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04화
“곧 파티 신청 넣는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응, 한 달 정도 뒤에 넣을 거야.”
“……설마 병아리 기사단이란 이름 계속 쓰실 건 아니죠?”
“아니지.”
“그럼 빨리 정해야겠네요?”
“응.”
“좋아, 청하야 가서 종이 한 장만 가져와 봐.”
“어? 그건 왜?”
“다 모인 김에 작명 시간을 가지게. 언니 분명 따로 생각해 둔 이름 없을걸.”
소라의 예측은 정확했다.
없죠? 하고 묻는 소라에게 진희는 망설임 없이 없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애들은 행동이 빨라서 좋아.”
진희는 식탁을 정리하고 순식간에 기사단 작명 투표를 받기 시작한 소라를 보고 중얼거렸다.
진희에게 의견이 없단 걸 확인한 소라는 곧장 종이에 기사단 이름 후보를 적어가기 시작했다.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다. 가장 많은 의견을 낸 건 청하였지만, 대부분이 너무 유치해서 소라의 손에서 가차 없이 잘려나갔지만, 5개의 후보 중 2가지가 청하가 정한 것이었다.
진희는 자신의 손에 들린 최종 후보 5개를 보고, 하나씩 읽어보았다.
“하늘의 검, 호수의 기사단, 피닉스, 드래곤 나이트, 백금 기사단…… 나쁘지 않네.”
개중에 유치한 게 섞여 있긴 했지만, 모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들이었다.
우선 영어 이름인 드래곤, 피닉스를 먼저 제외한 진희는 낙담하는 청하를 흘끔 바라보고 말했다.
“하늘의 검은 내 이야기(역천검)일 테고, 호수의 기사단은 가람 보육원이라 나온 거지? 가람이 강이란 뜻이니까, 비슷한 걸 찾았구나. 백금은…… 뭐야?”
“언니 검, 마력 휘두르면 금색이 나오잖아요. 그래서 적었어요.”
“아하.”
백금 기사단이란 아이디어는 소라가 낸 듯했다. 진희가 진심을 다할 때 마력이 금색 빛을 낸다는 걸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기사단은 단체를 대표하는 거지, 단장을 광고하는 게 아니었기에 진희는 백금이란 단어도 후보에서 지웠다.
“호수와 하늘의 검이라…… 하늘호수는 별로인가?”
“약해 보여요.”
“발음하기 어려워요.”
자신의 작명이 거절당한 소라와 청하가 볼을 부풀리며 진희의 의견을 거절했다.
자신도 작명에 소질이 없다는 걸 아는 진희는 곤란한 표정으로 펜을 굴렸다.
“귀찮은데 그냥 병아리 기사단 하면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요!”
“알았어, 화내지 마.”
병아리 귀여운데 왜 그러지, 진희는 투덜거리며 카온과 라이샤에게 물었다.
“너흰 뭐 의견 없어?”
“…….”
카온은 물끄러미 종이를 바라보았고, 라이샤는 무슨 뜻인지 몰라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적룡 기사단은…….”
“안 돼.”
“그렇습니까.”
카온의 의견을 진희가 단칼에 잘라냈다.
적룡 기사단이란 이름은 바제트의 가문, 드라노이드 가문의 직속 기사단 이름이었다. 진희는 과거의 흔적을 따라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묘하게 서글픈 눈빛인 카온을 보며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표정을 짓는다 해도 바꿔줄 의향은 없었다.
“라이샤는 뭐 없어?”
“없어.”
“그래.”
라이샤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녀에게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진희가 다시 아이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거절당하자 소라와 청하는 삐졌고, 민혁과 종혁은 둘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희는 생각한 거 있어?”
“저희를 대표하는 이름이어야 한단 거죠?”
“그게 좋겠지. 뜬금없는 건 이상하잖아.”
민혁이 진희의 앞에 있던 종이를 받아가, 펜으로 뭔가를 적었다.
“하늘과 강(가람)의 색도 파란색이니까 ‘파란(波瀾)’이란 이름은 어떨까 싶었어요.”
‘파란’은 잘거나 큰 물결, 그리고 큰 혼란이나 시련을 뜻하는 단어였다.
잔물결이 큰 물결이 되고 거대한 혼란을 야기할 때, ‘파란을 일으켰다’는 표현을 쓸 수 있었다.
여기서 잔물결이란 삼인방이나 청하, 이선처럼 아직 성장 중인 수습 기사 단원을 뜻하고, 큰 물결은 진희처럼 강한 간부들을 뜻한다고 덧붙였다.
진희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민혁을 바라보았고, 소라는 질투심 어린 표정으로 종이를 노려보았다. 분하게도 자신의 아이디어보다 훨씬 괜찮은 이름이었다.
“파란 기사단이라. 나쁘지 않네.”
위엄이 넘치는 이름은 아니지만, 기사단의 평균 연령이 어리다는 걸 생각하면 나름 풋풋한 맛도 느껴지는 좋은 이름이었다.
진희가 만족한 얼굴로 민혁에게 돌려받은 종이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그럼 우린 앞으로 파란 기사단이야.”
* * *
“어머, 식사 이제 끝나셨어요?”
“네, 청소 중이세요?”
소란스럽던 아침 식사가 끝나고, 그릇을 정리하던 중 유아방에서 나오는 지은정과 마주쳤다. 은정은 최근 몰라보게 안색이 좋아졌다.
급여도 착실히 나오고, 아이들도 점점 활기를 되찾으니 이제야 제일을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희는 은정이 들고 있던 아이들 접시를 대신 받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고마워요.”
“고생하셨어요.”
최근엔 은정뿐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생기고 있어 그녀의 일이 예전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녀는 식사 때만큼은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아까 소라 목소리가 들리던데, 무슨 이야기 나누셨어요?”
“아, 파티 이름 정한다고 소란이 있어서요.”
소라가 큰 소리를 낸 건 병아리 기사단은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던 때였다. 진희가 쓰게 웃으며 대답하자 은정도 마주 웃었다.
“소라가 그렇게 활기찬 것도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예전엔 무뚝뚝했나요?”
“부담을 많이 가졌거든요.”
진희가 부엌의 싱크대에 접시를 내려놓았다.
“하긴, 제가 처음 왔을 때도 날이 선 태도긴 했죠.”
“그땐 더 그랬을 거예요.”
싱크대에 물과 세제를 채우며 은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진희가 찾아왔던 그때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기였다.
지금은 아득히 예전 일로 느껴졌지만, 아직도 아이들 마음속엔 그때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이들이 소라를 정말 많이 의지했어요. 과할 정도로요. 그래도 소라는 싫은 티 하나 안 내고, 아이들을 돌봐줬어요.”
은정이 아이들의 부모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소라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솔선수범하던 맏언니였다.
일반 고등학생들처럼 학교가 끝나면 놀고 싶기도 할 텐데, 소라를 포함한 삼인방은 언제나 원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들을 챙기곤 했다.
소라는 은정을 제외하곤 믿을만한 어른이 없는 보육원에서, 자신이 그런 어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힘들었을 텐데, 대견하게도 잘 버텼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그러나 소라가 어른들을 불신하게 된 원인, 까마귀파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까마귀파가 보육원을 점령하고, 그 원인이 박민성이란 걸 알게 된 소라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원망과 자책으로 얼룩진 소라를 껴안고 얼마나 울었던가.
자신이 믿었던 어른이 아이들을 배신했고, 그 원인을 제공한 게 자신이란 사실에 소라는 망가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어른으로서 아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노력했다.
진희가 오기 직전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이들을 위해 돈을 벌어왔다고 했다.
“그래도 진희 씨가 오고 나서 소라가 편안해진 게 보여서 다행이에요.”
진희가 오고 나선 평범한 고등학생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어른인 척을 그만해도 되니까, 자신보다 더 믿음직한 어른이 자신들을 지켜준다는 확신이 있기에 변한 것이라고 은정은 말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박민성 그 사람만 없었더라면…….”
소라의 고등학교 생활이 망가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괜찮아요, 이제 소라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고마워요.”
위로가 섞인 진희의 말에 은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고생한 만큼 앞으론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이들을 정말 자식처럼 생각하는 은정에게 진희는 걱정 말라는 듯 웃었다.
* * *
한밤중, 정재민은 서울 외곽의 인적 드문 주택가에 도착했다.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는 이곳은 저 멀리 시내의 야경과 대비되는 어둠이 구석구석을 좀먹고 있었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었네.”
한국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고 하지만,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지고 있다는 것 또한 옳은 말이었다.
헌터로 인해 호황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외면받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였다.
마석과 던전의 자원으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졌지만, 그만큼 구시대적인 일자리가 사라진 반동이었다.
물론 그런 사회와 정세에 조금도 관심 없는 정재민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택가에 들어섰다. 정재민은 이런 동네에 사는 주민들을 노력 안 해서 도태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여긴가?”
휴대폰으로 지도를 확인하던 정재민이 한 고시원 앞에서 멈춰 섰다. 다 허물어져 가는 고시원이었지만 내부에 보이는 불들은 사람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했던 사람인데요.”
그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1층의 카운터로 걸어갔다. 작은 창문이 달린 카운터엔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어, 어어. 그, 그 양반이구먼.”
더듬거리는 노인에게 정재민이 주머니에서 종이봉투 하나를 꺼내 정중하게 내밀었다.
“고, 고마워.”
종이봉투 안에 적지 않은 현금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한 노인이 정재민의 마음이 바뀔세라 허겁지겁 책상에서 열쇠를 꺼내 그에게 주었다.
“그 처, 청년이 있는 곳은 201호야. 파스 냄새가 많이 나니까 찾기 쉬워.”
“네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마지막까지 웃음으로 대답한 정재민은 열쇠를 받고 돌아서자마자 표정을 되돌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하네.’
작정하고 숨은 박민성 같은 수배자를 찾는 건 짧아도 1~2주일이 걸리는 귀찮은 작업이었다. 그의 지인들을 조사하고 마지막 금융거래 흔적을 역추적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러던 정재민에게 한 익명의 정보상이 접근했다.
박민성의 정보를 찾기 위해 헌터 웹사이트를 뒤지던 중, 정체 모를 정보상의 이메일이 도착한 것이다.
적은 금액으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정보상에게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돈을 송금했는데, 정재민과 스카우터가 놀랄 정도로 확실한 정보가 그들에게 도착했다.
익명의 정보상은 거래가 끝난 후 연락이 두절되었기에 정체를 특정할 순 없었지만, 정재민은 그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박민성에 대해 궁금할 걸 미리 알기라도 한 것 같았지.’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이틀 사이에 수배자의 정보를 모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우선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게 먼저다.
정재민은 201호의 문에 열쇠를 넣고 돌렸다.
“누, 누구야.”
끼익, 흠집이 난 얇은 철문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코를 파고드는 끔찍한 악취에 정재민이 인상을 찌푸렸다.
온갖 약과 파스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 칸짜리 작은 방에서 누워 있던 사내가 허겁지겁 옷을 걸쳐 입고 정재민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상의를 벗고 약을 바르던 중으로 보였다.
“네가 박민성이지?”
“……!”
사내, 박민성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