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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13화 (113/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13화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라진 사람들이 저곳에 갇혀 있는 건 확인한 바였다. PD의 말에 카온이 고개를 끄덕이곤 검과 방패를 들었다.

“공격은 내가 막는다. 빠르게 처리해.”

“응.”

PD가 멈출 틈도 없었다. 단숨에 몬스터를 향해 달려간 둘은, 마치 사전에 짜기라도 한 듯 동시에 공격을 감행했다.

카온이 앞을 막고 라이샤가 사방을 공격한다는 단순한 전술이었지만, 둘의 마력 출력을 보면 결코 우습게 볼 수준이 아니었다.

“괴물들.”

던전의 공포도 잊고서 PD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검에 두른 마력이 심상치 않았다. 휘두르는 것만으로 대기가 출렁일 정도의 공격을 거듭하며, 두 헌터가 몬스터를 몰아붙였다.

[카아악-!]

“입 다물어.”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몬스터가 괴성을 지르며 반격하려 했지만, 카온의 방패에 손쉽게 막히고 말았다.

두 눈 뜨고 주인을 빼앗긴 기사의 분노는 어마어마했다. 그는 검술도, 체술도 아닌 오로지 마력과 괴력만으로 몬스터를 몰아붙였다.

라이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희마저도 등골이 오싹했던 그녀의 검기가 몬스터의 몸을 사정없이 갈라버렸다.

이윽고 A급 헌터의 파티도 고전했던 레이드가, 단둘의 협공으로 단 수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아, 아아-]

몬스터는 정체불명의 말을 중얼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라이샤는 잠깐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털고 수정 벽으로 걸어갔다.

“이 벽 너머에 있다고?”

“아, 네.”

PD가 허겁지겁 따라왔다. 아직 어두운 동굴이었지만 수정 벽의 미약한 빛을 따라 다가온 그녀가 벽을 매만졌다.

마침 곁에 있던 카온이 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으나,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유사 성벽이네.”

라이샤는 벽을 보며 말했다.

“벽 너머가 이 던전의 중심인 것 같아. 그걸 지키기 위해 이렇게 벽을 세워둔 거고.”

카사가 등대를 세워 시간과 공간을 멈춘 것처럼, 이 던전 또한 벽 너머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쓴 듯했다.

“못 부수나요?”

“몰라.”

라이샤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런 유사 성벽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물건이었고, 그렇기에 이걸 부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카온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다시 검을 들어 벽을 공격하려 할 때.

쿵-

“어?”

동굴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거세게 진동했다.

설마, 하는 얼굴로 일행이 일제히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쿵-

다시 한번 일어나는 거대한 진동.

그리고 공간을 가득 채웠던 수정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쿵-!

“와, 미쳤네.”

PD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벽이 부서지고 있었다.

금이 가기 시작한 수정 벽 너머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이게 되네요.”

진희가 왠지 모를 속 시원한 표정으로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그녀의 뒤에서 허망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던 현성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엔 찬란히 빛나는 금빛 마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벽을 후려친 것으로 보이는 주먹을 풀며, 그녀가 대답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겠어요?”

오로지 마력으로 한 세상의 성벽을 때려 부순 그녀가 밝은 얼굴로 카온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왔어.”

* * *

“사실입니다.”

“…….”

“교차 검증까지 완벽하군요.”

서한은 박준을 불렀다. 클로이는 용의주도하게 자료를 준비해 왔었고, 그것을 박준에게 줘 검증하도록 했다.

박준은 금강의 데이터를 클로이의 것과 비교해 보았다.

모두 일치했다. 금강에서 포착했던 헌터 시장의 변화나 브리온의 은닉자산, 실험에 참여했다는 이민자들의 프로필까지 완벽했다.

박준은 경악이 서린 눈으로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보육원의 응접실 소파에 앉은 클로이는 연신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서한은 피곤한 안색으로 이마를 눌렀다.

“그럼 비인증 헌터 대부분이 그 실험의 참가자란 소리냐?”

“네.”

“왜 그 참가자들을 비인증 헌터로 시장에 푼 건데?”

평균 B급이라는 어마어마한 헌터 군단을 기업에 영입하지 않고, 굳이 비인증 상태로 시장에 푼 이유는 무엇인가? 서한의 질문에 클로이가 턱을 괴며 대답했다.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제 정보원에 따르면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하더라고요.”

“정보원?”

“바제트 씨 아버지요.”

“바제트?”

박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누군가 싶어 서한을 돌아보았지만, 그는 박준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제비인가.’

제비, 서혁이라면 믿을 만한 정보였다. 그의 통찰력은 업계에서도 알려진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브리온이 혼란으로 얻을 게 뭔데?”

브리온은 진보적이고 쾌활하며, 젊은 컨셉을 내세우고 있었다. 이런 혼란에 이득을 볼 게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하아.”

모든 걸 아는 것처럼 행동해 온 클로이가 천진한 얼굴로 웃자 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자료가 진실이라는 게 드러난 지금 서한은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할까요?”

“이세영에게 연락해.”

단순한 이상 현상이었다면 몰라도 브리온이 개입되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브리온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 비인증 헌터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샅샅이 조사해야 했다.

“진희는…….”

서한은 박준에게 지시하려다 말을 멈추고 클로이를 바라보았다. 클로이는 여전한 얼굴로 서한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클로이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발견한 그는, 그녀의 앞에선 진희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우선 비인증 헌터의 규모부터 정확히 알아봐.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소속된 단체가 있다면 그것도 조사하고. 후원해 주는 인간이 있다면 모조리 잡아들여.”

“반발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말 나오면 방위대가 무능해서 대신 나섰다고 해.”

비인증 헌터라면 간섭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사회 정화 활동이라고 우기면 그만이다. 세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제 정보가 큰 도움이 된 것 같나요?”

“……그래, 고맙다.”

자신이 속한 기업의 치부를 드러내는 클로이의 의도를 알 순 없었지만, 지지부진하던 문제가 조금이라도 해결된 건 맞았다. 서한의 인사에 클로이가 방긋 웃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도 부탁 하나만 드려도 괜찮을까요?”

“뭐지?”

“이민자들이 잡혀 있는 연구소를 알아요. 그곳을 습격해서 이민자들을 풀어주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생각보다 정상적인 요구에 서한이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분명 진희와 관련된 부탁이 아닐까 싶었는데, 이민자 해방이라면 오히려 서한 쪽이 환영이었다.

“그곳이 어디지?”

“절 포함해서 습격해 주신다고 말씀하시면 알려드릴게요.”

“흐음.”

서한 혼자 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 자리에 없는 현성과 진희의 의견도 들어봐야 했다. 현성이라면 당연히 가겠다 말할 테고, 진희라면…….

‘모르겠군.’

자신의 사람에겐 한없이 상냥한 그녀였지만 때때로 보이는 냉정함은 서한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네가 이민자를 도우려는 이유는?”

“사람을 돕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여지없는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에 흔들린 서한이 아니었다.

“필요해. 인간은 그런 동물이니까.”

“후후, 당신도 유별나군요.”

금강의 후계자 자리를 거저 얻은 게 아니었다. 서한은 정보를 알려줬다 해서 클로이가 아군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잠깐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요.”

클로이가 박준을 바라보며 말하자, 서한은 그를 잠시 복도에서 대기하라며 내보냈다. 박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뒤로하고 서한이 말해보라며 턱짓했다.

“저도 전생이 있다는 건 아시죠?”

“그래.”

“제 전생에서 능력이 바로 영혼의 결집이었답니다. 제 능력이라기보단, 제가 속한 기사단의 능력이죠.”

그녀는 진희처럼 전생을 기사로 보낸 이였다. 그녀가 속한 기사단은 모두가 ‘라바다(신의 자식)’라는 성을 쓰는 성기사단이었다.

“성기사단은 모두 신을 섬기는 자들로서, 우리는 신에게 영혼을 빌려 쓴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가 같은 강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혼을 통일화하고 그룹으로 맺어 강인함을 증가시킨다는 성기사단 특유의 능력이었다. 그렇기에 성기사단은 모두가 동일한 수준의 검술을 구사했고, 그 어떤 정신적인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정신무장을 자랑했다.

‘물론 결국 한 명의 기사에게 무너지지만요.’

세계에서 으뜸간다는 기사단을 단신으로 물리치는 악귀 같은 모습이 떠오른 클로이가 설핏 웃었다.

“그런데 브리온이 데리고 간 이민자들의 능력이 우리 기사단의 능력과 흡사해요.”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군. 네 동료일까 봐?”

“동료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수도 있겠죠. 듣고 넘어가기엔 너무 중요한 문제라서요.”

반쯤은 진심이었다. 이제 와서 ‘라바다’라는 성에 큰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자신과 바제트 말고도 전생자들이 존재한다는 정보를 들은 터라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군.”

서한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여전히 클로이를 믿을 수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이유는 타당했지만, 마냥 믿기에는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브리온에 대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애사심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브리온의 치부를 드러내는 감정적인 이유를 듣지 못했다. 이민자들의 실험을 중단시키고 싶다면 금강의 서한이 아니라 다른 기업이나 단체를 찾아가는 게 더 이상적이었다.

굳이 한국의 라이벌 기업인 금강보다는 브리온의 근거지인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도움을 구하는 게 더 확실했을 테니까.

‘하지만 기회일 수도 있겠어.’

클로이를 믿을 순 없지만 브리온의 비밀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서한이 긴 침묵을 끝내며 말했다.

“연락처를 줘. 곧 연락하지.”

“네.”

클로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그에게 휴대전화 번호를 건넸다.

“아, 바제트 씨는 언제 오나요?”

“곧. 그리고 바제트라고 부르지 마라. 서진희라는 이름이 있으니까.”

“어머, 뭘 모르시네.”

클로이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경멸과 무시, 그리고 짜증이 섞인 얼굴로 클로이가 대답했다.

“바제트 경을 부정하지 마세요. 모습이 바뀌었어도 그녀는 고귀한 기사니까요.”

“…….”

바제트 ‘경’이라. 서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클로이는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보육원을 나섰다. 자신이 생각한 대로 일이 끝났을 때는 언제나 기분이 하늘로 치솟는 법이다.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빨리하던 도중, 보육원 입구에 한 여성이 서 있는 게 보였다.

뜀박질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보육원으로 들어온 그녀는, 최근 기사단에 영입된 김이선이었다.

이선은 B급이 되기 위해서 내준 진희의 숙제를 하는 틈틈이, 답답할 때마다 바깥을 달리곤 했다.

오늘은 서한이 손님을 만난다길래 자리를 비켜줄 겸 바깥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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