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16화
“됐어. 어차피 들킨 거 더 연기하기도 글렀어.”
“하, 하지만 분명 구청 허가를 받아서…….”
“받아서 뭐? 이곳 신림 바닥에서 구청이 뭐 힘을 쓴 게 있기나 해?”
헌터는 사내를 뒤로 물리고 앞으로 나섰다. 키는 진희와 비슷할 정도로, 성인 남성치곤 작은 키였다. 반만 삭발한 머리가 인상적인 그가 대뜸 손을 내밀었다.
“난 정상진이다. 고용됐고, 너희 엿 먹이고 오라고 해서 왔다.”
“…….”
이건 또 무슨 참신한 미친놈일까. 진희가 그런 생각을 담아 바라보자 정상진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 마.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받은 의뢰는 너희들 전력을 확인해 보란 거였거든.”
“그걸 누가 믿어?”
“쟤 봐, 식은땀 흘리는 거 안 보여?”
헌터 곁에 있던 사내가 ‘그걸 말하면 어떻게 해’ 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상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습고 허접한 작전이라길래 이게 통하나 싶었는데, 뭐 대문 앞에서 들통났으니 어쩌겠어? 직접 말하고 들어가는 게 더 편하지.”
“너 어디 소속인데?”
진희가 정상진의 손을 맞잡았다.
‘전사네.’
진희는 그 순간 정상진의 포지션을 직감했다. 큰 무기를 사용하는 전사인지, 손목과 팔뚝 부근에 근육이 집중된 게 보였다. 반대로 손가락보다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강력하다.
대검이나 거창을 쓰는 기사들의 근육과 유사했다.
“무소속. 난 비인증 헌터거든.”
“……아하.”
비인증 헌터라, 진희의 눈이 잠깐 번들거렸다. 안 그래도 비인증 헌터들의 상황에 대해 조사하는 참인데, 먹이가 절로 굴러들어온 셈이다.
“그래서 말인데, 싸움 좀 해주면 안 될까? 네가 여기 짱이지? 딱 봐도 그래. 여기에 거주하는 헌터들 수준을 살펴가기만 하면 보수가 두둑하거든. 너랑 싸워보면 대충 수준을 짐작할 수 있지 않겠어?”
“너 진짜 솔직하구나.”
정상진의 말투에 곁에 있던 B급들마저도 넌더리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뢰주가 누군지 몰라도 용병을 잘못 구한 게 아닐까 생각될 지경이다.
“근데 내가 왜 너랑 싸워줘야 하는데?”
“안 싸우면 대문부터 박살 내고 들어갈 건데? 내가 힘엔 자신 있거든.”
부탁하고 있지만 결국 싸워주지 않으면 깽판을 치겠단 말이었다. 제법 웃긴 녀석이네, 진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정상진과 악수하던 손을 풀었다.
“그러다 내가 이기면?”
“그냥 이기는 거지. 나도 의뢰주한테 나보다 강한 헌터가 있다고 말하겠지.”
“뭘 착각하나 본데.”
진희가 일그러진 웃음을 띠며 말했다.
“내가 이기면, 넌 죽는 거야. 뒤는 없어. 의뢰 보상도 뭣도 없이 끝난다고. 알아?”
적의 대장에게 승부를 제안한 장수의 운명은 승리 혹은 죽음뿐이다. 진희의 말에 정상진은 잠깐 눈을 크게 뜨다, 이내 쾌활하게 웃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내가 이래 보여도 진 적이 드물거든.”
“배짱 좋고.”
정상진이 다시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보다 진희의 주먹이 날아가는 게 더 빨랐다. 단숨에 자신의 미간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느긋하게 피한 정상진이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기습 좋고, 좋아, 싸울 마음이 들었다면 지금…….”
“뭐래, 끝났어.”
빠악-!
“헉!”
진희가 정상진의 다리를 후려갈겼다. 주먹을 피하느라 하체에 신경을 쓰지 못한 그는 진희의 공격에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다리가 부러졌는지, 관절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다.
“아, 아악!”
“자, 그럼 들을 게 많으니까.”
진희는 정상진의 목을 붙잡았다. 그가 계속해서 발버둥 치려 했지만, 이미 마력을 해방한 진희의 힘엔 속수무책이었다.
곁에 있던 B급 헌터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름 실력 있는 A급 헌터가 단숨에 무력화된 것도 모자라, 그들로선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강력한 마력이 주위를 에워쌌기 때문이다.
“볼일 있어?”
“어, 어어.”
그중 일반인이었던 자는 지금 당장에라도 혼절할 것 같은 안색이었다.
구청, 의뢰, 검열이란 단어를 몇 번 중얼거리던 그가 쓰러지려 하자, 결국 B급 헌터들이 그를 업고 도망쳤다.
굳이 그 뒤를 잡으려 하지 않은 진희는, 아직도 컥컥거리는 정상진을 질질 끌고 보육원 안으로 돌아갔다.
“이, 이것 놔- 악!”
“정보가 넝쿨째 걸려 들어오다니, 오늘은 운수도 좋네.”
정상진의 비명을 뒤로하고, 진희가 아이들 모르게 그를 강당 구석으로 끌고 갔다.
* * *
“한 방 먹었군요.”
부단장은 쓰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온갖 연구자재가 널브러진 이곳은, 서울 교외의 알려지지 않은 던전 내부였다.
“누군가 우리 꼬리를 잡았습니다.”
이곳은 부단장이 머물던 은신처 중 하나였다. 널브러진 용품들은 모두 부단장이 사용하던 것들이었지만, 지금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박살 나 있었다.
부단장이 기록했던 일지나, 단체의 흔적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저희를 미행했던 걸까요?”
안타깝다는 눈치로 주변을 둘러보던 마야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최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해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눈치였다.
“그럴 리 없어. 그들에겐 우리의 이동수단을 눈치챌 수단이 없으니까.”
부단장과 같이 던전을 수색하고 있던 한 사내가 단호하게 마야의 말을 부정했다.
“그럼 마노 선배는 어떻게 적들이 여길 찾았다고 생각하시는데요?”
“얻어걸린 거지.”
“……그게 말이 돼요?”
“돼. 그들은 최근 이런 식의 은신처가 될 수 있는 던전을 모조리 뒤지고 있거든.”
마노 선배라 불린 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부단장에게 말했다.
“재수가 없었습니다. 차라리 외출할 땐 게이트를 닫아버릴 걸 그랬군요.”
“그럼 마야에게 가는 부담이 너무 커요. 마노 말대로 그냥 재수가 없었다 칩시다. 물론 꼬리가 잡힌 건 문제입니다만.”
마야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기사단이란 녀석들일까요? 우릴 엄청 벼르고 있을 텐데.”
기사단의 단장, 서진희라면 치를 떠는 마야가 몸을 떨자 부단장이 걱정 말라는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마 아닐 거예요. 그들이라면 이렇게 도둑질을 하기보단, 기다려서 저흴 습격할 기회를 노렸을 겁니다. 혹은 함정을 설치하든가요.”
“……걔들 기사 맞습니까?”
마노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부단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을 피했다.
“이 도둑질은 저흴 찾으려는 사람들의 소행이 아니라, 저희의 연구 결과를 훔치려는 자들의 소행이에요. 가져간 자료들도 딱 그런 것들뿐이군요.”
“그런 것들이라뇨?”
“제 능력에 대한 고찰들입니다.”
헉, 마야와 마노가 동시에 숨을 들이마셨다. 부단장의 능력이라 하면, 영혼을 찢어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는 부단장만의 이능력을 뜻했다.
“설마 부단장님의 능력을 연구한다거나…….”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당대 최고의 현자들마저도 고개를 젓던 능력이에요. 현대의 과학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걸 복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하고 부단장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참고할 순 있겠죠.”
“……SC 프로젝트군요.”
마노가 부단장의 말뜻을 단번에 이해했다.
“영혼 결합이 가능한 주민들을 포획했다니, 브리온도 제법 수를 잘 쓰네요. 아마 그들을 이용해 영혼을 이용하는 마법이나 과학을 개발하려 할 겁니다.”
“끔찍하군요. 이게 인간의 손에 들어간다면, 대재앙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요, 저도 이런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부단장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요. 이 프로젝트가 획기적인 건 맞지만, 그래도 이렇게 단기간에 성공할 프로젝트는 아니었어요. 영혼에 대한 접근은 적어도 10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브리온에서 뭔 일이 일어난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부단장이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마야는 여전히 무슨 대화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마노는 부단장을 따라 고심했다.
“고작해야 영혼 추출에 대한 감을 잡은 정도라 생각했는데, 최근 3년 간 너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어요. 벌써 영혼을 분해하고 조합하는 데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부단장은 현재 헌터 시장에 대해서 제법 파악한 상태였다. SC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범람하게 된 비인증 헌터를 보며, 부단장은 묘한 괴리감에 빠졌다.
“그러고 보면 최근 영혼을 다루는 던전들이 대부분 공략당했죠.”
“맞아요. 타이밍이 공교로워요. 딱 3년 전을 기점으로 갑자기 늘어났거든요. 영혼이나 성벽에 대한 던전은 공략 난이도가 매우 높은 편인데,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던전이 공략당한 상태니까요.”
꼭 누군가가 영혼 기술과 연관된 던전을 콕 집어서 브리온에게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던전을 모두 파악하는 건, 게이트와 헤르메스의 총서가 있는 마야를 제외하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같은 총서가 아니라면 말이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부단장이 문득 괴짜 니케에 대해 떠올렸다.
삼라만상의 총서를 가진 니케라면 던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괴짜가 왜?’
변덕으로 하기엔 스케일이 너무 컸다. 영혼 기술은 현대의 인간이 가지기엔 과분한 기술이었다.
인간의 재능을 재조합하고 운명을 뒤바꾸는 이 기술의 위험성을 니케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오히려 괴짜라서 그럴지도 모르려나.’
변덕쟁이인 니케가 일을 벌인 거라면, 부단장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었다.
“……우선 마노, 제 자료를 훔쳐 달아난 게 누구인지 알아봐 주세요. 아마 브리온일 것 같긴 한데, 확실하게 살펴보긴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마야.”
“네, 네!”
“레인 군에게 문을 열어주세요. 레인 군이 필요해요.”
한동안 요양을 시킬 셈이었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부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야가 연 게이트 안으로 걸어갔다.
* * *
“그러니까 너도 의뢰주를 모른다고?”
“에이, 알겠어? 난 현금만 받는 데다가 보통 부자란 것들은 부하들을 시키잖아.”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참 쾌활하게 말한다. 곁에서 심문을 도와주던 현성이 조금 질린 얼굴로 상진을 바라보았다.
진희에게 제압당한 상진은 강당에 끌려와, 의자에 손발이 묶인 채로 감금당했다.
마력을 사용하면 밧줄을 푸는 건 일도 아니겠지만, 그 경우엔 ‘다음엔 다리가 아니라 팔을 부러뜨릴 거야’ 하고 말한 탓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근데 누님 진짜 세다. 와, 유무브로 봤을 땐 A급이겠거니 했는데 수준이 다르네. 왜 여기서 사는 거 유무브에 공개 안 했어? 공개하면 하루 만에 여기서 팬미팅도 하겠는데! 유무브에서 누님이 얼마나 인기 있는 줄 알아?”
“시끄럽고, 너 의뢰로 약속받은 보상이 얼만데?”
“이천만 원인데!”
“…….”
이천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A급이 흔들릴 정도의 큰 액수는 결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