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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19화 (119/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19화

당연하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진희였다.

“그 대련을 진검으로 했었다면, 난 이곳의 누구보다도 빨리 목이 떨어졌을 거야.”

라이샤는 담담하게 진희와의 대련을 평가했다.

직감을 의지한 전투 방식은 파훼되는 순간 역전의 기회조차 사라진다.

그런 면에서 소라의 전투 방식은 파훼하더라도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견고한 성벽과도 같았다. 단지 그보다 더 강하고 견고한 힘으로 맞서면 힘없이 무너지는 게 문제였다.

“전투 방식을 바꿔야 할까요?”

“추천하진 않아. 지금 무술도 충분히 완성도는 높아 보이니까.”

“하지만 저보다 강한 사람에겐 진다면서요.”

“너보다 강한 사람과 단독으로 만날 일이 있어?”

“그건…….”

소라가 순간 말을 잃었다. 헌터는 파티로 활동하는 게 정석이었고, 그래야만 했다. 파티의 전위를 책임지는 사람이 목숨을 건 도박 수 따위를 두는 건 하책이나 다름없었다.

소라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라이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런 싸움 방식을 고수하게 된 건, 내 적들 때문이었어.”

“네?”

“나에겐 싸움을 가르쳐 줄 스승도, 동료도 없었거든. 주변의 모든 사람이 다 적이어서, 살기 위해선 어떻게든 싸워야 했어. 나보다 큰 거인을 상대할 때도 있었고, 비교도 안 되는 강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달려야 했던 때도 있었어.”

라이샤는 진희에게도 그녀의 과거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다. 진희는 라이샤가 불우한 운명을 타고났고, 그걸 바꾸기 위해 카사가 세상을 버리고 라이샤를 선택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과거는 묻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라면 당사자가 스스로 꺼내기 전까진 참견하지 않는 게 그녀의 성격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라이샤도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지 않았다. 그런데 진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이야기를 소라에게 꺼낸 건, 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약했으니까, 나보다 강한 사람을 쓰러뜨리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어.”

좀 더 과격한 공격을, 예상치 못한 기습을 가하기 위해 라이샤의 몸놀림은 마치 짐승처럼 변화했다.

“그렇게 싸워온 나니까, 난 너처럼 단단히 버티는 법을 몰라.”

“아…….”

“누굴 지키면서 싸워본 적이 없거든.”

적을 물어뜯는 이빨은 될 수 있어도, 소라처럼 아군을 지키는 단단한 방패는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소라의 무술을 본 후 라이샤는 순수하게 감탄했던 것이다.

“하지만 넌 그렇게 갈고닦은 무술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어. 아군을 지킨다는 훌륭한 목표가 이미 있지만, 부족한 점이 있는 거지?”

라이샤는 자신의 부족한 말솜씨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더 직설적이게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혹시 죽여야만 하는 누군가가 있는 거야?”

“…….”

정확했다. 소라는 조금 서글픈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진희도 자신의 수련 방식을 보고 복수해야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었다.

그만큼 소라의 마음이 쉽게 드러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수련한 무술을 바꿔서라도 죽이고 싶은 상대가…….”

“있어요.”

소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강할지는 몰라요. 수배자가 되었으니 평생 못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만약 만나게 된다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죽일 수 있을까?

소라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라이샤는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했다.

“……전 제가 대단한 줄 알았어요.”

소라가 라이샤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우리 보육원이 열악하다고 해도 잘해 나갈 자신이 있었거든요.”

은정은 소라를 보고 곧잘 안타깝다고 말하곤 했다. 소라는 무슨 일에도 재능을 보였다.

공부를 한다면 항상 순위권에 들었고, 운동 실력이 좋아 중학교 땐 선수로 뛰기도 했다. 교우관계가 나쁜 것도 아니며, 성실하고 올바른 성격에 고등학생이 되도록 작은 비행(非行)조차 하지 않았다.

어른스러워 아이들을 돌보는 언니 노릇도 톡톡히 해냈다.

“아주 잠깐, 정말 조금 방심했던 게 그 사람을 만날 때였는데…….”

하지만 아무리 어른스럽다 하더라도 또래 애들처럼 여린 면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미래의 고민, 자신이 가진 이능력에 대한 고민, 온갖 걱정으로 힘들어하던 때, 그 남자 ‘박민성’을 만났다.

박민성은 보육원에 아르바이트를 위해 온 학생이었다. 자질구레한 시설 관리를 위해 고용된 그는, 특유의 사교성으로 아이들과 쉽게 친해졌다.

겉으로 봤을 때 박민성은 성실하고 훤칠한 청년이었다. 힘든 일에도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었고, 아이들의 떼를 웃는 얼굴로 받아주었다.

보육원의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을 여는 건 시간문제였다. 선생님들도 그를 친근하게 대했고, 아이들은 그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소라는 가장 늦게 마음을 연 아이였다.

“고민 상담을 했어요. 제 능력에 대해서.”

시작은 장래에 대한 고민이었다. 대학은 어떻게 할지, 장래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동생들을 돕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지, 단순하게 시작한 고민 상담은 점점 비밀스러운 내용이 오가기 시작했다.

소라가 말하지 않아도 박민성은 보육원의 비밀에 대해 조금 눈치챈 상태였다. 그는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주었고, 보육원 아이들이 가진 이능력에 대해 의심 없이 믿어주었다.

그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에겐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태도에, 소라는 너무 의지하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이 헌터로 각성했어요.”

늦은 각성이었다. 없는 일은 아니지만 사춘기를 지난 사람이 마력을 느끼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가 보육원을 나가리란 생각에 섭섭하긴 했지만, 그라면 언제고 보육원에 찾아와 아이들과 놀아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박민성은 그렇게 말하며 보육원을 떠났다. 금의환향해서 돌아오리라 자신감 있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배신이었다.

“조폭이 들이닥칠 때, 전 아무것도 못 했어요.”

박민성이 아이들의 비밀을 팔아버린 조직, 까마귀파는 갑자기 찾아왔다. 이미 물밑 작업을 끝낸 그들은 경찰의 신고도 아랑곳없이 찾아와 아이들의 이능력을 확인했다.

울면서 손끝에서 물을 뽑아내는 아이, 날개를 잡혀 우는 아이, 아이들을 놔달라고 매달리는 선생님. 그 모든 걸 보고 있으면서도 소라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사내들에게 붙잡혀 억지로 능력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무력했다. 그리고 억울했다. 도와주리라 믿었던 경찰도 오지 않았고, 구청은 그들을 외면했다. 반항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붙잡히던 때의 분함과 공포는 지금도 때때로 식은땀이 날 정도로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 소라는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상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힘을 가지고 돈을 가진 부도덕한 이들에게 소라의 상식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금세 정신을 차리고 보육원의 맏언니로 아이들을 돌본 건, 소라의 강한 정신력 덕분이었다.

“저희를 팔아먹은 그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물론 그렇다고 원한을 잊은 건 아니다. 진희가 오기 전까지 소라는 매일 밤 박민성을 죽이는 상상을 되풀이했다.

지금은 박민성에게 복수할 정도의 힘을 얻었다. 마력은 아슬아슬하게 C급에 도달했지만, 실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박민성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생각하면, 곧장 그를 죽이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라서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소라는 허망한 얼굴로 라이샤를 바라보았다. 길을 잃은 아이와도 같은 표정에 라이샤는 순간 말을 잃었다.

라이샤는 생명을 죽이는 것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서 무슨 짓이든 일삼아온 그녀에게, 소라의 고민은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잘 모르겠어.”

그렇기에 라이샤는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해도 기만이라 생각했다. 소라에게 복수를 멈추라 충고할 명분도, 복수를 끝마친 뒤 닥쳐올 죄책감을 덜어줄 요령도 라이샤에겐 없었다.

“하지만 소라가 결심할 순간이 온다면, 도움이 될 수 있는 무기를 줄게.”

“무기요?”

“응.”

라이샤는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 내밀었다.

“예전에 카사에게 받은 보물이야. 사용하면 널 도와줄 거야.”

“이런 걸 주셔도 돼요?”

소라가 괜찮다고 거절하려 했지만 라이샤는 그녀의 손에 구술을 꾹 쥐여주었다. 손톱보다 조금 큰 구슬은 따스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응, 어떤 방식으로든 소라가 잘 해결했으면 좋겠어.”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이유가 뭔가요?”

“난 도움을 받지 못했거든.”

라이샤가 서글프게 웃었다. 처음 보는 라이샤의 표정에 소라가 순간 말을 잃었다.

대리 만족이었다.

가족에게 버림받아 내쫓겼던 남매의 막내였던 라이샤는, 친가족이 아님에도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라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받지 못한 구원을 이 아이가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25. 브리온

[또다시 적발, 헌터 관리 본부의 운영비 정산 내역 공개.]

[법의 빈틈을 노린 헌터들의 페이퍼 컴퍼니 대거 적발, 그 뒷배엔 관리 본부의 언질이 있었다.]

[출입 금지의 던전을 공략한 A급 헌터 서진희. PD와의 관계는?]

[시작된 금강과 브리온의 영입 전쟁. 승자는 누구인가.]

[방위대의 무능, 그 이유와 관리 본부와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온갖 뉴스가 빗발치네.”

진희가 하품하며 포털 사이트의 뉴스를 훑어보았다.

“좀 소름 돋네요. 모두 우리와 연관된 뉴스라니.”

마찬가지로 뉴스를 읽어보던 PD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어엿한 기사단원이 된 그녀는 곧잘 보육원의 사무실로 출근하곤 했다.

“하지만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관리 본부가 심상치 않습니다. 대부분의 자금이 동결되었고, 로비하는 기업들도 손을 뗐습니다. 와중에 저희가 터뜨린 비리 정보에 간부 중 반이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었어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던 현성이 골치 아프다는 눈길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잘된 거 아니에요?”

“아닙니다. 한 명씩 터지면 자기들끼리 꼬리를 자를 테지만, 이렇게 대거 적발되면 그들끼리 뭉쳐서 대응할지도 몰라요.”

PD의 물음에 현성은 고개를 저었다. 해저 동굴을 다녀온 후 진희의 계획이 일부 수정되었다.

처음엔 관리 본부의 간부를 하나씩 잘라내고 정보를 모으려 했다면, 지금은 본부 전체를 공격하고 있었다.

“진희 씨의 계획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처음엔 그 계획대로 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좋은 기회가 생겼으니까, 한번 크게 던져보려고요.”

“기회요?”

진희가 손가락으로 창문 바깥을 가리켰다. 보육원의 공원에서 정상진이 아이들과 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반 삭발된 머리와 히피 스타일의 외견과 달리 그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과 뛰어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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