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08화 (10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08화

“움직임이 이상해.”

이세영은 아침마다 전 날 있었던 온갖 일을 보고 받는다. 헌터 시장의 변화, 시사 뉴스, 세영과 연관된 모든 일을 각기 다른 인물들에게 보고받는 게 아침의 일과였다.

수십 장의 보고서를 한 시간 만에 읽고, 오늘의 스케줄을 정한다.

그러나 오늘은 보고서를 들고 2시간 동안이나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세영의 비서는 놀람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물었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있어요. 말로 표현하긴 힘들지만, 있어요.”

세영은 몇 번이고 보고서를 뒤집어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묘했다. 한국의 정치인, 기업, 헌터의 움직임이 모두 부자연스러웠다.

“정치인은 조심하는데 기업은 뭔가를 하려고 해요. 헌터들은 평상시와 같죠.”

“헌터만 문제가 없는 겁니까?”

“아뇨, 그게 더 이상한 거죠. 차라리 이 세 그룹이 같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이해했을 거예요. 하지만 헌터‘만’ 정상이죠.”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비서를 향해 세영이 한숨과 함께 설명을 이어나갔다.

“한국에서 이 세 그룹은 서로 친밀하지만, 동시에 적이기도 해요. 정부 편을 들 건지, 기업 편을 들 건지 선을 긋는 유럽과는 다르죠. 가장 약세는 정계이지만 권력을 통해 로비를 받고, 강세인 재계는 정계를 견제하면서도 실리를 취하기 위해 헌터를 이용하죠. 헌터는 기꺼이 재계에 이용당하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 움직인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그렇기에 어떤 사건이 터지면 세 그룹이 동시에 움직인다.

여기서 유일한 예외는 금강 기업 하나뿐이다.

압도적인 인재풀을 가진 금강은 법 위에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세영은 그런 이기적인 금강을 고치기 위해 지속적으로 한국의 정계에 손을 뻗어왔다. 눈치챈 정치인은 적지만, 세영은 페이퍼 컴퍼니를 운영하며 많은 금액의 로비를 벌인 큰 손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헌터만 모르는 뭔가가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정계와 재계에 뭔 일이 생긴 게 분명해요.”

“서로 싸우는 걸까요?”

“불가능해요. 지금 한국 사회에서 헌터를 제외하고 일을 벌일 수 있는 그룹은 존재하지 않아요.”

정계와 재계는 둘 다 우두머리 노릇을 하려 하지만, 그 계략을 실행하기 위해선 헌터가 반드시 필요하다.

“헌터 시장은 변화가 없는데 정계와 재계가 각기 수상하다면, 그쪽 소속 헌터들이라도 움직임을 보여야 해요. 그러나 그것조차 없어요.”

세영이 계속해서 고민한 원인이었다. 수상한 건 맞는데 정작 누군가 일을 벌이진 않았다.

간만 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럼 왜 간만 보는 거지?”

뭐가 두려워서?

세영은 턱을 괴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다음 스케줄을 알려줘야 일을 할 수 있는 비서만이 복잡한 표정으로 세영을 지켜보았다.

“이사님은 뭘 하고 있지?”

“이서한 님은 여전히 보육원에 계십니다.”

“진희 씨는?”

“던전 공략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이랑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저번에 진희가 헌터 관리본부 간부들과 마주할 때를 떠올리며 세영이 답답하다는 얼굴로 책상을 두드렸다.

“……니케에게 물어볼까?”

“또 부릅니까?”

비서가 질색하는 얼굴을 했다. 괴짜 니케는 세영이 귀한 손님 취급하라 하여 방문할 때마다 정중히 맞이하고 있었지만, 니케의 괴행에 매일 속을 썩이고 있었다.

“믿을 만하진 않은데, 믿을 만한 걸 많이 알고 있어서요.”

“전 추천하지 않습니다.”

비서가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그는 도저히 니케를 신뢰할 수 없었다. 니케의 모든 걸 아는 듯한 업신여기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지만, 니케가 한국에서 벌인 수많은 사건이 그의 소신의 근거가 되었다.

니케는 걸어 다니는 폭탄이었다.

게다가 모든 일을 고의적으로 일으켰다는 게 문제였다. 폭탄의 후폭풍을 예지하고 있으면서도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폭탄마는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상책이다.

세영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니케와 함께하면서 얻은 것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별수 없어요.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러나 상관이 정했다면 군말 없이 따르는 게 세영의 비서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대체 어디서 시작한 걸까, 이 어긋남은.”

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서를 책상 위로 던졌다. 그러나 세영은 펼쳐지는 수많은 보고서 사이에서 ‘서진희’란 이름이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태풍의 중앙은 언제나 고요한 법이었다.

* * *

“지옥?”

진희는 라이샤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이 일상이 된 현대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바로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곳이 지옥이란 거야? 무슨 근거로?”

“영혼이 모이잖아. 이곳은 육체가 허락되지 않은 장소야. 그 증거로 빛과 어둠의 경계가 없어. 신체의 정체성은 윤곽이거든.”

“……나만 이해 못 하고 있나요?”

“나도 그래.”

맨 앞에 있던 PD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샤의 비유는 도무지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지옥이란 게 있는 겁니까?”

현성이 궁금한 건 그 점이었다.

“모든 세상엔 영혼이 모이는 지점이 있어. 그게 지옥이라고 부르든, 천국이라고 부르든. 아무래도 좋지만.”

“여기가 그럼 이 세상의 영혼이 모이는 지점이란 거죠?”

“맞아. 하지만…… 망가졌네.”

라이샤는 주변 벽을 둘러보며 말했다.

“성벽이 무너진 건 알고 있었지만, 여긴 더 심각해. 누가 일부러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아.”

“누가?”

“몰라, 하지만 이미 이 던전은 제 기능을 못 할 거야.”

라이샤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진희와 현성이 몇 가지 더 물어봤지만, 하나같이 추상적인 표현으로 대답할 뿐이었다.

현성이 라이샤의 말을 조합해 현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이곳은 영혼이 모이는 곳이라 빛이 없는 거고, 이미 ‘누군가’ 던전에 들려 성벽을 망가뜨렸단 거군요.”

현성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강조했다.

이곳은 PD의 파티가 처음 발견한, 오지에 위치한 해저 던전이다. 그 던전에 출입한 누군가가 있다는 건 제법 중요한 단서였다.

던전의 특징인 납치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우선 계속 진행하죠. 라이샤, 뭔가 알아내면 바로 말해줘.”

“응.”

“특히 뭔가가 나타날 것 같으면 바로 말해. 누군가가 납치될 거 같으면…….”

“바로 지금.”

“어?”

“지금이야. 뭔가 오고 있어.”

진희가 순간 마력을 폭발적으로 개방시켰다. 주변을 탐색하고 전투를 개시하려는 신호였다. 진희뿐 아니라 모든 파티원이 무기를 꺼내 들고 응전을 준비했다.

진희가 검을 뽑으려는 순간.

“어?”

모든 감각이 차단되었다.

곁에 있던 PD의 숨소리, 희미하게 보이던 수정의 빛, 심지어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마력의 감지까지 모조리 차단되었다.

이게 무슨, 하고 입을 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납치다. 진희는 직감했다. 그리고 그 납치의 대상이 자신이란 것 또한 실감했다.

마력을 이용한 수법은 결코 아니었다. 추측한다면 마력이 아닌 누군가의 이능력, 혹은 던전 자체의 능력.

‘도망칠 방법은?’

알 수 없다.

마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렇기에 진희는 곧장 허리춤에 있는 검에 손을 얹었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은 정확하게 바르그의 손잡이에 위치했다.

[일어나.]

진희는 바르그를 불렀다. 바르그와 진희는 서로 영혼이 이어진 상태. 마력을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언 정돈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희.]

하지만 정작 대답은 바르그에게서 들리지 않았다. 진희는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숨찬 목소리가 그녀를 찾았다.

[진희 씨!]

현성이었다.

* * *

“콜록, 콜록!”

진희가 거세게 기침을 내뱉었다. 목구멍 끝까지 정체되어 있던 공기가 기침과 함께 튀어나왔다.

거센 기침 탓에 눈물이 나오는 눈을 비비며 진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감각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마력엔 이상이 없었고, 몸도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수정 동굴.”

지금껏 보지 못했던 빛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온 벽에 수정이 박혀있는 탓이다. 크고 작은 수정이 가득 박힌 가운데, 반대편에 수정과 같은 재질로 만들어진 매끄러운 벽이 보였다.

저것이 바로 수정 벽, PD가 말했던 던전의 마지막 구간이다.

문제는 진희가 있는 곳이 수정 벽 앞이 아니라, 그 건너편이란 점이었다.

“납치된 거네.”

진희는 깔끔하게 자신의 상황을 인정했다. 벽 너머엔 어둠만이 보였지만, 희미한 윤곽이 보여 그것이 벽을 지키는 몬스터란 걸 알 수 있다.

아무래도 진희는 PD가 말한 납치를 당해, 수정 벽 너머로 끌려온 듯 했다.

‘그런데 아까 목소리가 들렸는데.’

바르그를 불렀지만 정작 들린 목소리는 현성의 것이었다. 진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이 부신 수정들 사이에 한 사내가 누워 있는 게 보였다.

“현성…… 씨?”

그곳에 있는 건 현성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누워 있는 건 현성이었지만, 그의 뒤편에 거대한 수정들 안에 수많은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모두가 수정에 갇힌 상태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마력도,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박제된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돌린 진희가 현성을 껴안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는 뭔가를 쥐고 있었는데, 다름 아닌 진희의 옷자락이었다.

진희가 납치되기 직전, 그녀를 붙잡아 같이 이동된 듯했다.

“일어나 보세요, 현성 씨.”

진희가 현성의 뺨을 두드렸다. 창백한 얼굴은 좀처럼 눈이 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숨도 제대로 쉬고 있고, 맥박도 뛰고 있지만 큰 충격 때문에 기절한 듯했다.

[무슨 일이지?]

그때, 잠에서 깨어난 바르그가 진희에게 말을 걸었다.

“던전을 왔는데 이상한 곳으로 끌려왔어. 내 동료도 기절했고.”

진희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현성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마력을 현성의 몸에 집어넣는 식의 약한 충격을 가해 그를 깨울 심산이었다.

[영혼이 모이는 곳이군.]

“그래, 아까 라이샤도 똑같은 말을 하더라.”

[그녀는 신에 가까운 눈을 가졌으니까, 보였겠지.]

평소라면 바르그의 말에 대꾸라도 해줬겠지만, 진희는 심각한 얼굴로 현성을 안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내는 괜찮다. 잠깐 충격으로 기절한 것뿐이야.]

“알고 있으니까 잠깐 닥치고 있어. 짜증 나니까.”

바르그가 순간 말을 잃었다.

진희가 마력을 주입하는 시간 동안 바르그에게만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현성이 진희처럼 거세게 기침하며 눈을 떴다.

“콜록! 콜록!”

“다행이다, 정신이 들어요?”

“콜록! 지, 진희?”

진희는 현성이 기침할 수 있도록 일으켜 세웠다. 한참을 기침하고 나서 진희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현성이 나지막이 말했다.

“납치당했군요. 우리 둘 다.”

“맞아요. S급 헌터와 A급 헌터가 아무것도 못 하고 납치당하다니, 참 세상 요지경이죠?”

아까의 짜증과 분노는 어디 가고,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진희가 빈정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