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101화
표정에 어린 집착과 달리, 정재민은 순순히 이선에게서 떨어졌다. 그는 조악한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들어 올렸다. 너에게 손대지 않겠다는 뉘앙스였지만, 이 자리의 누구도 그걸 믿지 않았다.
“어차피 행선지도 어딘지 알 것 같고.”
그는 유나와 이선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먼저 연락할게.”
“…….”
“연락처는 없지만,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알겠으니까.”
정재민은 이선의 대답을 듣지 않고 돌아섰다.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다음에 보자고 말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갔다.
“……저거 순 싸이코 아냐?”
자기 할 말만 끝내고 사라지는 정재민을 보고 유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청하는 동감했지만,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어진 이선을 보며 유나를 말렸다.
* * *
사태가 일단락되고, 청하와 유나, 그리고 이선은 공원을 빠져나왔다. 공원 바깥 주차장에서 청하의 옷을 털어준 유나가 이선에게 질문했다.
“음, 우선 고마워요. 청하를 도와줘서.”
청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진희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진희가 호출한 후에 나오기 귀찮아 방구석을 뒹굴던 게 떠올라, 유나는 진심으로 이선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의 스승 조혜수가 진희를 전적으로 도우라 말한 이후, 유나는 뜻하지 않게 진희 일행과 함께 있는 날이 늘었다.
“……아닙니다.”
자신도 청하에게, 정확히는 청하의 스승인 진희에게 바라던 것이 있던 이선은 유나의 감사에 고개를 저었다.
유나를 따라서 청하도 고맙다며 허리를 숙였고, 이선은 곤란한 표정으로 청하를 말렸다.
“근데 아까 그 싸이코랑은 무슨 사이예요?”
“유나 누나.”
거침없이 질문하는 유나를 보고 청하가 당황했지만, 정작 이선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전 애인이에요. 그리고 선임이고요.”
“와우.”
생각보다 인상적인 관계에 유나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울리지 않게 과장 섞인 리액션을 보이는 유나를 보고 이선이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엑스에 입사했을 때, 직속 선임이었어요. 파티장이고, 저처럼 탱커라서 배울 게 많았죠.”
“……안 좋게 헤어지셨나 봐요?”
청하가 조심스럽게 묻자 이선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하여간 난 퇴사했고, 죽을 때까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우연이란 게 참 대단하네.”
“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됐다니까. 나도 사심이 있어서 도운 거야.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거든.”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이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그 사심이란 게 뭔데요?”
“……사실 저는.”
아직 진희가 도착하진 않았지만, 이선은 천천히 자신의 용건을 청하와 유나에게 이야기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관문급인 C급에 머물러 있다는 이야기와, 진희가 마치 C급의 문턱 정도야 가볍게 넘을 수 있다는 듯 말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자신도 B급이 되고 싶지만 도저히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진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단 것이었다.
“으음.”
확실히 사심 가득한 행동이긴 했다. 고작 대화 하나 때문에 따라왔다는 것도 얼토당토않았지만, 설령 진희에게 그런 비결이 있다고 해도 쉽게 알려줄 리 없기 때문이다.
B급이 되는 비결이나 수련 방법이라니, 그런 걸 초면에 알려 주는 헌터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이란 건 압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부탁을 들어준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지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선은 애써 뒷말을 삼켰다.
자신이 먼저 도움을 주었지만, 동시에 도와주기도 한 은인에게 꺼낼 말은 아니었다. 동정을 베푸는 걸 마치 강요하는 듯한 뉘앙스였으니까.
“진희 씨야, 들어는 줄 것 같긴 한데요.”
유나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본인은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진희는 생각보다 친절하고, 무례하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남이라고 해도 예의를 갖춰 다가온다면 사정 정도는 들어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는 건, 그녀가 전투에 돌입했을 때 보인 모습 때문이었다. 검을 든 진희는 잔인했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난폭했으니까.
유나가 흘끔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뭔가 생각에 빠진 듯,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나 호흡법…….”
청하가 떠올린 건, 처음 청하와 삼인방의 재능을 일깨워준 호흡법이었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이 호흡법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주변 마나를 일정 농도로 유지하고, 명상과 호흡을 통해 마력회로를 일깨운다는 위험천만한 수련 방식이다.
농도를 조금만 달리해도 중독증이 올 수도 있는 방법이었지만, 진희와 카온이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기에 가능했던 방법.
‘하지만 그게 헌터에게도 통하나?’
재능이 없는 아이들이기에 가능했던 수련 방법이었다. 마나를 느끼게 해주고, 체내의 마나홀을 만들어주는 과정일 뿐, 마나홀과 마력회로를 진화시키는 수련 방법은 아니었다.
만일 가능하다고 해도 이걸 진희가 가르쳐 주리란 확신도 없었다. 다른 것엔 관대한 진희였지만, 유일하게 언급을 금지한 게 마나 호흡법이었다.
“그 진희라는 분과 자리만 마련해 주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청하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이선이 말했다. 구해줬다고 해서 아이에게 은혜를 갚으라 할 생각은 없었다.
그 각오 어린 모습에 유나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진희 씨도 곧 나올 테고…….”
지금은 PD의 방송이 끊긴 상태라 진희가 어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유나는 진희가 당연히 등대를 돌파하고 나오리라 생각했다. 수 초 만에 층들을 돌파하는 걸 보며 그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그녀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저녁이 된 공원에 진희가 나타났다.
어째서인지 곁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는 PD와, 정체불명의 백발 여성을 등에 업은 채였다.
* * *
진희는 우선 라이샤를 카온에게 맡겼다. 이름을 말하자마자 기절해 버린 그녀를 보고 카온은 ‘게이트로 넘어온 탓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자신도 겪은 적이 있었던 카온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라이샤에 대한 어떠한 질문도 없었다. 진희가 ‘새 단원 데려왔어’란 말을 하자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희가 지나가듯이.
“쟤가 어디서 왔는지 안 궁금해?”
하고 묻자 카온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해 주시면 그때 듣겠습니다.”
용인들이란 참 우직하단 말이야, 진희는 혀를 찼다.
이선과 청하, 유나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아직 안 왔나?”
“서한 아저씨랑 밥 먹고 온대요.”
“웬일이래.”
소라가 서한을 싫어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 소라가 서한과 함께 밥을 먹는다니 상상이 잘 가지 않았던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무슨 용무라고 했죠?”
“……후임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미 이동 중에 서로 소개는 끝난 참이었다. 진희의 질문에 이선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저는 C급에서 5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혹시 B급이 될 수 있는 수련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신다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요즘 세상에 목숨 운운하는 사람은 카온 이후로 처음 봤다. 진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이선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제가 왜 알려줘야 하죠?”
“없다곤 말씀하시지 않는군요.”
이선의 눈에 희망이 어렸다. 진희의 말은 B급으로 올라갈 방법이 있다고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희는 부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한계를 돌파하는 방법이야 서너 개쯤 알고 있었다. 위험부담이 크기에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뭐라도 하겠습니다. 하인이라도 될 수 있습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요?”
이선의 집착을 이해하지 못한 유나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인생까지 바쳐가며 강함을 추구하는 이선을 이상한 듯 바라보았다.
현대의 헌터에게 있어 무력이란 명예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일 뿐, 인생의 목적이 되는 일은 없었다.
C급에 머무른 그녀의 처지가 딱하긴 했지만, 자신이 만약 C급이라면 억울하더라도 현실에 순응해 살아갈 것 같았다.
“강해지고 싶으니까요.”
“아니, C급이라도 충분히 먹고사는 건…….”
“그만해, 유나야.”
진희가 유나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이선을 바라보았다.
‘진희’로선 이해가 안 됐지만, ‘바제트’로선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한계 이상의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씩 망가진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인간 군상은 전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대부분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뭔가를 잃었거나, 콤플렉스가 생길 법한 사건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안전을 추구하는 현대 헌터 중에선 쉽게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들 잠깐 나가 있어 봐.”
호기심이 들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헌터란 어떤 사람일지. 진희는 유나와 청하를 나가게 만들고, 이선과 단둘이 대화를 나누려 했다.
청하는 나가기 직전 이선에게 힘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청하와 사이가 좋네요.”
“……착한 아이더군요.”
청하는 초등학생 주제에 괴물같이 강했지만, 성격만큼은 순수한 아이였다. 진희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신을 B급으로 만들 수는 있어요.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신경 안 쓰죠?”
“물론이에요.”
드디어 희망이 생겼다. 이선의 눈에 기대의 빛이 감돌았다. 진희는 턱을 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공짜는 아니에요. 저도 받을 건 받을 거니까.”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그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진희의 얼굴엔 호기심과 흥미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이 B급에 집착하는 이유를 듣고 싶어요.”
* * *
“경력이 화려하네.”
진희가 이선의 자기소개를 들을 때쯤,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서한은 진희에게서 ‘김이선’에 대해 아는 게 있냐는 문자를 받았었다.
소라와의 대화에 대해 한참 생각하고 있던 서한은 김이선이란 헌터의 정보를 찾기 위해 금강의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보았다.
금강의 스카우터들이 정리해놓은 유망주 카테고리에 이선의 이름이 있었다.
“5년 동안 드나들었던 기업 수만 4개, 그중 고정 파티는 10개…… 박쥐군.”
어디서나 그렇지만 박쥐란 비유는 좋은 말이 아니었다. 헌터들에게 박쥐란 표현은 파티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이득을 취하는 이들을 빗대는 말이었다.
대개 길잡이들이 이런 단어로 표현되곤 한다. 길잡이들 대부분이 파티나 기업에 애정, 충성심을 가지지 않아 떠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선처럼 전사, 그것도 탱커가 이렇게 파티를 옮겨 다니는 일은 드물었다.
“업적도 나쁘지 않은데.”
5년 경력의 헌터는 베테랑으로 취급받는데, 이선은 베테랑 중에서도 업적이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종류의 던전을 드나든 경험을 따지면 B급 언저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