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14화
“아, 안녕하세요.”
이선이 클로이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상기된 표정으로 클로이를 살펴보았다. 연예인처럼 유명한 브리온의 쌍둥이 헌터인 그녀가 신기했기 때문이다.
“으음.”
클로이도 이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동경과 호기심이 담긴 이선의 시선과 달리 클로이는 무감각하고 건조한 눈빛이었다.
“부족하네요.”
“네?”
이선의 정보는 이미 파악해 둔 참이었다. 진희가 PD의 방송에서 거하게 일을 터뜨린 후, 그녀의 발자취는 브리온에도 낱낱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연신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중얼거렸다.
‘장래성도 낮아, 외모는 괜찮지만 우아함이 없어, 능력이 부족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야.’
여러모로 불합격이다. 클로이는 혀를 차며 이선에게 다가갔다.
땀에 젖은 이선의 앞머리를 대신 정리해 주며, 웃는 얼굴을 지은 클로이가 말했다.
“적당히 하세요.”
“네, 네?”
클로이가 다가오자 당황했던 이선이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클로이는 그녀의 앞머리와 볼을 잡고 놔주지 않았다.
“남의 발 붙잡지 말고.”
그리고 서슴없는 비난을 내뱉었다.
자, 됐다. 하고 이선의 앞머리를 모두 정리한 클로이가 이선을 지나쳐 보육원 바깥으로 나갔다.
비현실적인 미인이 자신의 앞머리를 정리해 준다는 사실에 놀란 이선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헉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뜬금없이 들은 욕에 이선은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멀어지는 클로이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23. 재정비
진희 일행이 보육원에 돌아오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원정을 끝낸 기사단을 맞이하는 것처럼, 보육원 아이들은 어디서 만든 건지 모를 화려한 현수막을 들고 일행을 반겼다.
기사단원을 집합시킨 진희는 현재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물론 그전에 서한이 그간 모아뒀던 정보와 서혁에게 보고 받은 자료를 포함해 모두 정리했다.
SC 프로젝트라는 정체불명의 영혼 실험, 헌터 시장의 혼란과 비인증 헌터의 범람, 브리온 기업, 클로이의 부탁, 서혁이 언론에 흘린 정보로 인한 관리 본부 간부들의 연이은 사퇴 소식, 진희가 없던 사이에 보육원을 노리던 정체불명의 단체,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진희는 단원들에게 각자 해야 할 일을 명령했다.
서한은 비인증 헌터들을 잡아들여 실험의 정체와 브리온 기업의 비밀을 알아내라 했고, 현성은 서혁과 같이 관리 본부의 물갈이를 빠르게 진행할 것을, PD에겐 채널을 이용한 방위대 홍보를 명령했다.
“그리고 한동안 재정비를 할 거예요.”
또한 이번 일이 해결되기 전까진 던전 원정이 없다고 선언했다.
“PD의 동료 장례가 끝나면 A급 이상의 헌터는 던전 공략을 잠시 금지합니다. 한 명의 인원 공백도 아까운 시점이니까요.”
기사단 중 실력자들이야 자신의 몸 정도는 지킬 수 있겠지만, 아직 수습인 단원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기사단을 노린다면 가장 먼저 공격할 이들이 삼인방과 이선이었다.
이번 일을 일단락시킨 후에 움직이는 게 바람직했다.
대신 수련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카온과 라이샤, 이선과 삼인방이 그 대상이었다.
“관리 본부가 무력화되고, 저 없는 사이에 보육원에 들어오려 한 녀석들의 정체를 밝힌 후에 브리온의 연구소를 습격합니다. 그전까지 최대한 실력을 키워놓도록 하세요. 이상.”
진희가 회의의 끝을 알리며 손뼉을 쳤다. PD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한 던전 공략이었지만, PD 말고도 더 많은 걸 얻게 된 셈이다.
“아, 민혁아. 이거 들고 유나한테 가서 분석 좀 해달라고 해줘.”
“……제가 가나요?”
“네가 갑니다.”
“……네.”
민혁이 그답지 않게 싫은 표정을 지으며 진희에게서 종이상자를 받아들었다. 상자 안엔 현성의 목에 기생했던 추출기, 수정이 담겨 있었다.
진희가 보기엔 신비로운 색의 수정일 뿐이지만, 뛰어난 마법사이며 (자칭) 천재인 유나라면 의미 있는 분석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현성 씨도 슬슬 돌아가야죠.”
라이샤는 카온이 데려갔고, PD는 동료의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돌아갔으며, 이선은 저녁 훈련을 위해 강당으로 향했다. 방엔 진희와 소라, 현성과 서한만이 남았다.
소라가 던전은 어땠냐는 질문을 연신 퍼붓길래 화제를 바꾸려 현성에게 언제 돌아가느냐 물었는데, 현성은 묘하게 각오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곳에 남겠습니다.”
“네?”
“뭐?”
서한과 진희가 동시에 되물었다.
“방위대 일이 없어진 지금 굳이 방위대 근처에서 지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업무도 대부분 기사단 일인데, 차라리 이곳에서 지내는 게 좋겠습니다.”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작은 방 남는 것 있죠? 누울 수만 있다면 상관없습니다. 바로 짐 들고 오죠.”
“누구 마음대로.”
서한이 현성의 말을 자르며 앞으로 나섰다.
“얼굴도 알려진 네가 이곳에서 거주하면 시선이 몰려. 불편하더라도 그곳에서 지내는 게…….”
“어차피 이곳에 대한 정보는 알 사람은 다 압니다. 당신 포함해서 브리온, 정부 기관 모두가요. 저 하나 옮긴다고 큰 문제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라도 더 조심해야 해.”
“당신이 툭하면 이곳에서 지내는 거 생각하면, 저 하나쯤은 상관없을 텐데요.”
“뭐?”
서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현성이 서한의 의견을 반박하는 건 곧잘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날카로웠다.
물론 서한이 현성보다 보육원에 더 오래, 자주 머물렀던 건 사실이다. 진희도 서한에게 쉽게 방을 내주기도 했고, 이미 방 하나는 반쯤 서한의 전용실이 된 지 오래다.
아이들이 적지만 숙소 규모 자체는 제법 컸기에 남는 방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제가 오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
서한은 현성을 노려봤고, 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한을 마주 보았다. 미묘하지만 날이 선 대치에 소라가 혀를 찼다.
“떡 줄 사람 생각도 안 하는데 자기들끼리…….”
“…….”
공연히 들으라고 한 말이었다.
“자, 다들 적당히 하세요.”
진희가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저를 너- 무 좋아해서 옆자리를 뺏기고 싶지 않다, 그 말이죠?”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어쩔 수 없죠, 제가 매력적인 건 사실이니까.”
“…….”
서한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진희를 바라보았고, 현성 또한 경직된 표정이 무너졌다.
“응? 아니에요?”
“아뇨, 그게…….”
“좋아서 그런 거 아녜요?”
“……마, 맞긴 합니다.”
진희의 질문에 현성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인정하자니 기분이 묘하고, 부정하자니 틀린 말은 아니라 거짓말할 수 없었다.
“그럼 현성 씨 입장도 이해되네요.”
자신을 좋아하냐 물으면서도 상대가 부끄럽지 않게 만드는 게 진희의 기묘한 화법이었다.
진희는 흠흠,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결법이 하나 있어요.”
“해결?”
“네.”
진희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현성과 서한을 동시에 가리켰다.
“둘이 같은 방 쓰면 돼요.”
“…….”
충격적인 해결법이었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그렇게 둘의 기묘한 동숙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현성은 입에 칫솔을 물고 화장실에 들어온 서한을 바라보았다.
씻을 생각이었는지 어깨에 수건을 메고 있던 서한은 현성을 발견하고 눈을 끔벅하다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어? 서한 아저씨다.”
“안녕~”
“아침밥 먹으러 가요!”
이미 세안이 끝난 아이들이 복도를 달려가다 서한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서한은 의례적으로 손을 마주 흔들었다. 아직 씻질 못하였기에 식당에 갈 순 없었다.
“……씻으세요.”
“어.”
수분이 지나고 현성이 바깥으로 나왔다.
세면대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닌데, 굳이 같은 공간에서 씻지 않겠다고 기다린 셈이다.
‘둘이 애야?’
우스운 건 그걸 현성도 그걸 알면서 말없이 씻었다는 점이다. 반대의 상황이라면 현성 또한 서한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덜 말린 머리카락을 대충 털며 그 모습을 보던 진희가 키득 웃었다.
“아, 카온.”
“잠시.”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난 카온은 진희를 부르기 위해 오던 참이었다. 그는 익숙하게 수건을 꺼내 진희의 머리 위를 덮고, 말려주기 시작했다.
매번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는 진희를 위해서 그는 아침마다 수건을 들고 오곤 했다.
“저거 재밌지 않아?”
“재미없습니다.”
“그래?”
진희가 서한과 현성 방을 가리키며 말하자 카온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카온도 저기 가서 자볼래?”
“…….”
“아, 머리, 머리 아파. 엉킨다니까, 나 잘 엉킨단 말이야.”
카온의 손길이 거칠어지자 진희가 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전 지금 자리로 충분합니다.”
“하지만 좁잖아.”
카온이 지내는 곳은 진희의 옆방이었다. 진희의 방보다 크기가 반밖에 되지 않아 거구인 카온에겐 작은 방이었다.
하지만 카온은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주인의 곁에 있는 게 기사의 도리입니다.”
“어어.”
오래간만에 듣는 카온의 고리타분하고 닭살 돋는 멘트였다. 진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식당으로 걸어갔다.
“근데 오늘 반찬은 뭐야?”
“현미밥과 아욱 된장국, 조기구이, 진미채 간장 볶음, 열무김치입니다.”
완전 한식이다.
“난 빵이 좋은데.”
“아침 빵은 일주일에 한 번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
진희는 별말 없이 수긍했다. 기사단 중엔 아침 한식 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카온이랑 라이샤는 생긴 거랑 달리 한식 정말 좋아하네.”
아무리 봐도 외국인인 카온과 라이샤가 젓가락으로 진미채를 우물우물 먹는 모습이 떠올랐다. 언제 봐도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묘한 광경이었다.
“오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스케줄? 글쎄, 우선 이선이랑 애들 수련 좀 봐줘야지. 지금 당장 할 만한 게 없으니까.”
목표는 구체적으로 정해졌지만, 정보가 없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지금은 서혁과 서한, 현성, 그리고 PD가 확실한 정보를 모아오길 기다려야 했다.
진희는 급하지 않았다. 기사단의 전력이 확실한 지금 상황에서 급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은 기사단을 건드리지 못한다. 진희는 기사단의 실력에 큰 자신감이 있었다.
“저 방은 그대로 둡니까?”
“서한 시랑 현성 씨? 재밌잖아, 놔둬.”
현성이 보육원에 상주한다고 해도 나쁜 점은 없었다.
“그리고 둘이 아웅다웅하는 거 보면 재밌기도 하잖아.”
“…….”
물론 굳이 둘을 같은 방에 둘 필요는 없었지만, 진희는 최근 어긋난 둘의 사이가 돌아오길 바랐다.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진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그 뒷모습을 가만 보던 카온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