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09화
“다친 곳은 없습니까?”
“없어요, 현성 씨는요?”
“전 괜찮습니다.”
현성이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의 기척이 사라졌을 때 온몸의 피가 굳어버리는 것 같았다. 일행 중 기척에 가장 민감한 현성만이 진희가 사라지는 걸 눈치챘고, 그는 진희의 옷에 표식을 붙여 이동 마법을 사용했다.
현성은 비틀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두통이 일었지만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돌렸다.
“우선 이곳을 나가야…….”
[거짓말하고 있다. 제법 고통이 클 텐데.]
“뭐?”
진희가 바르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
“잠깐만요, 바르그, 뭐라고?”
진희가 현성의 말을 끊고 바르그에게 되물었다. 왠지 모르게 서운한 목소리의 바르그가 대답했다.
[목 뒤를 봐라.]
진희는 곧장 현성의 어깨를 잡아 내렸다. 어정쩡한 자세로 허리를 숙이게 된 현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진희의 힘이 만만치 않았다.
“뭐야, 이거.”
현성의 목 뒤엔 수정이 붙어 있었다. 벽의 수정이 현성의 목에 박힌 건가 싶었으나, 만져 보니 다른 게 느껴졌다.
목에서 수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영혼을 추출하는 거군.]
“무슨 소리야, 바르그? 아니, 일단 너 나와봐. 현성 씨랑 같이 듣게.”
“네? 누구랑 대화하는 겁니까?”
현성을 놔주고 진희가 검을 뽑았다. 은빛의 검이 빛을 발하며, 한 마리의 늑대로 변신했다.
“……굉장히 정순한 정령이군요.”
[보는 눈이 괜찮군.]
“주술사란 그런 법이니까요.”
“저기, 그런 오그라드는 인사는 그쯤하고 상황 설명이나 하시지?”
바르그의 모습을 처음 본 현성이 감탄하고 있자, 진희가 말을 끊고 바르그를 재촉했다. 바르그는 진희를 흘끔 바라보더니 현성의 뒤로 돌아갔다.
[이 수정은 이곳의 정체성이다. 영혼을 수집하는 이곳의 특징이지.]
“무슨 특징인데?”
[말했지 않나. 영혼을 수집한다고. 이곳은 영혼만이 존재해야 하는 장소지만, 지금은 법칙이 무너져 신체가 있는 이도 출입이 가능한 불안정한 저승이 되고 말았다. 이 수정은 저승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함정 같은 거야.]
바르그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앞선 던전의 동굴과는 달리, 이 거대한 수정의 광장은 불가사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빛은 영혼의 잔재다. 너희가 지나왔던 동굴이 빛이 없던 이유는, 그곳에 있어야 할 모든 영혼이 다 말라버렸기 때문이지. 본래라면 영혼으로 사방이 밝아야 할 저승이 어둠과 빛, 두 구역으로 나뉘게 된 건 이 세상의 법칙이 무너졌기 때문이야. 저승에 들어오는 영혼이 없으니 남은 영혼을 바득바득 긁어 이 구역이라도 유지될 수 있도록 만든 것이지.]
“내가 궁금한 건 이 던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따위가 아니야. 현성 씨의 목에 달린 저 수정을 어떻게 떼어낼 수 있는가지.”
[직설적이군.]
바르그가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이 수정은 저승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생물들의 영혼을 흡수하는 능력을 가진 것 같다. 저승엔 살아 있는 자가 존재하면 안 되니까, 그 법칙을 지키기 위해 저승이 만들어낸 무기인 셈이지.]
“그럼 저기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죽은 겁니까?”
현성의 수정에 갇힌 사람들을 보며 묻자, 바르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상처는 없지만 죽은 걸 보니, 수정에 의해 영혼을 모두 빼앗긴 자들이겠지. 가만히 놔두면 네 목에 있는 수정이 너의 영혼을 빨아들여 점점 크기를 키워나갈 것이다.]
“없앨 방법은.”
[모른다.]
바르그의 말에 진희가 사납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만 늘어놓곤 해결 방법이 없다니. 진희가 현성의 목을 잡았다.
“그냥 뽑으면?”
[추천은 못 하겠군. 영혼에 직접 연결되어 있을지도 몰라.]
“대체 왜 현성 씨만 이런 게 난 거야? 나도 같이 끌려왔는데.”
[그야 네 영혼은 파고들 구멍이 없으니까.]
바르그는 진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르그의 눈엔 진희의 단단하고도 완전한 영혼이 보였다.
[틈이 있는 인간은 당하기 쉬운 함정이다. 네가 당하긴 어렵지.]
“……이곳을 탈출하면 사라집니까?”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안 현성이 묻자, 바르그가 그것도 확신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아예 없어?”
[흠, 너희를 이곳에 끌고 온 저승의 주인에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바르그는 고개를 돌려 수정 벽의 한구석을 가리켰다.
“주인?”
현성과 진희도 고개를 돌려, 바르그가 가리킨 곳으로 걸어갔다.
수정이 파묻힌 동굴의 가장자리엔, 작은 꽃 한 송이가 자라 있었다.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 사이에 핀 손바닥만 한 붉은색의 꽃이었다.
꽃은 수정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이게 주인이라고?”
[자고 있군.]
“꽃인데?”
[저승에서 신체를 유지하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흐음.”
진희는 곧장 주먹을 들었다.
[아마 곧 일어나겠지. 조금만 기다리면…….]
“에잇.”
그리고 바르그의 말을 끊고, 마력을 담아 수정을 후려쳤다. 바르그가 당황한 탓에 입을 떡 벌렸다.
[이, 이봐!]
“안 깨지네.”
생각보다 수정이 단단해 금조차 가지 않았다. 조금 더 힘을 줘서 깨볼까 하고 주먹을 들려던 찰나, 한 목소리가 꽃에서 흘러나왔다.
“……그만두세요.”
아이의 목소리였다. 청하의 동생 민하 또래가 아닐까 싶은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모두가 주목했다.
“헌터님이 오셨군요. 이제 인사를 드려 죄송합니다.”
“……당신이 주인인가요?”
“전 이곳의 관리인입니다.”
꽃은 조금의 움직임도 없었지만, 분명 목소리는 이 꽃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진희는 팔을 내리고 꽃을 바라보았다.
입도 없고, 마력을 사용한 흔적도 없는데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말을 거는 바르그와는 사뭇 달랐다. 이 음성은 분명 귀로 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국어로.
“이거 당신이 한 짓인가요?”
진희가 현성의 목을 가리키며 물었다.
“의도적으로 한 건 아닙니다만, 제가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군요.”
“치료할 방법은?”
“있습니다.”
후우, 현성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땐 진희의 단도직입적인 화술이 큰 도움이 되었다. 아까부터 지끈거리는 목을 누르며, 현성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추출기를 이어받으면 됩니다.”
“……네?”
“추출기는 1인 1개만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만약 다른 헌터님이 추출기를 받을 경우, 본래 착용자는 추출기를 해제할 수 있습니다.”
결국 폭탄 돌리기란 이야기였다. 수정을 제거할 방법이 없단 말에 진희가 다시 한번 꽃을 지키고 있는 상자를 내려쳤다.
“다른 방법.”
“없습니다.”
“이곳에서 탈출하면?”
“그렇다 하더라도 추출기는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 착용자의 영혼을 추출합니다. 억지로 떼어낼 경우 착용자의 영혼에 심한 손상이 올 수 있습니다.”
꽃의 말을 모두 믿을 순 없었다. 바르그의 말마따나 이곳이 저승이라면 신체를 가진 일행을 달가워할 리 없었고, 이 꽃이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르그 또한 침묵으로 꽃의 말을 긍정하고 있었다. 진희는 연신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추출기가 모두 채워지기까지 얼마가 걸립니까?”
그때 현성이 질문을 달리했다.
“정확히 한 사람분의 영혼을 추출하면 자동으로 분리됩니다. 하지만 부족할 경우, 수정은 착용자를 감싸 동결 후 사망시킵니다.”
“제 영혼이라면 어디까지 추출됩니까?”
“……추출기 한 대 분량의 영혼을 완벽히 만족합니다. 당신은 추출 후 신체를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 추출되면 죽는다는 건 똑같았다. 현성이 복잡하다는 얼굴로 이마에 손을 얹었다. 아무리 들어도 방법이 없었다.
진희와 현성, 바르그 사이에 긴 침묵이 지나갔다. 현성은 욱신거리는 목을 연신 어루만졌고, 진희는 무언가에 생각이 빠진 듯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바르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꽃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닌가?]
“저는 관리인입니다.”
[하지만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꽃에게선 바르그의 세상에 있던 정령왕과 비슷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주인의 기운은 느껴지지만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의 주인, 신이란 곧 어마어마한 영혼을 품고 있는 자를 뜻한다. 성벽을 아우르고 만물의 운명을 수용할 정도의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주인의 자리에 앉을 수 없다.
과거에 만났던 카사조차도 그랬다. 몰락한 신이지만 바르그마저도 고개를 숙일 정도로 거룩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꽃에게선 아무런 영혼이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기이하군.]
“……잠깐만, 아까 추출기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있다고 했지?”
긴 고민 끝에 나온 진희의 질문이었다. 바르그는 미심쩍은 눈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된다.]
“뭘?”
[네가 대신 희생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바르그는 진희의 영혼을 누구보다 잘 아는 동료였다. 그녀의 과거 속에 희생이란 단어가 얼마나 서글픈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진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래, 그럴 생각 없어. 추출기 말이야, 반씩 나눠서 영혼을 추출하면 안 돼? 현성 씨가 반 내고, 내가 반 내는 식으로.”
[뭐?]
“가능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발상에 바르그가 입을 떡 벌렸고, 꽃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혼은 시간이 지나면 재생한다며. 그럼 이런 식으로 소모해도 괜찮은 것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심신이 안정되어 있다면 영혼의 손상은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하다.
당장 정령사나 소환사, 주술사들이 다른 세상의 존재를 소환할 때 사용하는 게 본인의 영혼임을 생각하면 반 정도의 영혼이 소모되었다고 해도 회복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이미 진희, 바제트의 영혼은 크게 손상된 적이 있었다. 흉터가 너무 크게 남아 아물지 않던 것이, 환생이란 방법으로 겨우 봉합되었다.
지금이야 진희의 영혼과 바제트의 영혼의 융합이 완벽하여 틈을 찾을 수 없지만, 한때 상처가 많았던 진희에게 또다시 영혼을 지불하게 두고 싶진 않았다.
바르그의 걱정을 아는 것인지 진희가 바르그의 머리를 몇 번 두드렸다.
“괜찮아. 내가 바보처럼 희생할 사람으로 보여?”
보인다. 너는 모르겠지만, 너의 상냥함은 때때로 네 안위보다 무거웠다.
하지만 바르그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진희가 자신의 말을 듣는다 해도 멈추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에.”
진희는 팔짱을 끼며 꽃을 노려보았다.
“네 정체부터 말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넌 내가 봐왔던 던전의 주인들과는 다르거든.”
“무슨 말씀이신지요?”
“너 말이야, 진짜 이 던전의 주인 맞아?
”주인이란 단어에 꽃은 관리인이란 단어로 대답했다.
그간의 초월적인 존재들과 달리, 꽃은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것은.
“헌터란 말은 인간의 말이거든.”
꽃이 구사하는 단어들은 아무리 들어도 인간의 것이었다.
바르그가 꽃에게 의문을 품기 전에, 진희는 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제 이름은.”
꽃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SC프로젝트 3호입니다. 비인증자 헌터님께 말씀드릴 수 있는 대외용 이름인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