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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100화 (100/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100화

청하가 사내에게 보이지 않도록 송곳을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청하의 능력을 사용한 투척은 일반적인 투척보다 훨씬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적어도 사내의 수준에서 막을 속도는 아니다.

‘찌른다면…….’

목을 찌르면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청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직 각오가 되지 않았다.

‘다리를 찌르자.’

경고의 의미로는 그걸로 충분했다. 사내가 발을 들고, 청하가 송곳을 던지려던 그 순간.

“그만해.”

누군가가 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청하가 순간 모습을 놓칠 정도로 빠르고 부드럽게 치고 들어온 그 사람은 사내의 다리를 밀어냈다. 발길질이 막힌 사내가 어정쩡한 자세로 물러났다.

“넌 또 뭐야?”

“…….”

싸움에 끼어든 이는 대답하지 않고 한숨만 푹 내쉴 뿐이었다.

“누, 누구세요?”

슬슬 마비가 풀리고 있던 청하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청하의 질문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말하기도 부끄러운지 볼을 붉히며 청하의 시선을 피했다.

“지, 지나가는 사람.”

‘저 대답이 뭐가 부끄러운 거지.’

청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크흠, 작게 헛기침하곤 청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설 수 있어?”

“아, 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일어서자 그녀가 한숨을 쉬며 청하를 부축했다.

“뭐 하는 새끼야, 너?”

“지엑스랑은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그들을 보며 사내가 다시 시비를 걸어왔다. 그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선 나가자.”

“야, 내 말 안 들려!”

청하가 쓰러뜨린 사내들도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계속 엮이면 일만 커질 걸 알기에, 청하는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사내는 소리만 지를 뿐 다가오지 않았다. 청하가 자신들보다 강하다는 걸 알고 있을뿐더러, 여성의 실력도 자신으로선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욕을 지껄이며 화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선배님이 오실 테니까!”

자기들만으론 해결 못 하니 이젠 사람까지 부르나, 청하가 한심하단 눈길로 사내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지질하단 건 인식하고 있는지, 사내의 얼굴은 부끄러움과 분노로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찰나, 골목의 입구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와우, 이게 누구야. 이선이 아니야?”

“……제길.”

선배라는 작자가 너무 빨리 도착했다.

청하를 부축하던 여성, 김이선이 짜증 어린 눈으로 자신을 가로막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 만이야,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어. 그렇지?”

지엑스의 A급 헌터이자, 과거 자신이 다녔던 파티의 단장.

불량스러운 자세로 서서 이선을 바라보고 있는 정재민이 웃었다.

* * *

김이선은 C급에서 무려 5년을 머물렀다. 헌터로 활동한 게 고등학생 무렵이니, 20대 초반까지 내내 수련에 매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들이 한창 노는 나이다, 인생을 즐길 때라며 충고할 때도 그녀는 오로지 수련과 던전 탐험만 거듭했다.

강해지는 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수련할수록 뚜렷하게 강해지는 마력과 힘에 도취된 그녀는 배움에 목말랐다.

기업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가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헌터에게는 선임이 존재한다. 던전에 대해 알려주거나 수련의 매뉴얼, 마력의 사용 방법을 가르치는 선임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다.

A급이 될 싹이 보이는 신입은 대부분 기업 혹은 선임이 존재했고, 그런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선임을 구하곤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선임이 필요한 건 대부분 C급, 관문급 헌터들이다.

기업에 취직하면 도와주긴 하지만, 그것도 1~2년 동안 싹이 보이지 않으면 기업에서 포기하는 일이 잦았다.

기업의 입장에선 헌터가 B급이 되면 가히 복권이 당첨된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 B급 이상의 헌터를 고작 C급의 교육에 남용한 셈이 된다.

장래가 없으면 도와주지 않는다. 철저한 이해관계라고 볼 수 있었다.

이선도 그런 C급 중 하나였다. B급이 되기 위해서 선임, 스승을 구하려 온갖 기업을 드나들었다. 지엑스는 그중 가장 최근에 들어갔던 기업으로, 반년간 다니다 그만두었다.

이유는 바로 눈앞에 있는 사내, 정재민 때문이었다.

“세상에, 우리 귀여운 막내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달려와 봤더니, 이런 우연이 있나.”

마침 정재민은 이 근처에서 볼일을 보던 중이었다. 영입할 만한 인재가 나타났다며 지원을 바란다는 문자를 보고, 소일거리 삼아 공원으로 들어왔다.

괜찮은 인재라면 협박해서 연락처를 받아낼 셈이었다. C급 내지는 D급의 떨거지들에게 맡길 순 없는 일이었기에, 상급의 헌터들에게 간혹 지원을 보낼 때가 있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을 받아들였는데, 구면인 사람을 만나 정재민은 반가운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잘 지냈어? 그렇게 나가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

이선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운이 나쁜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반년 전 자신을 담당했던 선임이 직접 행차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재민은 친근한 손길로 이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간 거야? 응? 내가 그렇게 잘 해줬는데.”

“……아닙니다.”

“너무 겁먹었다. 괜찮아- 네가 말도 없이 사표 쓰고 나갔다 해서 화난 거 아니야.”

예상외의 사태에 정재민을 부른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저, 저기, 선배님?”

“왜?”

“그, 저희를 방해한 게 그쪽…….”

“보면 알아. 너희 실력으로 이선이를 이길 리도 없고.”

사내를 아예 무시하고 고개를 돌린 정재민이 다시금 미소를 띠고 이선을 바라보았다.

“뭐, PD 방송에서 대단한 신인이 등장했다는데, 난 그거엔 큰 관심 없어. 오히려 이선이가 더 중요하지. 나랑 저쪽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간다면 가는 거야.”

“…….”

이선의 안색은 더욱 나빠졌다. 마비가 다 풀린 청하가 이선의 앞으로 나섰다.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니, 꼬맹아?”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곤경에 빠졌다. 청하는 고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희도 볼 일이 있어서 그런데, 지나갈게요. 비켜주세요.”

“아하하.”

정재민이 짐짓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는 소름 끼치는 얼굴에 청하가 멈칫했다.

“재밌는 꼬맹이네.”

“……헉!”

정재민의 마력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 그간 진희나 서한, 현성을 봐왔기에 과소평가하고 있었지만, A급의 마력은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진득하게 들러붙는 정재민의 마력은 청하의 숨통을 조였다. 살기 어린 마력에 식은땀이 흐르고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청하가 떨리는 팔을 붙잡고 정재민을 노려보았다.

“눈빛 좋네.”

하지만 고작 아이의 눈빛에 겁먹을 리 없었다. 정재민은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으로 마력을 더 짙게 뿜어냈다.

목을 조여오던 마력이 이젠 온몸을 찍어 누를 것처럼 강렬해졌다. 청하는 물론이고 이선마저도 무릎을 꿇을 것 같았던 마력은.

“어?”

갑자기 사라졌다.

마치 바람이 악취를 날려 버리듯, 골목을 채웠던 마력이 순식간에 밀려 나갔다.

마력을 밀어버린 건 또 다른 마력, 그러나 정재민의 그것처럼 살기 어린 것이 아닌 청량한 마력이었다.

“초등학생을 상대로 뭐 하는 짓이야?”

“유, 유나 누나.”

“대체 뭔 상황이야, 이게?”

그곳엔 헌터 길드의 소속이자, 정령사인 김유나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재민이 유나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뭐야. 길드가 여기서 왜 또 튀어나와?”

“그건 몰라도 되고요, 아저씨. 애들이나 풀어주시죠?”

“나 몰라? 지엑스의 정재민인데. 만난 적 있잖아?”

“몰라요. 전 관심 있거나 잘생긴 사람 아니면 기억 못 하거든요.”

유나는 졸린 눈매를 비비며 청하의 손목을 잡았다. 동시에 그의 곁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이선도 붙잡았다.

“가자. 졸려 죽겠네.”

“어, 어떻게 여기 온 거예요?”

“나 이 주변이 집이거든. 진희 씨가 자기 던전 들어간다고, 너 좀 돌봐달라길래.”

겉으로는 잘 해보라고 말하고 갔으면서, 진희는 만에 하나 청하가 위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유나를 호출했다.

“뭐, 어차피 너희 집 가려고 했었으니까. 잘됐네. 가서 민혁이를 좀…….”

“누가 가라고 했지?”

골목을 나가려던 일행의 앞을 다시 정재민이 막았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쁜 듯, 처음의 밝은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이선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고, 그 모습을 본 유나가 혀를 찼다.

‘청하랑 관계된 일은 아닌가 보네.’

“가고 싶어서 간다는데, 왜요?”

“아니, 우리 이선이는 가고 싶지 않을걸? 그 꼬맹이와도 할 말은 많지만, 우선 이선이를 잡고 있는 손부터 놔.”

유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정재민을 바라보았다.

“시력에 이상 있으세요? 이게 어떻게 당신이랑 붙어 있고 싶은 걸로 보여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껄이지…….”

“딱 봐도 스토커에 겁먹은 애 같은데.”

“…….”

정적이 찾아왔다. 이선은 헉하고 숨을 들이켰고, 정재민은 입을 꾹 닫고 유나를 노려보았다. 무표정하지만 온갖 적의가 담긴 그의 눈동자를 보며 유나가 쯔쯔, 혀를 찼다.

“역시 내가 한 눈썰미 하지.”

“누, 누나.”

눈치 없긴 둘째가라면 서러운 유나의 자신만만한 중얼거림에 청하가 식은땀을 흘렸다.

“하여간, 이런 광경 보고 그냥 지나칠 순 없죠. 아저씨도 갈 길 가세요. 괜히 어린애한테 작업 걸고 수갑 차지 마시고요.”

“……길드 주제에 너무 나대는데. 길드장 믿고 그러나?”

길드장이란 단어에 유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저씨는 그 별 볼 일 없는 지엑스 간판 믿고 그러나요?”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이름만 남은 길드보다는 낫지. 아직도 인원 충당 안 돼서 힘들다며?”

기업의 요직에 있는 사람이나 정부 소속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길드에 있던 헌터들이 다른 부서나, 기업으로 영입당해 인원 부족이란 건.

기업과 정부, 복잡한 정치 사안에 끼어든 후폭풍이었다. 덕분에 길드에 남아 있는 제대로 된 전력은 유나와 그녀의 스승 조혜수뿐이었다.

유나가 기분 나쁘다는 듯 입술을 깨물자, 통쾌한 얼굴로 정재민이 이선의 손목을 잡아채려 했다.

“싫습니다.”

하지만 이선이 정재민의 손을 뿌리쳤다. 명백한 거절 표시에 정재민의 눈이 크게 떠졌다. 거절하리라곤 조금도 생각을 못 한 건지, 얼굴에 충격이 감돌았다.

“제가 볼일이 있는 건 이쪽입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세요.”

“……너, 지금.”

“전 이미 지엑스를 퇴사했습니다. 정재민 씨의 명령을 들을 이유도 없고요.”

정재민의 눈에 점점 분노가 어렸다.

“근데 저 사람들 무슨 관계래?”

“저,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나가 작은 목소리로 청하에게 물었다. 청하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유나의 질문에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정재민은 한참 동안 이선을 노려보았다. 마주 바라보고 있던 이선이 먼저 시선을 피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좋아, 볼 일이 있다면 별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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