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06화
“최근 신림은 조용했는데요.”
“조직들도 본거지를 옮긴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 모르게 진희는 카온을 시켜 보육원 주변을 청소하고 있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게이트를 닫는다거나, 질 나쁜 무리가 생기면 몸소 내쫓곤 했다.
그런 카온의 활약 때문인지, 신림의 거대 조직들은 본거지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 돈으로 뭘 했죠? 그 테러범들 후원?”
“그걸 알아보고 있습니다.”
테러범은 정치인들뿐 아니라 기업, 범죄조직들과도 내통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렇게 대놓고 활동하는데 뒷배를 봐주는 사람이 적을 리 없지. 진희가 혀를 찼다.
“자금줄부터 막죠. 관리본부에 돈 대준 기업 목록 뽑아주세요. 그리고 간부들 조사했던 거 하나씩 터뜨리시고, 그건 PD가 도와줄 거예요. 관리본부에 이목이 천천히 집중되게 천천히 터뜨리세요.”
“그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터뜨릴 때마다 한만식 실장에게 언질을 주세요. 약속을 안 지킨 사람이 있어서 터뜨리는 거라고. 약속 지키면 안 터뜨릴 테니 알아서 조심하라고 전해요.”
“언론이 침묵할지도 모릅니다.”
“PD한테 말해서 영상 올리게 만들어요. 방송 쪽 인사들이랑 친분이 있다고 하니까, 안전은 저희가 보장한다고 말하면 돼요.”
그룹을 와해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높은 직함을 가지고 평판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관료들의 무리라면 더 쉽다.
“서로 이간질하게 만들면 돼요. 그 사람들끼리 꼬리 자르기 시작하면 성공이에요.”
그들은 우정이나 애정으로 엮인 게 아니라, 철저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꾸며진 그룹이었다. 자신의 신변에 불똥 튀는 게 싫어서 서로 모른 척할 게 뻔했다.
“그러다 잘린 꼬리 중 한 명이 자백이라도 하면 더 좋고.”
“……이런 일에 의외로 익숙하시군요.”
“전생에서 보고 배운 게 좀 있어서요.”
진희가 웃음기 어린 말로 얼버무렸다. 사실 바제트는 이런 계략을 하는 쪽이 아니라 당하는 쪽이긴 했다.
“그렇게 자금줄이랑 뒷배 막으면, 알아서 모습을 드러내겠죠. 걔들도 땅 파서 먹고 사는 건 아닐 테니까.”
테러범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팔다리를 잘라내는 것부터 시작이다.
“누구 다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말아요.”
“네.”
진희의 살벌한 말에 떨떠름한 얼굴을 하던 현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가 현성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쪽에서 먼저 건드리면 별수 없지만.”
“…….”
일행은 차를 타고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짐을 모두 옮기고 나서 현성이 운전대를 잡았다.
“제가 운전할까요?”
“안전 운전하십니까?”
“적당히?”
“…….”
안전운전을 물어볼 때 적당히라고 대답하는 사람에게 운전대를 줄 순 없었다. 현성은 진희가 운전대를 잡는 시늉을 하는 걸 흘겨보았다.
“근데 저분은 무기 없어도 괜찮습니까?”
차가 출발하고, 현성은 백미러로 라이샤를 보며 물었다.
진희는 간략하게 라이샤가 신입 단원이고, 카온처럼 ‘이주민’이라고 설명했었다. 현성은 진희가 데려온 인물이니 실력은 당연히 탁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정작 진희는 라이샤에게 장비를 쥐여 주지 않았다.
“괜찮아요, 가지고 있거든요.”
라이샤는 카사의 축복 덕에 무기를 소환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쓸 수 있다고 했지.’
무기는 좋은데 갑옷이 빈약하다고 축복을 내려줬었다.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쯤 소환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진희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걸릴 것 같아요?”
“반나절은 가야 돼요. 휴게소 들리면 깨울 테니까 자요.”
흘끔 뒤를 보니 랴이샤와 PD는 이미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카온, 안 좁아?”
“괜찮습니다.”
“다리 아프겠네.”
키가 큰 카온이 가운데에 앉다 보니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굽힌 다리가 배까지 올라오는 걸 보고 진희가 말했다.
“자리 바꿔줄까? 아니다, 앞 좌석을 미는 게 낫겠다. 내가 뒤로 가고.”
조수석을 앞으로 쭉 민 다음 뒷자리에 카온을 앉히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맨 처음에 조수석에 카온을 앉히려 했지만, 카온은 묘하게 앞 좌석에 앉는 걸 꺼렸다.
“예?”
“잠깐만, 거기 그대로 앉아 있어 봐.”
마침 신호가 걸려 차가 정지하고 있었을 때, 진희가 조수석에서 뒷좌석으로 넘어갔다.
차 천장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기어서 다가온 진희를 보고 카온의 얼굴이 굳었다.
“옆으로 비켜봐, 응.”
진희는 카온의 위로 올라온 다음, 그를 옆 좌석으로 몰았다. 그리고 조수석의 의자를 앞으로 밀자 카온이 다리를 펼 정도로 자리가 났다.
“자, 이제 편하지?”
“……네.”
카온의 갈색 피부가 조금 붉게 달아올랐다.
“더워?”
“아닙니다.”
그럼 괜찮고. 진희는 가운데 좌석에서 편하게 다리를 꼬고 등을 기대었다.
“조수석에 누구 없어도 되죠?”
신호가 바뀌고 차가 출발했다. 현성은 카온 쪽을 몇 번 바라보며 진희에게 말했다.
“카온 씨를 맨 뒤로 보내고 진희 씨가 조수석에 계속 앉는 게 낫지 않나요?”
“아뇨, 앉아보니까 여기도 편해서 그냥 있을래요. 운전 중이기도 하고.”
“……그래요.”
이후 현성은 말이 없어졌다. 그는 백미러로 카온과 눈이 마주쳤는데, 둘 다 시선을 몇 초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운전 때문에 결국 먼저 시선을 돌린 건 현성 쪽이었다.
진희는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고, 맨 뒤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PD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아수라장이구먼.”
* * *
“누구지?”
진희가 한참 차를 타고 내려가고 있던 시각, 보육원을 찾아온 손님들이 있었다.
마침 아이들과 이선의 수련을 봐주고 있던 서한은 대신 손님을 맞이하러 밖으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가람 보육원 관계자 되시나요?”
“……예.”
찾아온 손님은 정장을 차려입은 다섯 명 정도의 사내들이었다. 그들 중 대표인 듯한 중년의 사내가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서한의 앞으로 걸어왔다.
“저흰 이런 곳에서 나왔습니다.”
명함을 받아보자, ‘전국 사회복지법인 시민 인권 연대’란 이름의 단체명이 보였다.
“가람 보육원의 직원분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하여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누구 제보입니까?”
“예?”
“누구 제보냐고 물었습니다.”
서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사내의 뒤편에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다른 이들을 살펴보았다.
‘B급이 두 명. 이런 시민연대가 어디 있어?’
딱 봐도 누군가 보낸 헌터였다.
진희나 서한, 혹은 현성이 이 보육원에 자리 잡고 있단 걸 눈치챈 단체가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이 연대도 이름만 있는 유령회사일 게 뻔했다.
“흠흠, 이미 구청 허가는 받고 나왔습니다. 익명의 제보자는 당연히 공개가 불가능합니다. 저희가 원하는 건…….”
“내부 사찰입니까?”
“예, 뭐, 그렇습니다.”
가람 보육원은 이름과 후원자만 있는, 모양만 겨우 갖춘 보육원이었다. 직원도 적고 보육원이 갖춰야 할 복지나 지원도 미흡했다.
물론 돈이 많으니 아이들은 풍족했지만, 복지법인으로서 기능을 못 한다는 건 언젠가 걸림돌이 될 문제긴 했다.
‘그걸 트집 잡을 줄은 몰랐지만.’
가람 보육원은 구청에서 먼저 버린 보육원이었다. 신림역을 장악한 조직들의 등쌀에 밀린 구청은 사실상 허울뿐인 기관이었고, 조직이 보육원에 손을 뻗을 때도 조금의 도움도 주지 않았었다.
간혹 소라가 분통을 터뜨리며 그때의 이야기를 하던 걸 기억하던 서한은 기가 찬다는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무너져 가는 보육원 살려줬더니 검열 나오셨단다.
“적반하장이로군.”
“네?”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검열을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크흠, 행정적 처분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직원분과 원장님은 징계 위원회를 열어…….”
“한 번 거절했다고 징계하진 않을 거 아닙니까?”
“예? 그, 그야 규칙상 경고는 총 3번 있긴 합니다만.”
“그럼 다음에 오세요. 오늘은 날이 아니니까.”
서한이 몸을 돌렸다. 경고 한 번쯤이야 받아줄 수 있었다. 지금 보육원엔 최대 후원자인 진희나 정부 관계자인 현성도 없으니, 괜한 분쟁을 만들어서 좋을 일이 없었다.
“어어, 하지만 지금 해야…….”
사내는 서한이 자신을 무시하고 들어가려 하자 안절부절못하며 뒤를 바라보았다. 호위로 위장하고 있던 헌터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왔다.
가장 인상이 사납고 덩치가 큰 사내였다.
“이봐.”
“‘이봐’?”
서한이 걸음을 멈췄다.
“그래, 군말 말고 비켜라. 시간 없으니까.”
“하하.”
마른 웃음을 지은 서한이 고개를 돌렸다. B급인 헌터는 서한의 마력 수준을 알 리 없으니, 그는 서한이 당연히 보육원의 직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는 지금 평범한 운동복을 입고, 헌터 장비조차 차고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왜 너희들 말을 따라줘야 하는데?”
“명함 안 보이냐, 엉? 구청장 명령이라고.”
구청에서 일하는 사람치곤 말투가 험하다. 명함을 건넸던 중년의 사내는 그래도 예의라도 갖추려 노력했지만, 이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부하가 이렇게 연기를 못한다면 학원이라도 보내서 교육시킬 텐데, 서한은 떫은 눈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명령 거부한다고 했다. 돌아가.”
“하, 도련님이 세상 물정 모르시나 본데.”
사내가 잠긴 대문을 힘으로 뜯어버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된 철문이 볼품없이 땅바닥을 굴렀다.
“험한 꼴 당하기 싫으면 그냥 비키라고. 상황 파악 안 돼?”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마력을 개방했다.
역시나 B급 수준이다. 피부가 가려울 정도로 미약한 마력에 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꼭 약한 것들이 마력부터 뽐낸단 말이지.’
마력을 뿜어내는 건 기선제압 말곤 아무런 장점도 없다. 굳이 전투 전에 마력을 소모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상급 헌터는 실력이 모자란 게 틀림없다.
그런 것치곤 진희도 마력으로 상대방 기를 누르는 걸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서한은 그녀는 논외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실력을 뽐내는 게 아니라 남이 겁먹는 걸 보는 게 즐거워서 그러는 것뿐이다.
“애들 있는 곳이다. 입 다물어.”
“하, 이 새끼가 뭘 모르고…….”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일반인이라 생각해서 마력을 담지 않은 평범한 주먹이었지만, 서한은 부드럽게 한 손으로 그의 주먹을 낚아챘다.
그리고 손아귀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어? 아, 아악! 자, 잠깐만!”
“그냥 보내준다니까 꼭 일을 벌여.”
서한이 손아귀에 힘을 주자, 사내의 주먹이 우그러지기 시작했다. 뼈가 튀어나오는 것 같은 아픔에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계속해서 서한의 배를 차며 팔을 빼려 했지만, 서한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우는 소리를 내며 그가 서한에게 빌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 놔줘! 놔줘어!”
“놔 ‘줘’? 아직도?”
“놔주세요! 제발, 제발!”
이미 손가락 두 개가 부러져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서한이 주먹을 놔주자, 사내는 오른손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마력을 가해서 보호했는데도 이 꼴이다. 피 칠갑이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서한과 자신의 실력 차이를 실감한 것이다.
“다, 당신 누구…… 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