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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98화 (9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98화

“성벽이 무너진 세상이란 곧 신의 손을 떠난 세상이나 마찬가지야. 운명이 없기에 기적이 사라지고, 법칙이 섞여 혼란을 가져오지. 그런 불안전한 세상은 다른 세상의 성벽 아래에 먹히거나, 혹은 소멸해. 신도 함께.”

“그럼 당신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건데?”

“우리 아가가 지켜준 덕분이지.”

이 등대는 던전으로 보이지만, 사실 카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사원(寺院)이었다.

빛을 발하는 등은 카사의 신격이 증발하지 않도록 봉인하는 장비였으며, 1~4층까지 나온 몬스터들은 모두 침입자들을 퇴출시키기 위한 환상이었다고 덧붙였다.

“잠깐, 그럼 왜 게이트를 열어둔 거야? 애당초 아무도 못 들어오게 게이트를 닫고 있으면 되잖아.”

“아하, 아직 모르는구나. 성벽이 사라진 세계는 무조건 게이트를 열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폐쇄된 공간에서 서서히 말라 죽어버리거든.”

“말라 죽어?”

“일종의 환기 같은 거야. 공기가 없으면 인간이 죽듯이, 마나와 운명도 순환되지 않으면 세상은 소멸되어 버려. 고인 물을 빼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해도 좋아.”

카사가 말해준 게이트를 열어야 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던 진희가 되물었다.

“그럼 게이트 너머의 세상은, 모두 성벽이 무너진 세상인 거야? 우리 세상엔 수많은 게이트가 있어.”

“으음, 모두 그렇지는 않아. 우연으로 열려 버린 게이트도 존재할 테고, 누군가의 의도로 열린 게이트도 있겠지.”

누군가의 의도로 열린 게이트. 그 말에 진희가 눈매를 좁혔다.

“만약 게이트를 여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사람의 의도는 뭘까?”

“글쎄, 세상의 멸망 아닐까?”

헉, 하고 PD가 숨을 삼켰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어버린 기분이었다.

카사는 진희를 보며 ‘궁금한 게 많았구나’ 하고 웃었다.

“성벽이 높고 완성도 있는 세상일수록 게이트 탄생과 같은 이변은 일어나지 않아. 완벽한 세상은 곧 다른 세상과 단절된 세상을 의미하거든. 하지만 한번 물꼬를 트면 성벽에 금이 가는 것도 순식간이지. 만약 게이트를 억지로 열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너희 세상의 성벽을 무너뜨리려 한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네.”

“저어, 그럼 게이트가 자연 발생한 게 아니란 이야긴가요?”

PD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하지, 아가야. 그런 부자연스러운 현상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일어나겠니?”

“하지만…….”

뭐라 반박할 말이 없던 PD가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지구의 사람들에게 그만큼 게이트는 당연한 현상이었다.

게이트를 열게 되면 다른 세상과 운명이 뒤섞이며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진희도 최근에야 알 수 있었던 그 정의를 일반인이 눈치챌 리 만무했다.

비과학적인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세상의 운명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흐려 있음을 뜻했다.

카사가 안타까운 웃음을 지었다.

“그쪽 세상도 큰일이구나.”

“……당신네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게이트가 열렸어?”

진희의 물음에 카사가 고개를 돌려 백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아니, 내 세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단다. 이 세상을 무너지게 한 건, 내 잘못이지.”

“당신의 잘못?”

“난 인간의 아이를 사랑해 버렸거든.”

카사는 여성을 만질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시늉으로나마 여성의 턱을 어루만졌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신은 어떤 존재니?”

신. 온갖 신화, 종교에서 부르는 신은 갖가지 모습으로 묘사된다.

동일한 점은 전지전능하고, 감히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실타래를 손에 쥐고 있단 것이다.

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진희는 침묵했고, PD는 조심스럽게 소신을 밝혔다.

“모든 걸 알지만,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존재요.”

“후후, 날카롭구나.”

자신을 무서워하면서도 거침없이 이야기한 PD를 보며 카사가 유쾌하게 웃었다.

“맞는 말이지. 신이란 인간을 돕는 일이 없어. 그 이유는 간단하단다.”

“……운명이니까.”

“그래, 운명은 따라야만 하니까.”

진희의 추임새에 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조차 운명은 거스를 수 없어. 운명을 거스른다는 이야기는 곧 세상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무너뜨린다는 이야기니까.”

운명이란 곧 성벽이고, 성벽이란 세상을 유지해 주는 주체다.

세상을 완벽하게 세울 의무가 있는 신은 운명을 거스르지 못한다.

“신이 운명을 만드는 게 아니었나요?”

“설마. 신은 그렇게 능동적인 존재가 아니야.”

따지자면 신은 자연이고, 별이며, 하늘과 대지였다. 완벽한 신일수록 자아(自我)가 없다. 그래야만 정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태양이 오늘 쉬고 싶다고 안 뜨면 어떻게 될까? 바다가 날이 춥다고 몸을 따뜻하게 만들면? 대지가 하품하고 싶다고 지진을 일으킨다면? 안 되겠지? 신도 똑같단다. 생각, 욕망, 고민, 모든 걸 벗어버린 존재만이 신으로서의 자격이 있는 거야. 운명에 절대적으로 순응하는 거지.”

“하지만 당신은…….”

꼭 인간 같은걸요. PD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고, 카사는 이해했다.

“난 이 아가를 위해, 운명을 망가뜨렸어.”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

운명에 따라 그저 지켜만 봐야 함에도, 그녀는 사랑하고 말았다.

“아가는 죽을 운명이었단다.”

어떻게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가 태어날 때부터 사랑해 왔고, 그녀의 운명을 보고 세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사랑하는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운명을 망가뜨린 결과는 세상의 멸망으로 나타났다.

그게 바르그가 여성을 보고 ‘성벽을 부순 영혼’이라고 뜻한 이유였다.

진희가 본의 아니게 성벽을 부수게 된 것처럼, 그녀 또한 세상을 멸망시킨 원인이 되고 말았다.

언뜻 듣기엔 로맨틱한 이야기였지만, 고작 한 아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세상을 멸망시킨 신의 이야기란 선뜻 공감 가지 않았다. PD는 복잡한 눈빛으로 백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멸망해 버리면 지켜도 의미가 없지 않아?”

그러나 PD와 달리 진희는 냉정했다.

인간을 사랑한 신이 세상을 멸망시켰다는 이야기의 결말은 아무리 봐도 해피 엔딩이 아니었다. 세상이 멸망한다면 결국 사랑하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아니, 의미가 있어. 죽어야 하는 운명을 완벽히 뒤바꿀 존재가 나타났으니까.”

그렇기에 귀인(貴人)이라 불렀다. 길고 긴 기다림 속에서 내 보물을 맡아줄 사람을 드디어 찾게 되었다.

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사의 다리는 이미 형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바르그를 만났던 그 던전의 정령 왕처럼, 신이 소멸하고 있었다.

“너의 궁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줬다고 생각하는데, 내 부탁도 들어줄 수 있겠니?”

“들어보고.”

“후후, 우리 아가를 맡아주지 않겠어?”

“Karsa.”

“괜찮아, 착한 사람이야.”

백발의 여성이 카사에게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카사는 고개를 흔들며 제지했다.

“이곳은 날 지키는 곳이기도 하지만, 자격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한 시험 장소이기도 했단다. 아가를 맡아줄 사람을 찾기 위한 시험이지.”

멸망한 세계에서 오랜 세월을 버틴 이유는 오직 그녀 때문이었다.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운명을 뒤바꿀 정도로 강한 존재를 찾아야만 했다. 진희는 모든 조건을 완벽히 통과하는 인물이었다.

성벽을 무너뜨린 전적이 있으며, 주변 사람들의 운명을 손에 쥘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성품 또한 모자라지 않다.

“날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냐?”

“어머, 신의 눈을 무시하는 거니?”

아무리 곧 소멸한다고 해도 신의 눈은 틀리지 않는다. 카사의 웃음에 진희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떻게 하려고?”

“별수 없구나. 그럼 나도, 아가도 이 세상에서 쓸쓸히 죽어갈 테지. 네가 날 지켜주는 등까지 파괴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니?”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고작 그런 말에 양심이 찔릴 진희가 아니었다.

“내가 이득 보는 게 뭔데? 말도 안 통하는 아이를 맡아달라고?”

“그건 걱정 마렴. 언어 정도야 내 재량으로 배우게 할게.”

“먹이고 재우는 게 쉬운 줄 알아?”

“그 값만큼의 현물도 줄 수 있단다. 무려 신이 하사하신 성물이야.”

“돌봐줘야 하는 기간은 언제까지인데?”

“아가가 죽을 운명을 피할 때까지.”

이게 무슨 양육권 쟁탈전도 아니고, 흘러가는 대화의 양상이 묘했다. PD는 흘끔 여성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아직도 애타는 눈빛으로 카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나한테 맡길 생각이구나?”

“후후.”

신의 말씀치곤 쪼잔하다. 진희의 말에 카사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하얗던 천장이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네게도 큰 힘이 될 거야. 아가는 아직 성장 중이거든.”

그건 동감하는 바였다. 그 야생적인 몸놀림을 생각하면, 체계적인 검술을 배우게 된 후엔 어디까지 성장할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날 따를 거란 보장도 없잖아.”

“널 따르게 될 거야. 너희 둘은 서로 잘 맞아. 내가 장담할게.”

무슨 사주 보는 점쟁이도 아니고, 근거 없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하지만 신의 말씀이라 생각하니 마냥 우습게 볼 수도 없는 게 문제였다.

“날 따라온다고 해서 안전하리란 보장은 없는데, 괜찮겠어?”

“그야 물론이지.”

“내가 막 부려 먹을 건데?”

“얼마든지 부려 먹으렴.”

“최저 시급도 안 줘도 돼?”

“어…… 밥은 먹여줄 거지?”

농담이야, 진희가 웃으며 백발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좋아, 나도 손이 필요하기도 했으니까. 고용해 줄게.”

“후후, 고마워.”

“그런데 당사자하고는 이야기가 된 거야?”

여성은 아무리 봐도 카사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였다. 카사가 고개를 돌려 여성에게 다가갔다.

진희는 서로에게 다가서는 둘을 보며 몸을 돌렸다.

“왜요?”

“안 보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의외로 섬세하시네요.”

“이제 알았어?”

네이네이, PD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카사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발끝에서 시작한 붕괴가 점점 올라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카사가 낮은 목소리로 여성을 불렀다.

“이제 나갈 시간이 됐어.”

“…….”

“긴 시간 날 지켜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네가 살길 바란단다, 라이샤.”

“카사.”

카사는 백발의 여성, 라이샤를 품에 안았다. 불가사의한 힘이 그들을 방해하는 건지, 둘의 피부가 닿자마자 거센 마력의 충돌이 일기 시작했다.

“잘 가, 나의 등대지기. 나의 아가. 내 하나뿐인 사랑.”

라이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카사, 나는…….”

라이샤의 인생은 오로지 카사를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자신을 돌봐준 은인이었고,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 준 연인이었다.

카사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등대에서 홀로 지내왔지만 한 번도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이 없었다.

카사를 위해서라면 수천 년의 세월도 버틸 것이라 다짐했다.

“이제 네 인생을 살아도 된단다.”

“카사를 두고 가고 싶지 않아.”

“두고 가는 게 아니야. 그저 헤어질 때가 온 것뿐이야.”

카사가 라이샤와 똑같은 외모로 강림한 것은,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한 탓이었다.

내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 무엇보다도 소중한 아이. 카사는 점점 사라져 가는 자신의 몸을 느끼며,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 마. 잘할 수 있을 거야.”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의 라이샤.”

카사는 라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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