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15화
“상태 좋아.”
“진짜요?”
오후, 강당에서 이선을 마주한 진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선의 체내의 마나홀이 제법 커진 게 느껴졌다.
“아직 B급 수준은 아니고.”
“……네.”
시무룩해지는 이선을 보고 작게 웃은 진희가 강당의 의자를 빼 앉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경과가 좋아. 마나홀은 어느 기점을 넘어서면 확 커지니까, 그때까지 잘 버텨봐야지.”
“그게 언제쯤일까요?”
“글쎄, 네 몸이 폭발을 견딜 수 있을 때?”
“……네?”
폭발이란 파격적인 단어에 이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나홀은 고무줄처럼 그 크기가 조절되는데, 사람마다 고무줄 크기가 다르거든. 일정 크기 이상이 되면 터져버려. 마나홀이 터지면 마력 회로도 같이 찢어지고, 일반인이라면 단숨에 죽어버리겠지.”
“……버틸 방법은요?”
왜 이런 사실을 먼저 알려주지 않았냐고 화내는 게 아니라 해결법부터 묻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진희가 손가락을 치켜들며 말했다.
“회로 단련이야. 내가 알려준 호흡법은 회로와 마나홀을 단단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거든.”
마나홀은 한계를 돌파할 때 순식간에 부피를 부풀린다. 그 순간만 넘어서면 마력 수준을 두세 계단 훌쩍 넘는 것도 가능했다.
단지 그 확률이 희박하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다.
“보통 열에 여덟, 아홉은 이때 죽어. 하지만 회로를 단단하게 단련해둔다면 생존율이 올라가.”
“어느 정도요?”
“음, 여덟 명 죽을 때 일곱 명으로 준 정도?”
많이 낮춘다곤 할 수 없는 통계였다. 이선의 얼굴이 계속해서 어두워지려 하자, 진희가 치켜들었던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있으면 달라.”
“네?”
“내 마력은 남의 신체에 침입하는 데 저항이 없거든.”
진희의 황금빛 마력은 무상성의 위력을 자랑한다. 타인의 신체에 불어넣어도 저항을 받지 않고, 마법을 파훼하는 데도 큰 위력을 보여주는 특별한 마력이었다.
“네 마나홀이 폭주하려 할 때, 내가 컨트롤해 줄게. 터지지 않도록 하면 가능성이 있어.”
“나, 남의 몸에 마력을 집어넣는다고요?”
“괜찮아. 많이 해본 일이거든.”
다른 사람의 마력 회로를 망치거나 회복을 도울 때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다른 헌터라면 상상도 못 할 위험한 일이었지만, 진희는 숨 쉬듯 자주 했던 비법이기에 부담이 없었다.
“아무튼 문제는 네 몸 상태야. 내가 터지지 않게 조절해줄 순 있지만, 고통과 마나홀의 크기는 내가 재단해 줄 수 없어. 오로지 너에게 달린 일이야.”
큰 고통을 감수하고 마나홀을 늘렸는데, 그 성과가 적다면 그만큼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게다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이라도 하는 날엔 제아무리 진희라도 살려줄 방법이 없었다.
“알겠어요.”
방향성이 확실히 잡히면 수련하는데도 큰 힘이 된다. 이선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단장님.”
“응?”
호칭을 아예 단장으로 바꾼 이선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 브리온의 쌍둥이 말인데요.”
“클로이?”
“네, 그분…… 그분도 기사단원인가요?”
“아니야.”
“그, 그래요.”
진희가 딱 잘라 말하자 이선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만났을 때 독설을 내뱉는 걸 듣고, 클로이가 기사단원이어서 수준 떨어지는 수습이 들어온 걸 마땅치 않아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듣자 하니 클로이는 진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 같았다.
“걔가 뭐라고 한들 신경 쓰지 마.”
“아, 네.”
“난 내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이선과 만난 기간이 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단원이란 건 변치 않았다. 클로이가 아무리 큰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자신을 ‘바제트’라고 부르는 그녀를 받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처음 만날 땐 진희였는데, 지금은 바제트라.’
클로이의 마음속에 진희는 곧 바제트이고, 겉모습은 가짜라고 생각한 탓에 나온 호칭이겠지.
‘마음에 안 들어.’
진희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수련 계속해. 일주일 후에 경과 한 번 더 볼게.”
“아, 네!”
“그리고 수련 끝날 때마다 애들하고도 대련 좀 해줘. 걔들도 곧 벽을 넘을 것 같으니까.”
“네.”
이미 아이들의 월등한 재능이 보여서 가만있으면 금방 따라잡힐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이선이 쓰게 웃었다.
* * *
“어머, 점심은 안 도와주셔도 되는데.”
“괜찮습니다.”
카온은 진희가 이선과 수련하는 걸 보고 주방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굳이 참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주방엔 은정과 조리 보조 직원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카온은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껴서 조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깍둑썰기 할까요?”
“네. 애들이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해주세요.”
카온은 지금껏 건조식품을 불리거나, 큼지막한 고기를 시즈닝해 화로에 굽는 수준의 요리 말곤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식당 일을 도와준 덕에 지금은 제법 능숙한 솜씨로 요리를 하곤 했다.
“여전히 칼질은 정말 잘하네요.”
“감사합니다.”
카온의 정갈한 칼질을 보고 은정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구에 비해 작은 식칼이었지만, 작은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재료를 손질하는 모습은 언제나 신기할 따름이다.
“오늘 메뉴는…….”
“순두부찌개랑 소시지볶음이에요. 소시지는 모두 어슷하게 썰어주시고, 야채는 아까처럼 깍둑썰기 하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카온에게 맡기면 30분 걸릴 전처리 작업이 10분 만에 끝난다. 올 필요는 없다지만 도와주면 일이 빨리 끝나는 건 맞기에, 은정이 고맙다며 카온의 등을 두드렸다.
“오늘 순두부는 고추기름 없이 할 거예요. 맛 내는 건 육수랑, 들깻가루로만. 들깨 순두부찌개예요.”
“매운 건 따로 안 해도 됩니까?”
“저도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진희 씨가 점심엔 하지 말아 달라 해서요.”
“네?”
카온이 기억하기에 진희가 주방 일에 관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카온이 의아한 얼굴로 은정을 바라보자, 그녀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점심엔 다들 나가서 어른이 적잖아요. 애들 먹을 것과 어른 먹을 음식을 굳이 따로 나누지 말고, 애들이 먹을 수 있는 걸로 통일해 달라고 하셨어요. 손이 많이 가니까.”
보육원의 특성상 매운 것을 못 먹는 어린애들과 자극적인 걸 좋아하는 중고등학생이 섞여 있어, 음식을 할 때 두 가지 맛으로 조리하곤 한다.
불고기를 한다면 간장 불고기와 고추장 불고기 둘을 준비하는 셈이다.
아침과 저녁은 식사를 하는 어른이 많기에 두 가지를 준비했지만, 점심엔 다들 나가고 어린아이들만 있어 진희가 메뉴를 통일하자 제안한 것이다.
“……매운 걸 좋아하실 텐데.”
진희는 자극적인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진희의 입맛을 잘 알던 카온이 새삼스럽다는 듯 중얼거리자, 은정이 냄비에 물을 올리며 대답했다.
“카온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진희 씨가 배려해 주는 게 많아요.”
주방뿐 아니라 보육원 곳곳에 진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좀 더 편한 환경에서 살 수 있도록, 눈치 안 보고 수련이나 공부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장’이었다.
“……꼭 얼마 안 있어 나갈 사람처럼, 당신이 없어도 문제없도록 도와주더라고요.”
은정이 쓴웃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
카온은 은정의 혼잣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이제 기사단이 슬슬 보육원에서 나가야 함을 알고 있었다.
보육원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제대로 된 헌터 파티로서 기동하기 위해선 제대로 된 숙소가 필요했다.
보육원은 훈련 시설, 숙소, 주변 입지,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단과 같이 지내는 게 아이들의 안전에 도움이 될지는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오히려 보육원의 성장에 걸림돌이 될 게 뻔했다.
“식사 나가죠.”
이윽고 요리가 완성되었다. 카온이 배식대에 음식을 올린 채로 밀고 나갔다.
“어, 밥이야?”
그때, 방에서 일하고 있던 서한이 나왔다. 카온은 그를 슬쩍 흘겨보곤 배식대를 식당으로 옮겼다.
“10분 후에 오십시오. 애들 배식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그래.”
서한이 하품하며 강당으로 향했다.
“아, 지금 강당에는…….”
진희가 아직 수련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찰나, 보육원 대문을 누군가가 크게 두드렸다.
쾅쾅, 보육원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들릴 큰 소리가 울렸다.
“전국 사회복지법인 시민인권연대에서 나왔습니다!”
긴 단어를 숨도 한 번 참지 않고 말한 사내의 목소리에 서한이 혀를 찼다.
“다시 왔군.”
오늘 하루쯤은 쉬면서 수련이나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아, 원장님이신가요?”
“아뇨, 후원자예요.”
“그렇군요.”
시민연대에서 나왔다는 사내는 다시 한번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진희에게 명함을 건넸다. 진희는 마주 웃으며 명함을 받아 들었다.
서한이 말했던 그 집단이었다.
‘이번엔 보디가드도 튼실한 것 같네.’
특이했다. 기업에서 보낸 시민연대의 탈을 쓴 끄나풀이란 건 예상하고 있었지만, 보디가드의 수준이 비상한 건 예상외였다.
‘A급 한 명에 B급이 둘이라.’
보디가드라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만약 이곳에 기사단 수습만 남아 있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준이었다.
B급은 PD 수준, A급은 유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어디 기업에서 왔어요?”
“네?”
“아니면 관리 본부?”
“그, 그게 무슨…….”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기울이자 진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다 알면서 이러지 말아요. 헌터가 헌터 수준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요? A급을 데려와 놓고 시민연대라고 우기면 납득할 거라 생각해요?”
“…….”
“특히 당신, 아까부터 마력 쓰려고 꿈틀거리는데 적당히 해. 한 번 더 하면 주머니 속에 손모가지 날아가는 수가 있어.”
말하던 도중 진희가 사내 뒤의 헌터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A급 헌터가 전투에 목이 말랐는지, 연신 진희와 뒤편의 보육원을 보며 마력을 사용하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여차하면 진희의 목을 향해 손을 뻗을 것 같은 음산한 살기였다.
그의 수준에선 진희의 마력이 짐작이 안 갈 테니, 일반인으로 예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말이 세네.”
“주먹도 세. 처맞고 마력 줄일래, 아님 맞고 줄일래?”
“하하, 내가 물러나지.”
헌터가 미련 없이 마력을 물렸다. 명함을 준 사내는 헌터가 한발 물러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