 올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도구를 기똥 차게 가져오더구나. 지금 생각해 보면, 미리 조사해서 가져온 거겠지.”
영감의 아티팩트 감정 능력은 특별하다. 감정소에서 감정받지 못하거나 숨겨진 마법 따위를 귀신같이 찾아내는 그의 실력은 업계에서 정평이 났다.
민철, 테러범은 그 능력을 탐내 제자로 숨어들어 온 것이다.
‘왜 굳이?’
안타까운 이야기였지만, 진희는 내심 왜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을 한 걸까 의구심이 들었다.
물론 아티팩트 감정은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기술이긴 했지만, 굳이 변장까지 하면서 배울 정도로 메리트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A등급 이상 가는 마법사라면 수준급의 감정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감정은 감춰진 기술이 아니었다. 돈만 있다면 누구라도 배울 수 있었다.
‘다른 목적이 있어.’
그들이 영감에게 접근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너희는 무슨 용건이라고?”
민철에 대한 이야기를 끝마친 영감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현성은 복잡한 표정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배신감에 힘들어하는 영감의 모습을 보자니 선뜻 그들의 목적을 밝히기가 꺼려졌다.
진희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침묵했다.
“영감님, 혹시 아이들 좋아하세요?”
“뭐?”
마음이 다친 사람에겐 귀여운 게 약이다. 진희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 * *
“타이밍이 안 좋았네요.”
“괜찮으세요?”
“네, 레인 군은 괜찮나요?”
“전 멀쩡해요.”
게이트를 타고 넘어간 부단장은 곧장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갑갑했던 얼굴을 매만지며 부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군요. 운명의 불합리함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엮일 줄은 몰랐어요. 하필 일주일 만에 찾아간 선생님 집에서 그녀를 만날 줄이야.”
이래서 영웅이란 족속들이 싫다. 부단장은 쓰게 웃었다.
“직접 보니 확실히 알겠군요. 그녀는 변했습니다.”
레인은 말없이 부단장에게서 떨어져, 게이트가 사라진 허공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진희 일행이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얄궂어요. 가장 기사다웠던 그녀가 그렇게까지 난폭해졌을 줄이야.”
“아는 사이예요?”
“아, 레인 군에겐 말한 적 없던가요.”
부단장은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땐 몸의 마력이 제한되는 기분이라 온몸이 뻐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