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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99화 (99/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99화

자신의 욕심으로 묶어두었던 아이의 삶을 풀어줄 때가 되었다.

마음 같아선, 평생을 이 작은 등대 안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등대의 벽에 가로막혀 서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라이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지만 그녀도 이 무의미한 시간이 라이샤에게 독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이곳에서 라이샤는 성장할 수도, 무언가를 배울 수도 없다. 그저 카사와 함께했던 과거를 끝없이 회상하며 지낼 뿐이다.

더 이상 잡아두어선 안 된다.

“저 아이는 네 희망이 될 거야.”

“……저 사람이?”

미심쩍은 목소리로 라이샤가 되물었다. 카사가 쿡쿡 웃으며 라이샤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마력의 충돌 때문에 불타는 손가락이 고통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널 잘 이해해 줄 아이니까.”

“믿어도 돼?”

“응, 믿어도 돼.”

이제 시간이 되었다. 어느새 반쯤 녹아 없어진 천장을 바라보며 카사가 말했다.

“라이샤, 약속해 줄 수 있니?”

“살아남을 것?”

“잘 기억하고 있구나.”

카사는 라이샤의 뺨에 사라져 가는 손가락을 올렸다. 부드러운 라이샤의 하얀 뺨엔 홍조가 올라와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라이샤를 카사가 다독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아남을 것. 네 목숨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카사를 언제까지나 사랑할 것.”

“맞아. 우리 아가, 이제 걱정 없네.”

카사의 흐릿해진 몸을 보며 결국 라이샤가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럼에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카사를 바라보았다. 한순간이라도 카사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슬픔을 감추는 눈빛에 카사가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잘 해낼 수 있어.”

“……잘 해낼 수 있어.”

“행복해지는 거야.”

“행복해질게.”

세상 모든 이에게 미움받을 운명을 타고난 소녀. 학대와 폭력으로 죽을 운명의 소녀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버린 타락한 신.

둘의 기나긴 사랑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잘 가렴.”

카사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라이샤를 놓아주었다.

동시에 온몸을 휘감는 카사의 기적에 라이샤가 눈을 감았다. 아늑한 그녀의 품속에서 라이샤는 몇십 년 만에 처음으로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선물을 줄게.”

카사는 라이샤를 진희에게 맡겼다. 자신보다 신장이 큰 라이샤였지만, 어렵지 않게 그녀를 안았다.

잠에 빠진 라이샤의 얼굴은 호전적이었던 전투 때완 사뭇 달랐다.

“보아하니 무기는 좋은 걸 쓰지만 다른 장비가 실력을 못 따라가는 것 같아. 내가 보태줄게.”

“뭘 해주려고?”

“방어구야.”

카사는 정체불명의 주문을 외웠다. 인간의 발음으론 따라 할 수 없는 소리를 빠르게 외운 그녀가 진희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 위를 어루만졌다.

신성력이 진희의 몸을 감쌌다.

“만약 네가 갑옷이 필요할 때가 온다면 어깨에 마력을 집중해 보렴. 너의 검 못지않은 괜찮은 갑옷이 널 지켜줄 거란다.”

신으로서의 힘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 갑옷 하나 마련해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라며 카사가 어깨를 펴며 자랑했다.

“……라이샤를 잘 부탁해.”

“응.”

“나쁜 아이는 아니야. 말이 좀 없지만, 수줍어서 그래.”

“응.”

“고기 요리를 좋아해, 여유 되면 꼭 해줘.”

“그래.”

“미워하지 말아줘. 상처를 잘 받으니까.”

“카사.”

진희는 처음으로 신의 이름을 불렀다.

카사는 울고 있었다.

“걱정 마.”

“……고마워.”

카사와 라이샤의 관계가 얼마나 깊은지, 진희는 알지 못했다. 카사에게 어떤 음모가 있는지도, 라이샤가 위험한 인물인지도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나름 손익을 따진 거래이기도 했지만, 이건 한순간의 동정이나 다름없었다.

서한이 있었다면 여기서 제안을 거절했을 테고, 현성이라면 안전하다 판단이 설 때까지 보류를 선택했겠지.

자신의 변덕임을 알고 있음에도, 진희는 카사에게 약속했다.

“난 내 사람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주는 착한 단장이거든.”

“……응.”

가벼운 말이지만 믿음직한 약속이었다.

등대와 세상이 무너지는 가운데, 카사는 손을 흔들어 일행을 배웅했다.

한 세상의 신에겐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인간을 사랑한 인간에겐 애틋한 결말이었다.

* * *

게이트가 닫히고, 어느새 저녁이 되어버린 공원에 진희와 PD가 돌아왔다.

잠에 빠져 있던 라이샤가 눈을 떴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진희를 응시했다.

자신의 팔에 얌전히 안겨 있던 라이샤를 보며 진희가 물었다.

“이름은?”

“라이샤.”

“뜻은?”

“사랑받는 사람.”

아름다운 이름이네. 진희는 라이샤에게 방긋 웃어 보였다.

“난 서진희. 잘 부탁해.”

라이샤는 그렇게 첫 신입 단원이 되었다.

20. 처리하지 못한 잔재

자신을 둘러싼 사내들을 보며 청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청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하, 이 새끼 한숨 쉬네.”

“우리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냐, 너?”

“아뇨.”

그럼 한숨 쉬지 말고 혀나 찰까요? 하고, 진희라면 했을 법한 농담을 꾹 삼키며 청하가 볼을 긁적였다.

“네 보호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사람 잘못 건드렸어.”

“우린 지엑스 기업 소속이다.”

실력으로 안 되니까 이젠 백으로 승부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청하는 아이답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요점이 뭐예요?”

“네 보호자 데려와. 이야기 좀 해보게.”

“무슨 이야기요?”

“꼬맹이는 몰라도 된다. 건방지게 끼어들지 말고, 데려와. 네 보호자에게도 좋은 이야기니까.”

사내들의 눈엔 저질스러운 욕망이 가득했다.

지엑스(GX)라면 국내에서 대기업 부류에 들어가는 헌터 기업이다. 금강과 브리온이란 압도적인 기업이 있어서 인지도가 낮긴 하지만, A급을 다수 보유하여 매년 성장하고 있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좋은 소문이 들리는 기업은 아니었다.

‘강압적인 영입으로 유명했어.’

중소기업에 있던 헌터를 헤드헌팅하기 위해 해당 기업에 불이익을 주거나, 악성 루머를 유포하여 헌터들의 몸값을 깎은 다음 영입하는 등, 인터넷에서 온갖 좋지 않은 소문이 도는 기업이었다.

하지만 소문이 아무리 퍼져봐야, 헌터 기업처럼 무력과 자본 둘 다 갖춘 기업이 손해를 입을 리 만무하다.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지엑스는 꾸준히 대기업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지엑스의 말단 헌터가 A급 이상으로 보이는 진희를 부르는 이유야 뻔했다.

‘영입하려는 거야.’

청하가 사나운 눈초리로 사내들을 쏘아보았다.

“싫어요.”

“뭐?”

“싫다고 했어요. 돌아가세요. 저희 누나, 아저씨들이랑 안 만나요.”

청하의 단호한 말에 사내들이 비웃음을 날렸다.

“좋은 이야기라니까, 야, 꼬맹아. 형들이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네 누나 믿고 나대는 거냐? 네 누나 여기 없어.”

“형 아니고 아저씨들이잖아요. 그리고 없어도 돼요. 아저씨들 정도는 제가 이길 수 있으니까.”

말했다. 청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진희는 청하의 실력을 믿고 있었다. 그래서 팔씨름 때도 시합에 나가보라 말했던 것이고, 이번에도 잘해 보라고 은근히 말하고 던전에 들어간 것이다.

실력을 가늠하는 진희의 눈썰미는 지극히 객관적이다.

“이 새끼가 진짜…….”

사내 중 한 명이 눈을 부릅뜨며 다가왔다.

청하는 침착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신장은 190에 이르는 장신이다. 성장기라 키가 컸다 해도 160이 안 되는 청하로선 아득한 키였다.

하지만 전투에서 신장의 차이는 곧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진희가 말했다.

‘양옆이 벽으로 막힌 골목. 2명 이상 달려들 수 없는 좁은 길.’

청하는 차분히 주변 지형을 살피고 자세를 잡았다.

“하, 애새끼가 별걸 다 하네.”

사내들은 팔씨름 시합에서 봤던 청하의 힘을 그저 마력으로 밀어붙인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무식하게 마력만 때려 박으면 이기는 게 힘 싸움이기 때문이다.

마력에선 지지만 싸움은 이길 수 있다는 막연한 예상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상대하는 싸움은 사내들보다 청하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매일매일 삼인방과 진희, 카온과 대련하던 청하였다.

청하는 자신의 작은 신장과 마력을 어떻게 이용해야 좋을지 잘 알고 있었다.

사내가 오른손을 들었다. 주먹을 쥐고 청하의 머리를 후려칠 기세였다.

으름장이 아니다. 일반인이 맞았다면 단숨에 쓰러질 만큼의 마력이 담긴 주먹이었다.

청하는 차분히 사내를 노려보다, 주먹을 휘두르는 즉시 몸을 숙였다.

“어?”

바닥을 긁듯이 달려 주먹을 피한 청하를 보며 사내는 얼빠진 목소리로 입을 벌렸다.

그리고 자신의 명치를 향해 날아오는 청하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

“컥!”

명치를 파고드는 묵직한 공격에 사내가 기침을 토해냈다. 어린아이의 작은 주먹이었지만 담겨 있는 힘은 볼링공을 연상케 했다.

“뭐야!”

다른 사내가 다가오려 했지만, 이미 청하는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그대로 벽을 박차고 점프한 청하가 몸을 돌려 다음 사내의 얼굴을 걷어찼다.

사내는 가드를 들어 공격을 막았다.

‘잡았다.’

바닥으로 추락하기 직전, 청하는 그대로 사내의 멱살을 틀어잡고 바닥으로 끌어 내렸다. 비틀거렸던 사내는 청하의 체중이 실린 멱살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청하를 골목으로 이끈 사내들은 총 세 명. 이 사내만 쓰러뜨리면, 남은 사내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다.

청하가 주먹을 들고 사내를 기절시키기 위해 공격하려 했다.

“나대지 마라, 이 새끼야!”

그때 반대쪽에서 상황을 보던 남은 사내가 주머니에서 작은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에 마력을 집중하고 청하를 가리키니, 정체불명의 녹색 빛이 막대기 끝에서 뿜어져 나왔다.

이미 피하기엔 늦었다. 아차 싶었던 청하가 재빨리 고개를 빼려 했지만, 이미 빠른 속도로 날아온 녹색 빛이 청하의 가슴을 강타했다.

‘아티팩트!’

청하는 손발이 마비되어가는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C급 헌터가 사용할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다. 아티팩트를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방심을 탓하며 청하가 가드를 올렸다.

“이익!”

사내의 발길질이 청하를 후려쳤다. 마력을 쓸 수 없는 청하는 사내의 발에 힘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나마 팔로 막긴 했지만, 마력이 마비된 지금 반항할 수단이 없었다. 사내는 분노와 희열이 담긴 비웃음을 지었고, 바닥을 구르던 청하는 차분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끝을 날카롭게 갈아놓은 송곳들이 손에 잡혔다.

‘능력을 사용할까?’

이능력은 마력과 상관없이 발동시킬 수 있다. 바깥에선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했지만, 그런 걸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후우, 후우. 이 건방진 자식이.”

사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가왔다. 아티팩트는 일회용이었는지 버린 그는 다시 한번 발을 당겼다. 아직 일어나지 못한 청하를 또다시 차버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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