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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17화 (11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17화

진희는 한숨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 돈으로 의뢰를 받고 싶냐?”

“아니 근데, 내가 의뢰 성공률이 별로라서 들어오는 게 없었거든. 일단 입에 풀칠이라도 해보자 싶어서 받았지.”

“던전 가면 되잖아.”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요새 근방의 비허가 던전들은 싹 다 신입들이 점령해서 발도 못 디뎌. 싸우면 못 이기는 건 아닌데, 아무리 나라고 해도 수십 명이랑 밤새 싸울 순 없잖아?”

“……신입 비인증 헌터가 많다는 말씀입니까?”

“응, 맞아. 예전에 비해 B급이 다섯 배는 는 것 같더라?”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했다. 안 그래도 비인증 헌터의 증가 때문에 국가 차원에서 골머리를 앓던 와중인데, B급 이상의 헌터가 다섯 배까지 증식했다는 건 쉽게 듣고 넘길 수 없었다.

“그 신입들은 다 어디서 왔는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아, 어디 기업에서 푼 거 아니냔 소문은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애들이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잖아.”

합리적인 의심이었고, 실제로 근거가 있었다.

흐음, 하고 진희는 팔짱을 끼고 현성에게 물었다.

“쟤, 더 아는 게 있을까요?”

“……없을 것 같습니다. 신상도 검색해 봤는데 태생이 비인증 헌터예요. 이번 사태 이전부터 말썽이었습니다.”

상진은 실력은 A급이지만 신뢰도가 바닥인 용병이었다. 싸게 고용하긴 좋지만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헌터였다.

“그런데 누님, 진짜 한 번 더 싸워주면 안 돼? 어? 나 다리만 나으면 다시 찾아올게. 진짜 제대로 붙어보자.”

“너 나 못 이겨.”

“그건 알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보고 싶다니까! 난 무기도 못 들고 졌잖아, 설욕의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상진이 의뢰를 못 받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진은 현대에 드문 ‘전투광’ 헌터였다. 돈을 벌거나 명예를 얻는 것보다 강한 자와 싸우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

“차라리 죽일까.”

괜히 살려두면 보육원의 정보를 떠벌릴지도 몰랐다. 진희가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상진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럼 나 다리 나은 다음에! 싸워서 죽이지 않을래? 나 의자에 앉은 채로 죽으면 진짜 원통할 것 같아!”

“……별 멍청이를 다 보겠군요.”

방위대에서 온갖 헌터를 다 상대해 봤지만 이 정도로 독종인 사람은 처음 봤다.

현성이 드물게 욕설을 내뱉었다.

“차라리 아까 그 명함 준 사람을 잡을 걸 그랬나 봐요.”

“아- 걔도 마찬가지일걸. 이야기 나눠보니까 나랑 사정이 비슷하던데? 뭐, 거긴 신림의 하청 업체라는 게 좀 다른가.”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신림엔 온갖 하청을 받는 기업이 존재했다. 던전 아이템 분류부터 시작해서 몬스터 시체 갈무리까지, 별별 심부름센터가 융성한 곳이었다.

진희는 눈을 빛내고 자신을 바라보는 상진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상진을 통해 얻은 정보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납득할 정도의 수확은 아니었다.

가만 놔주자니 괜히 거슬리고, 죽이자니 거기까진 손이 안 간다. 그냥 풀어줘도 다시 찾아와서 승부해 달라고 보챌 것 같아 귀찮다.

괜한 애물단지를 얻었군, 하고 고민하던 중, 현성이 묘안을 꺼내 들었다.

“이용합시다.”

“이용이요?”

“어차피 저희는 얼굴이 알려져서 신림 시장 쪽 조사가 어려워요. 조사원을 구한다면 시장 주민이 더 안전하고, 효력 있겠죠.”

“하지만 이용할 녀석 상태가 ‘저런’ 수준인데요?”

“……뭐, 그건 차차 개선해 보면 됩니다.”

범법자 헌터들을 여럿 개심시켰던 현성이었다. 그는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말했고, 진희는 긴가 민가 하는 표정으로 상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밝고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야, 너 내 종 할래?”

“할게! 그러니까 다리 좀 낫고서 싸워줘!”

단 3초, A급 헌터의 인생이 결정 난 순간이었다.

24. 악몽을 본 그와 아무것도 모르는 그

현성과 서한이 같은 방에서 동숙을 하고 있다곤 하나, 서로 같이 취침에 들어간 경우는 별로 없었다. 서한은 대개 바깥에서 지내다가 일주일에 이틀쯤 들르는 수준이었고, 현성도 뛰어다닐 일이 많아 밤을 지새우는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둘의 퇴근이 정확히 겹친 날이 있었다.

마침 서한은 진희와 대련을 하고 온 중이라 피곤한 몰골이었고, 현성은 오래간만에 편히 쉬고 싶어 빨리 퇴근해 보육원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식사하셨습니까?”

먼저 현성이 의례적으로 물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진희와는 저녁 식사를 같이했지만 서한이 함께한 건 아니었다.

서한은 고개를 젓곤 오던 길에 산 편의점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대기업의 후계자에겐 어울리지 않는 편의점 음식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의외로 입이 싸.’

현성은 바닥에 앉아 맥주와 함께 햄버거 하나를 까는 서한의 모습을 보며 내심 생각했다.

맥주와 햄버거를 먹으면서도 제법 예절 있는 모습은 신기하긴 했지만, 금강이란 대기업 후계자의 밥상이라기엔 너무나 초라했다.

문득 현성은 저녁 조리를 한 은정이 서한을 위해 준비했지만, 그가 오지 않아 아쉬웠다던 요리가 생각났다.

“잠깐만요.”

“응?”

현성이 빠르게 식당에 다녀왔다. 랩에 싸인 음식은 서한이 보육원에서 곧잘 먹었던 샌드위치였다.

진희 일행이 없을 때 보육원을 지키던 그는 허기를 달랠 때 샌드위치를 단숨에 먹어치우곤 했다. 그 모습을 인상 깊게 봤던 은정이 메뉴에 포함해 봤던 것이다.

“웬 거야?”

“은정 선생님이 준비해 주셨어요.”

“……고맙다 해야겠네.”

서한이 피식 웃으며 샌드위치를 받아 들었다.

괜히 혼자 음식을 먹는 게 미안했는지, 그는 봉투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 현성에게 던졌다. 현성은 그걸 받아들고 말없이 캔 뚜껑을 땄다.

그리고 한 잔 마셨다.

“후우.”

그러고 보니 술을 마신 것도 제법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계속 긴장을 하며 근무를 한 탓에, 술을 마시며 쉬어 본 적이 없었다.

헌터라 알코올쯤이야 금방 분해가 되는 편이었지만, 그는 애당초 술을 좋아하는 편에 속했다.

“요즘은 덜 쪼는군.”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는 현성의 모습을 보며 서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미안합니다.”

해저 던전을 다녀온 이후, 한동안 현성은 서한에게 날이 선 태도를 보였다. 서한이 보기엔 그래봤자 말을 짤막하고 단호하게 하는 정도였지만, 평소에 예의를 중시하는 현성에겐 그마저도 제법 적의를 드러낸 셈이었다.

그렇게까지 서한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한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과몰입 때문이었다.

현성은 바제트의 최후를 목격하고 한동안 감정을 다스리기 힘들어했다. 일상에선 괜찮았지만 서한을 보고 있으면 때때로 짜증과 분노가 치솟곤 했다.

기억이 충돌되며 당시 바제트의 감정이 뒤섞인 것인지, 아니면 진희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현성의 분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뭘 봤는데?”

서한이 무덤덤한 어조로 질문했다. 해저 던전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대략 들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현성과 진희 사이에 기억이 섞였다는 것도 들었다.

하지만 진희는 현성의 기억에 대해선 조금의 언급도 없었다. 현성이 바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는 그녀다운 태도였다.

현성 또한 그래야만 했다. 진희와도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하지만…….

‘이서한에게만큼은.’

말하고 싶었다.

이서한이 이 이야기를 듣고 죄책감을 느꼈으면 하는 알량한 복수심인지. 아니면 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혼자 감당하기 버겁다는 나약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진희 씨의 전생, 바제트의 최후를 보았습니다.”

“……그래.”

현성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작 맥주 한 캔 마신 것뿐이지만, 마치 취한 것처럼 말의 빠르기는 제멋대로였다.

“그녀의 최후는 화려한 연회장에서 일어납니다. 누군가의 취임식인지, 낮은 손님들부터 차례대로 호명되며 잔을 높이 들죠. 건배를 하지만 마시지는 않고 한 모금씩 입에 담으며 환호합니다.”

어느 가문의 가주부터 황실의 관리, 장군, 기사 등등.

그 자리에서 두 번째로 지위가 높은 바제트는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호명된다.

“바제트를 부르는 호칭은…… ‘누더기의 기사’입니다.”

“…….”

이 잔인한 건배사는 호칭의 유례를 하나하나 읊어준다.

“전쟁에서 승전을 알린 바제트였지만, 오랜 원정을 지낸 탓에 그녀가 돌아올 때 제대로 된 장비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승리했지만, 몰골은 누더기를 쓴 거지와도 같았죠. 성문을 지나 가도를 달리는 앙상한 말과 그녀의 모습을 보고 ‘누더기의 기사’라고 부른 겁니다.”

“…….”

“그뿐만 아닙니다.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누더기는 그녀의 부관이자, 전사(戰死)한 기사가 입던 판초였습니다. 더러운 몸을 가릴 게 없었기에 부관의 옷을 빌려 입은 기사란 뜻이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나?”

“네, 모두가 웃으며 듣고 있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는 그 연회장에서 바제트만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쳐 보였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건배사를 외칠 때도 듣지 못한 듯 보였고, 연회장을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눈엔 생기가 없었다.

서한은 문득 과거 진희가 말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전생이라고 해도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에요. 당시의 전 착했거든요.’

‘제가 이끌던 병사 중 전사했던 사람의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이 전쟁은 다 당신 때문이니 내 아들 살려내란 비명을 듣기도 하고. 제 아래서 무훈을 세운 부관이 다시 최전방으로 배치되어, 제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적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차근차근 당했죠.’

진희라면 가만 당하고 있지 않았겠지. 파티장을 뒤엎어서라도 상황을 역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바제트는 그렇지 않았다. 진희는 말했다. 바제트와 자신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고.

만약 바제트가 그저 뛰어난 기사에 불과했다면, 정의감과 기사도가 넘치는 기사였다면, 이런 잔인하고 추잡한 정치질에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마지막 건배사가 울립니다. 바로…… 당신, 황태자 케네스입니다.”

케네스를 본 현성은 두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턱선과 목선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영락없는 서한이 왕좌에 앉아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왕좌에 앉은 서한, 케네스는 잔을 들었다.

“전쟁의 승리자, 기사의 주인, 제국의 별, 그리고…… 정의로운 성군.”

온갖 좋은 수식어를 다 붙여 황태자를 칭송했지만, 정작 케네스는 조금도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경직된 얼굴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었고, 그의 시선 끝자락엔 바제트가 있었다.

그는 바제트의 입, 그리고 잔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지막 건배사가 끝나면, 잔에 들어 있던 술을 모두 마시며 연회를 시작합니다. 케네스의 소개가 끝나자 사람들은 술잔을 높이 들었고…… 이윽고 바제트가 피를 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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