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18화
세계 최강의 기사를 죽이는 독. 온갖 전쟁에서 당당히 승리한 기사마저도 아군이 탄 독에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독이 너무나 강력한 독인 탓인지, 아니면 바제트가 죽음을 받아들여 해독할 생각 없이 독을 마신 탓인지, 아무도 몰랐다.
케네스와 함께 바제트를 뚫어져라보고 있던 현성만이, 바제트의 얼굴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녀는 그녀의 동생과, 당신을 번갈아 보며 말했습니다.”
미안하다.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동생을 끝까지 이해해 주지 못한 누나의 사과이자,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죽게 된 기사의 의례적인 인사였다.
바제트는 그 말을 끝으로 바닥에 쓰러졌다. 표정은 연회장에 들어설 때보다 평온했고, 고통 탓인지 눈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가장 우스운 게 뭔지 아십니까. 바제트가 쓰러지고 나서, 연회장의 누구도 놀라지 않았단 점입니다.”
피를 한 움큼 뱉고 쓰러졌음에도,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의사를 불러오라고 소리치는 사람도 없었고, 황태자에게 해결해 달라 읍소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창문의 커튼을 닫고, 바깥에서 경비를 보고 있던 기사가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굳게 잠갔다.
계획된 살인, 배신이었던 것이다.
바제트의 흐려지는 기억 속에서 현성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슬프지만 기쁜 듯, 아프지만 행복한 듯 웃는 한 남성의 모습과,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바제트의 최후를 지켜보는 황태자의 모습을.
한참을 그녀의 시신을 바라보던 황태자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카펫이 더러워졌다. 말아서 버리면 되겠군. 하고.”
“…….”
끔찍한 말이었다. 서한은 말없이 들고 있던 맥주캔을 구겼다.
“……한 캔 더?”
“주십시오.”
서한에게서 새로운 맥주를 받은 현성이 뚜껑을 땄다.
“물론 당신과 황태자가 다른 사람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바제트와 진희도 분위기부터 다른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냥 넘길 수 없는 최후였다.
수많은 사람의 무표정 속에서 죽어간 바제트, 진희의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서한의 얼굴은 더욱 충격이었다.
분명 서한과 케네스는 외모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분위기, 태도, 말투, 모든 게 서한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사실 전, 진희 씨가 당신과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다. 믿었던 주군에게 배신당하고, 자신의 능력에 발끝도 쫓아오지 못하는 무능한 귀족들 사이에서 구경거리로 몰락하며, 전장도 아닌 파티장에서 독주를 마시고 죽어갔다.
아무리 케네스와 서한이 다르다고 해도, 같은 외모를 가진 그를 웃으며 볼 수 있는 진희를 보자니 짜증이 일었다.
밉지도 않습니까. 거북하지 않습니까. 그 최후를 겪었음에도 다시 기사를 할 생각입니까. 당신이 때때로 향수에 젖어 있는 건 무엇 때문입니까.
‘저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이서한과는 다릅니다.’
어쩌면 그 두 마디가 현성이 줄곧 진희에게 말하고 싶었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서한은 말없이 두 번째 맥주를 마저 마셨다.
“그래서 넌 내가 진희에게 다가가는 게 불쾌했던 거군.”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나는 서진희를 배신하지 않아.”
“맹세할 수 있습니까?”
현성이 똑바로 서한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짊어진 게 많습니다. 금강, 가족, 당신의 부하들. 당신이 진희 씨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건 알고 있지만, 전 그게 당신의 어깨 위의 짐보다 무겁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현성은 말을 덧붙였다.
“전 다릅니다. 그녀를 위해 제 짐을 기꺼이 벗을 수 있습니다.”
방위대, 정의, 그 무엇도 진희보다 중요하진 않다.
지금껏 진희를 보며 느껴지는 감정의 정체를 정리할 수 없었다. 그녀를 동경하고 있고,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긴 했지만,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단언하진 않았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너무 많은 것을 잃어오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과분한 감정이었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납치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독주를 마시고 쓰러져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전 그녀를 지키고 싶습니다.”
다시는 그런 모진 경험을 하지 않도록 곁에 있고 싶다.
연인이나 결혼 같은 구체적인 관계가 아니어도 좋다. 현성은 진희가 행복하길, 그리고 그녀의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고 있었다.
“당신은 그럴 수 있습니까? 당신의 금강이 그녀의 적이 되더라도, 당신은 그녀의 편에 서 줄 건가요?”
“나는…….”
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서한답지 않게 말의 끝을 맺지 못했다.
차마 저울에 매달 수 없는 문제였다. 진희가 그의 인생의 반환점이라면, 그의 인생의 시작은 금강이었다. 금강을 물려받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나타난 진희란 존재는 가릴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무시할 수도 없었으나, 인정할 정도로 그의 짐이 가벼운 것도 아니었다.
서한이 결국 대답을 하지 못하자 현성은 한참을 서한의 눈을 바라보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저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당신도 그럴 것이라 믿지만.”
끝까지 케네스와는 다른 길을 걷겠다고 말하진 않는군요.
현성은 뒷말을 삼켰다. 그러나 서한은 현성의 본심이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비수와도 같이 꽂힌 그 말은, 땀을 식힌 맥주가 무색하게 속을 뜨겁게 헤집어 놓았다.
* * *
“뭐 하세요?”
“……기다려.”
소라는 강당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는 라이샤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간은 아침 식사 직후였다. 정해진 시간만 수련하라는 진희의 명령이 있었기에, 소라는 수련을 하지 못해 좀이 쑤신 몸을 몰래 풀기 위해 강당에 나온 참이었다.
“뭘 기다려요?”
“오후에 대련한다고 해서.”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오후에 라이샤가 진희를 대신하여 아이들의 대련 상대가 되어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전이고, 대련 시간까진 아직 반나절은 있어야 한다.
“왜 벌써 나왔어요?”
“……그냥.”
라이샤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렸고, 소라는 문득 라이샤가 최근 보육원에서 수련 말고 뭔가를 하는 걸 본 적이 없단 걸 떠올렸다.
그녀는 식사 시간과 수련 시간 이외엔 아이들에게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진희 언니는 이런 건 의외로 무심하니까.’
진희의 기사단 방침은 기본적으로 자유와 방임이다. 목표를 정해주거나 수련 시간을 제한하는 정도의 명령은 내리지만, 그 외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든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다.
그녀 나름의 배려였지만, 이런 자유로운 생활은 라이샤에겐 조금 버거운 생활이었던 것 같았다.
같은 이방인이라도 카온은 진희를 보좌하기 위해 직접 나서는 편이었지만, 라이샤는 많은 시간을 등대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보육원에서의 일상이란 별세계에서의 낯선 생활일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관심을 가진 건 음식 정도였다. 소라도 라이샤가 길게 말하는 걸 들은 건 식탁에서뿐이었다.
‘쫄면 먹으면서 입가가 붉어지는 백발의 외국인이라니.’
그 장면이 떠올라 소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샤는 식욕이 남달랐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소라는 라이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져, 헛기침하며 말했다.
“그럼 언니가 저 수련하는 것 좀 봐주실래요? 마력은 안 쓸 거지만, 몸 좀 풀고 싶거든요.”
“……언니?”
라이샤가 언니란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언니?”
“언니 아니에요?”
외국인이라 쉽게 판단할 수 없었지만, 라이샤의 분위기를 보고 당연히 성인이라고 생각했다. 소라가 미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몇 살이에요?”
“……스물셋?”
자신의 나이에 확신이 없던 라이샤가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했다. 언니 맞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 소라가 라이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시간 남으면 좀 도와주실래요?”
“응.”
라이샤는 묘하게 발갛게 달아오른 안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왠지 모르게 밝아진 라이샤를 보고 소라는 의아해했지만, 이내 수련을 위해 강당 중앙에 자리 잡았다.
소라의 수련은 진희와 현성이 알려준 체술을 나름대로 조합한 무술이었다. 진희의 의외성과 현성의 체계적인 체술을 본받은 그녀의 무술은 언뜻 보기엔 제법 틀이 갖춰져 있었다.
“어때요?”
상대가 없다 보니 자세를 하나하나 시범 보인 것뿐이었지만, 라이샤는 대충 소라의 실력을 짐작한 듯했다.
“훌륭해.”
무술에 대해 문외한인 라이샤가 보아도 소라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없었다.
“그런데 방어에 치중되어 있구나.”
“네, 애들 중에서 전위에서 방어를 해줄 사람이 없어서요.”
침착한 소라의 성격과도 잘 맞았다. 평상시엔 날카로운 면이 있는 소라였지만, 누구보다 침착하고 냉정하게 전투에 임하곤 했다.
“응, 어울려.”
다른 말로 표현하기엔 말솜씨가 부족했던 라이샤였지만, 그녀 나름대로 칭찬임을 눈치챈 소라가 밝은 안색으로 웃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긴 해.”
“어떤 점이요?”
“전진하지 않잖아.”
“전진이요?”
라이샤가 소라 앞으로 나섰다. 소라보다 반 뼘가량 큰 키의 라이샤가 앞에 서니 소라는 자연스럽게 올려다보는 모습이 되었다.
“안전하고 단단한 무술인 건 좋지만, 공격할 수 있을 땐 파고들 줄 알아야 돼. 하지만 네가 보여준 자세 중에서 전진하는 자세는 하나도 없었어.”
“……그렇죠.”
그건 이미 알고 있던 부분이었기에, 소라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현성의 무술은 공격과 방어가 완벽하지만, 진희의 무술은 공격이 대부분인 호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라는 진희의 무술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전투 방식은 다소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나쁜 건 아니야. 자신과 동급인 상대에겐 우위를 점할 수 있고, 아래의 실력자에겐 확실히 이길 수 있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하고 라이샤는 뒷말을 흐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한 소라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보다 강한 사람에겐 어림도 없겠죠.”
“응.”
진희도 말한 적이 있었다.
소라의 방식은 자신과 비슷한 실력자에겐 60% 확률로 승리한다. 한 수 아래라면 100% 승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수 위라면 100% 패배할 것이라고, 진희는 냉정하게 말했었다.
“네가 틀렸다는 건 아니야. 오히려 추천하고 싶어. 근접전을 선호하는 기사일수록 생존력을 올려야 하니까. 그런 면에서 나는 부족하지.”
소라가 아, 하고 새삼 라이샤의 전투 스타일을 떠올렸다. 진희와 라이샤의 대련은 충격적일 정도로 난잡했다.
진희는 곧잘 아이들에게 자신의 대련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라이샤와의 대련은 지금껏 본 적이 없는 난투전이었다.
현성과는 아슬아슬한 기교를 보여주고, 서한에겐 힘과 패도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진희가 라이샤와 대련할 땐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달려들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