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20화
“아무래도 비인증 헌터들을 ‘생산’해 낸 브리온의 증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브리온. 클로이가 다녀간 후 좌시할 수 없게 된 기업이었다.
클로이는 브리온의 ‘SC 프로젝트’에 대해 폭로했다. 이민자들의 능력을 가공하여 인공적인 헌터들을 생산해 낸다는 프로젝트로서, 그 성과가 바로 헌터 시장에서 날뛰기 시작한 B급 헌터들이었다.
해저 동굴의 꽃도 브리온이 만들어낸 존재였으며, 던전 또한 실험을 위해 개조된 곳이었다.
“증거를 잡아, 브리온을 치죠.”
“……네?”
진희의 말에 PD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흰 지금 관리 본부의 권한 축소와 함께 방위대의 권한 확대가 필요해요. 거기에 현성 씨가 방위대의 최고 결정권자가 되는 게 제일 좋은 흐름이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명분과 과정이 필요해요.”
진희가 깔아놓은 떡밥은 세 가지다.
“우선 관리 본부의 여론을 악화시키는 걸 가속화해요. 대중들에게 관리 본부가 얼마나 무능한 기관인지 알리고, 반대로 치안을 지켜야 하는 방위대가 왜 소극적으로 활동해야만 했는지 알려주는 거예요. 간부들이 반격을 준비하겠지만, 우선 여론을 먼저 형성해 놓는 게 첫 번째예요.”
대중은 처음에 공개된 충격적인 소식에 몰입하지, 후에 나오는 반박 기사나 의견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이다. 수많은 언론사, 정치인이 곧잘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큰 사건이 벌어지는 도중엔 이목이 집중되지만, 뒷수습엔 관심 없는 사람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관리 본부의 무능과 방위대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현성 씨를 비롯한 방위대의 실무진이 얼마나 유능한지 보여주는 사건을 일으킵니다.”
“그게 브리온이군요.”
“맞아요.”
비인간적인 실험을 계획하는 브리온. 치안을 어지럽히는 비인증 헌터들의 주인인 브리온.
그리고 그런 브리온의 범법 행위를 낱낱이 폭로하는 방위대의 믿음직한 헌터들.
“브리온을 악당으로, 방위대를 영웅으로 만들자는 거예요.”
아무리 헌터들이 득세하는 세상이라 하지만 정부는 여론을 무시할 수 없다. 확실한 명분과 근거가 있다면 고인 물이 된 조직이라 한들 흔들 수 있다.
“하지만 반격하려 할 겁니다. 관리 본부 늙은이들이 마냥 멍청하진 않아요.”
“그건 PD에게 맡길 거예요.”
“뭐, 열심히 루머를 퍼뜨려 볼게요.”
PD는 국내에서 순위권 안에 드는 헌터 영상 콘텐츠의 제작자이고, 그 방면엔 인맥도 넓은 편이다.
관리 본부가 언론을 이용해 공격하려 하면, PD가 온갖 루머로 막겠다는 이야기였다.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좋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할 땐 별도리가 없어요.”
현성의 성격이라면 반대할 것 같았다.
“그럼 결국 그들과 똑같은 짓을 벌이는 것 아닙니까.”
대중의 이목을 돌리는 루머를 양산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끈다는 건 그동안 기득권층이 꾸준히 해오던 짓이었다.
“다르죠. 적어도 우린 사리사욕을 챙기진 않으니까.”
“……하지만 브리온이 쉽게 당해줄 리 없습니다.”
“걱정 마세요. 우리에겐 금강이 있으니까. 세영 씨도 두 손 들고 도와줄걸요? 서한 씨야 당연하고.”
이세영.
헌터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강요하는 이상주의자인 세영이라면 도와줄 것 같긴 했다. 게다가 세영은 진희를 향한 집착 하나는 두말하면 서러울 정도였다.
처음엔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들렸는데, 하나하나 뜯어보니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세영과 서한의 존재, PD의 조력, 압도적인 무력까지.
게다가 아직 완전히 믿고 있진 않지만, 클로이가 준비해 온 ‘연구소’라는 증거도 남아 있었다.
브리온과 비인증 헌터의 관계성, 실험을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만 얻을 수 있다면 브리온을 공격하는 것도 허황된 일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관리 본부를 몰아내고 브리온을 떨어뜨릴 수 있으면, 이주민과 연결할 수 있어요.”
브리온은 이주민들을 사용해 실험을 개시했고, 관리 본부는 이주민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둘을 같이 공격하면 그동안 알아내지 못한 이주민의 비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테러범과도 이어지겠죠.”
물론 아직도 테러범과 이주민 사이의 연결고리는 얇다. 하지만 진희는 이 방향이 맞다고 직감적으로 판단했다.
영혼을 다루는 이주민, 영혼을 분할하는 부단장. 게이트에서 넘어온 이주민의 특징과 게이트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마야의 존재.
우연이라기엔 맞아떨어지는 퍼즐이 너무 많았다.
“물론 위험은 각오하고 있어요.”
이제 보육원에 대해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진희라도 수많은 감시와 탐색을 뿌리칠 순 없었다.
그러나 진희는 자신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어엿한 C급의 전력이었고, 이곳에 거주하는 이들의 실력 또한 탁월했다.
헌터 군대라도 몰려오지 않는 이상 지려야 질 수가 없었다.
“그만한 주목을 받으면, 아이들이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허락은 구했어요.”
진희가 쓰게 웃었다. 보육원의 아이 중 진희의 선택에 이견을 표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앞으로 힘들어질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소라는 당당한 얼굴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안타까운 과거를 딛고 일어난 아이들은 그녀의 생각보다 강인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이미 제가 끼어들 틈은 없군요.”
현성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는 결단을 내리면 결코 돌이키는 법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상진 씨가 가져온 정보란 게 뭡니까?”
“비인증 헌터들이 사용하는 오브의 출처를 알아냈다고 하더라고요.”
“오브요?”
오브(Orb)란 헌터들이 애용하는 수납 방법을 뜻했다. 헌터들은 곧잘 무기나 장비 등을 동그란 수정구로 가공하여 들고 다니는데, 이런 식으로 가공된 오브는 헌터의 필수품이었다
오브화(化) 마법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마법사가 직업으로 존재할 지경이었다.
“단체로 고용된 애들은 보통 배급된 무기를 사용하게 마련이거든.”
아이들과 노는 게 질렸는지, 아이들에게 공을 던져주고 창문에 매달린 상진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희와 현성의 대화를 줄곧 훔쳐 듣고 있었는지 그는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헌터는 모두 전용 무기를 사용하잖아? 활쟁이는 활을, 검쟁이는 검을 쓰는데,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무기만 봐도 누군지 알아보기도 해.”
헌터는 무기를 쉽게 바꾸지 않는다는 특징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헌터는 다른 무기를 습득해도 바꾸기보단 자신의 무기를 강화하는 길을 선택한다.
익숙한 무기를 선호하는 헌터들의 보편적인 성격이었다.
“그래서 비인증 헌터들에게 의뢰를 할 땐 무기나 장비 따위를 지원해 주곤 하거든. 좋은 무기를 대여해 주면서 성공률을 올리려는 목적도 있지만, 정체를 들키지 말란 뜻이기도 해.”
외모야 숨길 수 있더라도 무기까지 숨기긴 어렵다. 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오브화된 무기가 싼 편은 아니었지만, 뒤숭숭한 의뢰의 안전장치라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근데 그 비인증 헌터들, 모두 같은 오브를 쓰고 있더라고.”
“무기가 같단 말씀입니까?”
“아니, 오브가 같아. 궁금해서 한번 뺏어봤는데, 모두 똑같은 마감 처리를 했어. 하나 가져왔는데 볼래?”
상진이 주머니에서 오브를 꺼냈다. 투명한 색의 오브는 주먹의 반 정도로 작고, 깔끔한 마감이 돋보였다.
무색과 원형을 갖춘 기본적인 오브였다. 오브를 받은 현성이 진희에게 주려 하자 진희는 고개를 저었다.
“전 봐도 잘 몰라요. 현성 씨가 살펴봐 줘요.”
“음. 별다른 특징은 보이지 않는데요.”
“그렇지? 그럼 이것도 한번 봐봐.”
상진이 두 번째 오브를 꺼내 현성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도 똑같은 크기와 형태의 오브였다.
“……비교해 보니 알겠군요.”
마력을 이용해 오브를 이리저리 살피던 현성이 다시 상진에게 돌려주었다.
“마감 처리한 마력의 흔적이 둘 다 똑같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작업한 게 분명해요.”
오브를 만들 때 사용되는 마법은 축소와 봉인, 그리고 복원이다. 무기를 축소하고 수정구로 봉인하는 것은 손이 많이 가는 높은 등급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복잡한 마법일수록 사용자의 흔적이 진하게 남는다.
“기계처럼 깔끔한 솜씨예요. 유지력과 보존력의 균형이 완벽합니다.”
“설명해 줘도 몰라요. 하여간, 그 오브가 같은 사람에게서 만들어진 건 맞죠?”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그렇겠군요.”
현성이 인정하자 상진이 창문을 뛰어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펴고 말했다.
“거봐, 내가 눈썰미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그래그래.”
칭찬해 달라는 상진의 말에 진희가 영혼 없이 대답했다.
“하여간 정리하자면, 비인증 헌터들이 사용하는 오브는 모두 한 사람이 제작했으니, 그 사람을 찾아내서 브리온과 거래한 증거를 잡아내잔 이야기예요.”
“출처는 짐작되는 곳이 있습니까?”
“그건 없지만,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알아요. 한국의 감정 전문가이자, 온갖 아티팩트의 매수를 담당하는 학자.”
진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성 씨도 아시죠?”
“영감님을 말씀하시는군요.”
‘영감’, 아는 헌터들만 안다는 아티팩트 보부상.
상위 헌터들에게 알려진 정보상이 ‘제비’ 서혁이라면, 아티팩트의 은밀한 감정과 매매를 위해 찾아가는 건 ‘영감’이었다.
현성이 진희를 처음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정체불명의 수정구를 감정받으러 갔던 사람이 바로 영감이었다.
“하긴, 영감님이라면 대량 생산된 오브의 행방 정돈 알 만하군요. 온갖 물건을 다루는 분이시니까요.”
“전 인맥도 좁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요. 하지만 현성 씨는 아는 사이잖아요.”
“좋습니다, 만나서 얘기해 보도록 하죠.”
현성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도 수사하던 도중 영감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자주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회의를 마무리 지은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당장 가요. 오후 수련 시간 전에만 돌아오면 되니까.”
“으음, 영감님은 외부인을 싫어하셔서 불편할 텐데요.”
“괜찮아요. 전 연장자한테 사랑받는 편이거든요.”
또 되지도 않는 소릴 한다. 진희의 농담 어린 말에 현성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 그럼 난 이제 뭐 해?”
“가서 애들이랑 놀아.”
“알았어!”
상진은 진희의 말에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곤 창문 밖으로 다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PD가 허허, 하고 웃었다.
“뭐, 그럼 다녀오세요. 전 할 일도 있으니까 자리나 지킬게요.”
PD의 힘없는 배웅을 뒤로하고, 현성과 진희는 영감이 있는 시장으로 떠났다.
* * *
헌터 시장은 서울 곳곳에 위치한다. 대부분 던전이 많이 등장한 시내에 만들어지게 마련인데, 말이 시장이지 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건물이 즐비한 곳도 있었다.
큰돈이 오가는 곳이다 보니 대부분 보안도 철저했고, 막 나가는 헌터라고 해도 시장에서만큼은 사고를 일으키지 않는 게 상식이었다.
그도 그럴 게 헌터의 물품을 파는 사람들도 대부분 헌터였기 때문이다.
“의외로 사람이 없네요.”
“시장이라고 해도 걷다가 물건을 사는 시장이 아니니까요. 물론 여기가 시장 중에선 적은 편이긴 합니다.”
진희와 현성은 강변역 주변의 헌터 시장을 찾아왔다. 크고 작은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인 이 시장은 진희가 생각한 헌터 시장보다 사람이 적고, 허름했다.
게다가 길 건너에 아파트 단지가 보이다 보니 주변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장소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