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107화 (10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07화

서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바닥에 묻은 사내의 피가 더럽다는 듯 털어낸 그가 부서진 대문을 벽에 걸치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 명상이 끝날 시간이었다.

괜히 이곳에 남아 있다가 아이들이 나와서 상황을 보기라도 하면 일이 골치 아파진다.

“이, 일단 돌아가자.”

방금 상황으로 서한의 마력을 느낀 다른 헌터들이 사내를 데리고 돌아섰다. 평범한 직원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으니, 다음엔 또 다른 준비를 하고 찾아오겠지.

멀어지는 말소리를 들으며 서한은 내심 생각했다.

“초면에 반말 들으니까 기분 나쁘긴 하네.”

소라의 말이 괜히 떠올랐다.

사과해야겠는걸, 서한이 멋쩍은 표정을 하고 강당으로 향했다.

* * *

“진짜 바닷속에 던전이 있구나.”

일행은 배를 한 척 빌려 바다로 나왔다. 특정 지점을 향해 배가 나아가자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마력이 느껴졌다.

진희가 고개를 내밀어 바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깊은 바닷속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착용하세요.”

PD가 진희에게 목걸이를 내밀었다.

“가운데 아뮬렛을 꾹 누르고 마력을 집어넣으면 잠수복이 생겨요. 작은 충격에도 찢어지니까 조심하세요.”

“던전 안은 물이 없다고 했지?”

“네, 내부는 그냥 동굴이에요. 축축하긴 하지만 잠수복은 필요 없어요.”

PD는 익숙하게 파티원들에게 던전을 브리핑했다.

이번 던전에 한해 그녀가 길잡이인 셈이다.

“던전의 길이는 길지 않아요. 두 세 시간 정도면 끝에 도달하거든요. 문제는 도중에 납치당할 가능성이 있단 거예요.”

이 던전의 주요 키워드는 납치였다.

PD는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도전했던 파티 중, 누가 어떻게, 언제 납치되는지 아무도 밝혀내지 못했어요. 몬스터가 납치해 갔다는 것도 추측일 뿐이지, 확신은 아니에요. 동굴을 지나는 도중에 만나는 몬스터들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거든요.”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수준은 3급 던전의 몬스터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비록 시야가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몬스터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은 수준 이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몬스터가 납치하는 건지, 아님 던전의 특징이 그런 건지 아무것도 몰라요. 첫 목표는 파티원 모두가 안전하게 수정벽까지 도달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마지막 벽을 지키는 몬스터를 사냥하고, 벽 너머를 확인하는 것.”

벽 너머의 헌터들이 살아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이미 시간도 몇 년이나 흘렀으니, 백골이 되어 있다 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PD는 한때 파티원이었던 이들의 추모를 위해 그들의 유골, 혹은 흔적을 찾길 바랐다.

“그리고…… 죄송한 말이지만, 전 도움이 못 될 거예요.”

그녀가 어두운 얼굴로 눈을 감았다.

“솔직히 무섭거든요. 이 던전에서 겪은 경험은 지금도 악몽으로 떠오를 정도예요.”

PD는 정신력이 부족한 헌터가 아니다. 태도는 다소 가볍지만 궁수답게 냉철한 이성을 지닌 헌터였다.

그러나 이 동굴에서 3번의 실패를 겪은 후, 그녀는 더 이상 다른 던전에 도전하지 않았다.

이곳에서의 실패와 공포가 때때로 그녀를 옭매였기 때문이다. 마치 저주 같다. 헌터로서 할 수 없는 말을 꾹 삼키고 PD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전 철저히 길잡이 일만 할 거예요. 나머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응, 걱정 마.”

진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배의 난간 위로 올라갔다.

“맨 앞은 길잡이인 PD가, 그 뒤는 내가 자리 잡고, 라이샤가 중앙, 카온과 현성 씨가 각각 후방을 경계하며 따라와. 가까이 붙어서 진격하지만 서로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할 것!”

PD의 브리핑과 달리 진희의 설명은 가벼웠다. 자신감이 있다기보다, 분위기를 환기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특히 PD의 불안을 씻어주는 게 제일 중요했다.

“지금 서한 씨한테 연락이 왔어. 서울 쪽에서도 일이 벌어지는 것 같으니까, 빠르게 정리하고 올라가자. 그럼-”

진희가 손뼉을 치고 바다로 점프했다.

“입수!”

* * *

“확실히 어둡네.”

게이트는 바다 깊은 곳, 해초들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좁은 게이트를 지나자 기다란 동굴이 일행을 맞이했다.

던전의 첫인상은 습하다, 그리고 어둡다는 것이었다.

“이탈자 없지?”

“없습니다.”

뒤에 있던 현성이 대답했다.

어둠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천천히 동굴의 윤곽이 보였다.

울퉁불퉁한 벽과 바닥 때문에 움직이기 어려웠다. 그나마 벽 중간에 박힌 크고 작은 수정들이 푸른빛을 내고 있어 진입해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마석은 아니군요.”

현성이 수정을 만져보았다. 마력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 던전 특유의 광물이 아닌가 싶었다. 혹시 몰라 수정 하나를 뽑아 가방에 집어넣고서, 진희에게 말했다.

“진입할까요?”

“PD, 가자.”

“네.”

일행은 천천히 전진했다. 하지만 시야가 안 보이다 보니 걸음의 속도가 빨라지진 않았다. PD의 긴장도 한몫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어둠 속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잠깐만.”

“네, 네?”

“심호흡하고 있어봐.”

진희가 쓰게 웃으며 PD의 어깨를 주물렀다. 평소엔 강단 있어 보였는데, 아무래도 이 던전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정상적인 사고가 힘든 듯했다.

별수 없지, 진희는 PD의 젖은 어깨를 주무르며 마력을 개방했다.

마력을 통해 기감을 넓혀, 주변을 탐색하는 단순한 경계 방법이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마력량을 보유한 진희가 작정하고 마력을 뿜어대니, 동굴 안에 순식간에 진희의 마력으로 가득 찼다.

“여전히 대단하군요.”

현성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성도 주술을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단순하고 신속한 방법으로 주변을 탐색하는 건 진희만이 할 수 있었다.

애당초 마력 보유량이 S급 마법사를 압도하는 그녀였다. 무식하게 마력을 쓴다고 해도 전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하아.”

진희의 말을 듣고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PD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동굴의 어둠과 습기가 진희의 마력에 의해 희석된 것처럼 느껴졌다. 덕분에 공포감이 조금 가신 기분이었다.

“고마워요.”

“적이 출현할 것 같으면 내가 알려줄 테니까, 걱정 말고 앞으로 가.”

사방을 경계하는 진희 덕에 파티의 속도는 좀 더 탄력이 붙었다. PD가 다시금 불안해할 때는 진희가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현성은 계속해서 파티원 모두가 무사함을 보고했다.

PD가 말한 동굴의 끝이 서서히 다가왔다.

“몬스터가 한 마리도 안 나오는군요.”

현성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PD의 말에 따르면 여기까지 오는데 적어도 전투가 두세 번은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끝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겁먹고 있어.”

“네?”

그때, 지금껏 말이 없던 라이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진희의 영혼이 너무 강해. 이곳의 주인이 우릴 피하는 것 같아.”

“주인?”

“주인, 혹은 신. 아니면 정령, 비슷한 존재. 이곳은 아마…….”

라이샤는 지금껏 신의 곁에서 나고 자라왔다. 그녀의 특별한 운명과 눈은 이 던전이 어떤 상태인지 단박에 구분해 냈다.

“어떤 세계의 지옥인 것 같아.”

라이샤의 무덤덤한 말이 동굴 속을 울렸다.

* * *

-용의주도한 놈들입니다. 단서가 아예 없어요.

“그런 양아치들이?”

-전부 고용된 헌터들입니다. 모두 전과가 있어서 이런 일에 종사하는 무리죠.

서한이 기가 찬다는 듯 웃었다.

진희와 현성에게 보육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려준 후, 그는 자신의 부하, 박준에게 연락했다.

보육원을 찾아온 시민연대란 곳의 정체와 헌터들의 신상명세를 달라고 했으나, 돌아온 건 실패했단 보고뿐이었다.

박준이 실수했을 리도 없었다. 서한은 자신을 오랫동안 보좌했던 박준의 능력을 믿었다.

-뒷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

-아마 대기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무슨 일인지 정치 쪽 인사들은 자금 유통이 막혀서 조용하니까요.

현성의 덕분이었다. 현성이 불법 자금이나 로비 행위를 밝혀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하는 덕택에 정치인들의 행보가 둔해졌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계속 조사해 봐. 아무리 전과범이라도 B급 헌터 서너 명을 부릴 수 있는 단체는 많지 않으니까. 상습법인 게 분명해.”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보 통제를 강화해. 보육원 정보는 특히.”

-물론입니다. ……그런데 도련님, 계속 보육원에 계실 생각이십니까?

“왜?”

-후계자 결정일이 멀지 않았습니다.

후계자 결정.

기업인으로서, 그리고 헌터로서 가장 많고 명예로운 업적을 달성한 자가 금강의 회장이 된다는 단순무식한 판가름의 날이었다.

“넌 시영이 편 아니었나?”

-물론 시영 도련님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영…… 지부장님보다야, 서한 도련님이 회장이 되셨으면 하니까요.

“꿩 대신 닭인가 보네.”

-자존심 높은 용보단 늠름한 호랑이가 더 친근한 법입니다.

박준의 표현에 서한이 작게 웃었다. 제법 세련된 농담이라고 덧붙였다.

-도련님이 보육원에 마음이 있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십니다.

박준의 말은 옳았다. 서한은 후계자 결정을 위해서 한 시간이 아까운 사람이었다. 더 많은 상급 던전을 공략하고, 시장을 확장하며 입지를 굳혀야 했다.

물론 진희와 함께하며 이룬 업적도 만만치 않았지만, 후계자와 연관된 업적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박준, 최근 선을 자주 넘는군.”

-충언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알아.”

서한이 쓰게 웃었다. 자신을 위해서, 금강을 위해서는 이럴 시간이 없었다. 진희에게 집착해서 점점 활동 범위가 한정되고 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웃기지 않나? 나뿐만 아니라, 이세영도 마찬가지라는 게.”

-그건…….

박준이 말을 삼켰다. 이세영 유럽 지부장, 그도 한국에 체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정기적인 보고를 끝내고 유럽으로 돌아가 자신의 일에 전념해야 했다. 하지만 세영은 어떤 연유에선지 한국에서 체류를 계속하며 시간 낭비를 하고 있었다.

이세영, 이서한, 그리고 서진희의 관계를 알고 있는 박준은 이세영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진작 알고 있었다.

세영도 결국 진희에게 묶여 있는 것이다.

우습게도 그 덕분에 서한과 세영의 업적은 추가되지 않았다.

“우리가 왜 이러는 걸까.”

-……모르겠습니다.

박준은 서한과 가장 오랜 시간을 보냈던 사람 중 하나였다. 비록 시영이 헌터 면허를 딴 후엔 그가 박준을 시영에게 보내주게 되었지만, 지금도 곧잘 일을 맡기는 믿음직한 부하이자 친구였다.

그런 박준도 서한과 세영의 행보를 이해할 순 없었다.

말로 표현하면 간단한 일이었지만, 그게 이해가 되기엔 설득력이 부족했다.

이상주의자이자 결벽증으로 주변인들에게 미움을 사는 이세영.

반대로 부하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고 있으나, 호전적인 성격 탓에 항상 적들과 대적하는 이서한.

단 한 번도 취향이 겹친 적도, 인간관계에서 교집합이 있던 적도 없었다.

그런 둘이 지금 한 명에게 묶여 정체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서한의 한숨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