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97화
드라고소드의 검술은 용인들이 사용할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기술이다. 패도적이지만 후유증이 크고, 뒤를 생각하지 않은 돌진에 힘을 준 탓에 강력한 만큼 불안전하다.
그걸 재정립한 게 바제트였다.
좀 더 인간에 맞게, 그러나 야생성이 살아 있도록 재단한 검술이 백발의 여성 못지않은 거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윽!”
“이제 한마디 했네.”
여성의 신장은 진희보다 조금 더 컸다. 하단에서 박차고 나온 진희가 여성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말 좀 해줄래?”
“……!”
“말할 기분이 아닌가 보네.”
진희가 가벼운 걸음으로 여성의 발차기를 회피하며 눈을 빛냈다.
“그럼 말할 기분이 들 때까지 춤춰 볼까.”
진희도 막 싸움이라면 빠지지 않는다.
바르그는 여성이 성벽에 관련된 인물이라고 했으니, 굳이 죽이고 싶지 않았다. 얻어야 할 단서가 너무나 많았다.
-저기, 언어가 달라서 말을 못 하는 거 아닐까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PD의 소심한 충고를 새겨들으며 진희가 여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메라를 끄라고 했지만, PD는 차마 그러지 못했다. 물론 당사자가 방송에 내보내지 말라 했으니 이걸 인터넷에 올릴 생각은 없었다.
그럼에도 녹화를 진행한 건, 이 싸움을 그저 구경만 하자니 너무 아까운 탓이었다.
짐승 두 마리가 싸우고 있다.
분명 둘이 들고 있는 건 검이고, 옷차림도 짐승에 비유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 평범했다.
한 명은 백색의 튜닉을, 다른 한 명은 청바지에 셔츠란 단순한 옷차림이었다.
특이한 건 검뿐이었다. 검은색 검 위에 검붉은 마력을 두르고 검을 휘두르는 백발의 여성과 성스러워 보이는 은빛 검에 번개가 번쩍이는 진희.
둘의 싸움은 마치 신화에 등장하는 신수(神獸) 두 마리가 서로를 물어뜯는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그 와중에 대단한 건, 진희는 단 하나의 상처도 없이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둘의 싸움은 언뜻 호각처럼 보이지만, 상처 입고 있는 건 오직 백발의 여성 쪽이었다. 마구잡이로 싸우고 있음에도 진희는 한 번도 유효타를 허용하지 않았다.
상처 하나라도 났다면 바로 퇴출당했을 테지.
진짜 클리어할지도 모른다. PD는 헌터들과 시청자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도 잊고 싸움에 집중했다.
“으음.”
진희가 뒤로 물러나며 검을 털었다. 검 끝에 맺혀 있던 피가 하얀색 바닥에 흩뿌려졌다. 인간의 피다. 앞서 봤던 몬스터들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지도 않았고, 이지를 상실한 눈빛을 가진 것도 아니다.
“강하네.”
그럼에도 여성은 물러나지 않았다. 여성의 몸엔 차근차근 상처가 늘어났다. 잔인하리만큼 얕은 상처를 지속적으로 노리는 진희의 검에 분노를 표하거나 항복을 떠올릴 만도 한데, 여성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처음과 똑같은 움직임으로 대처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이지만, 아래층의 골렘과 다를 바 없다.
“곤란하네.”
백발의 여성은 당장 죽더라도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진희는 그녀의 목에 검을 들이밀어도 변화가 없으리라 짐작했다.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고 싶은데 방법이 요원하다.
“PD.”
-네, 네?
“저 사람이 왜 등대에 있는 걸까?”
-저도 모르죠?
“그것도 하필이면 등대 맨 꼭대기에 있었어. 등의 빛 앞에서 말이야.”
-네에.
“등대를 지키고 있던 걸까?”
-일반적인 몬스터들의 특징을 생각하면, 그렇겠죠?
“그렇지? 목숨을 걸고 등대를 지키고 있는 거겠지?”
왠지 모르게 불길한 말투다. PD가 대체 왜 그러냐고 묻자, 진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목숨보다 중요한 등대가 부서지는 게, 다치는 것보다 무서울 거야, 그치?”
-어…….
그럴까요? 하고 말하려던 찰나, 진희가 다시 마력을 휘둘렀다. 1층에서 보았던 것처럼 난폭한 번개의 폭풍을 검에 휘감고, 베었다.
목표는 등대의 등이다. 아직까지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던 등을 향해 번개가 쇄도했다.
“Kar-!”
처음으로 여성의 표정이 바뀌었다. 검을 들어 번개를 막으려 했던 그녀는 번개의 방향이 등인 걸 확인하고 다급한 얼굴로 몸을 날렸다.
“막을 줄 알았지롱.”
하지만 그것을 예상하고 있던 진희는 반대 방향으로 또 한 번 번개를 날렸다. 앞선 공격을 막으려 하면 그녀의 뒤편에 날아온 번개가 등을 공격할 것이다.
백발의 여성은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Lien do-!”
마치 드래곤 피어와도 같은 마력의 파동이 그녀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강력한 마력의 사용으로 번개의 궤도는 빗나갔으나, 이미 진희는 검을 들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제 한마디 했네.”
진희의 웃음소리가 여성을 지나쳤다.
늦었다. 여성이 황급히 몸을 돌려 진희를 공격하려 했으나, 한발 앞선 진희는 등을 향해 검을 찔렀다.
“Karsa!”
여성이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카사, 그게 어떤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등 안에 잠자고 있는 어떤 것의 이름이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맙소사.]
그때, 말없이 전투를 돕고 있던 바르그가 중얼거렸다. 바르그는 이 빛이 신성력이 아니라, 신성 그 자체임을 깨달았다.
[주여.]
등이 부서지며 찬란한 빛이 층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지금껏 바르그가 느껴왔던 신성력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을 굽어살필 것 같은 자애로운 빛은, 신(神)의 등장을 의미했다.
바르그는 이것을 신의 빛이라 말했다.
[어째서, 이곳에 신이…….]
“잠깐, 저게 신이라고?”
[그래, 신이다. 세상을 창조한 신. 한 세계를 다스리는 절대자.]
동화 속 유치한 문장처럼, 혹은 성서의 흔한 구절처럼 내리쬐는 빛에서 신이 보였다.
등을 파괴했던 진희도 순간 말을 잃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압도적인 신성력에 넋이 나갈 뻔했다.
두 눈이 멀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던 빛이 사그라들자, 등 안에 잠자고 있던 신이 눈을 떴다.
거대한 등의 가운데에 앉아 있던 신의 외모는 백발의 여성과 똑 닮았다. 단지 색만이 달랐다.
흑발과 적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머.”
그녀는 백발의 여성을 보며 작게 웃었고, 진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마치 인간처럼 입을 가리곤 감탄했다.
“귀인이 날 깨우러 오셨구나.”
바르그 때와 비슷했다. 그녀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음에도, 머릿속에서 말의 뜻이 자동으로 해석되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고개를 조아려야 할 것 같은 신성 앞에서 진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모르겠어? 너의 번개가 알려주었잖니.”
“들으셨습니까?”
“들린단다. 나의 빛 아래 있는 모든 것의 소리를 경청하는 게 내 일이거든.”
그녀가 백발의 여성에게 손짓했다.
“아가야, 정말 날 지키고 있었구나?”
“Karsa.”
백발의 여성이 황급히 달려왔다. 아무래도 신의 이름은 카사인 듯, 그녀는 연신 카사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당장에라도 카사를 껴안고 싶은 얼굴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안아주고 싶지만. 너도 오염되어 버린단다.”
“Karsa.”
“그래, 아가야. 걱정하지 마. 마지막으로 대화할 정도의 기력은 남아 있으니까.”
마지막 대화란 말에 여성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무표정했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다양한 감정이 떠오른 그녀의 얼굴은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아이처럼 보였다.
“그럼 귀인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구나. 내 정체는 잘 알겠니?”
“못 믿겠습니다.”
“존칭은 사용하지 않아도 좋아. 그럴 성격이 아니란 건 짐작하고 있거든.”
“그럴게.”
-이, 이 사람 정말.
상상을 초월한 상황에 말을 잃었던 PD가 진희의 뻔뻔함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너 아직도 보고 있었어?”
-일단 공원의 헌터들 모두 철수시키고 보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 뻔뻔함이 장난 아니네요.
“내가 원래 좀 침착해.”
-그걸 곡해해서 듣다니, 양심도 없고요.
“이런, 손님이 또 있었구나.”
카사가 팔짱을 끼며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불편하게 그런 잡기로 대화 나누지 말고, 같이 하는 게 좋겠어.”
-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 했던 PD였지만, 카사가 손가락을 튕기자 반전된 광경에 입을 떡 벌렸다.
방금 전까지 공원의 구석 스튜디오에서 영상을 보고 있던 그녀가, 단숨에 진희 앞으로 소환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마법적 기술도,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 신이 내린 기적처럼 PD를 소환한 카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구나. 아가야, 너도 그만 앉으렴.”
“…….”
백발의 여성은 진희와 PD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해서 적의를 드러냈지만, 카사의 말에 잠자코 뒤로 물러났다. 여성의 눈빛이 두려웠던 PD가 재빨리 진희의 뒤로 몸을 숨겼다.
“대, 대체 뭔가요. 정말 신이에요? 어떻게, 전 바깥에 있었는데 여기에…….”
“보잘것없는 재주란다, 백아라야. 몰락한 신이라도 작은 인연으로 아이 하나 데려오는 것쯤이야 가능하거든.”
“……제 이름까지.”
PD가 질린 듯한, 두려움이 섞인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눌 이야기란 게 뭐야?”
“다, 당신은 무섭지도 않나요? 던전 안에서 신을 만난 거라고요!”
신인지 몬스터인지 아직 분간이 안 가지만, PD는 뒷말을 애써 삼켰다.
“진짜 신이고, 우릴 미워했다면 만나자마자 죽였겠지.”
“그, 그건…….”
“너무 떨지 마. 지켜줄 테니까.”
“정말요?”
“응, 난 내 사람의 안전은 확실히 보장해 주는 착한 단장이거든.”
아직 당신 사람 될 거라고 답해준 적 없는데요. 진희는 PD의 중얼거림을 무시했다.
“우선 자기소개부터 해볼까? 난 카사, 이 무너진 세계의 주신이란다.”
“서진희. 헌터.”
“사냥꾼이라니, 생각보다 고상하지 않은 직업이구나. 기품을 보고 기사나 장군이 아닐까 했는데.”
“그건 전직(前職).”
“아하.”
이야기의 방향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PD는 한숨을 내쉬며 듣고만 있기로 했다.
“당신이 신이라면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신은 하늘 높은 곳에 있어야 하는 것 아냐?”
“그렇지. 그곳이 하늘 위인지 땅 아래인지는 차치하고, 인간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굽어살피는 건 맞단다. 하지만 난 해당이 없어.”
“왜?”
“내 세상의 성벽이 무너졌거든.”
진희가 눈가를 좁혔다.
“성벽이 무너진 세상의 주신은 그 권위도 같이 무너지게 마련이란다. 너의 늑대도 잘 알고 있을걸?”
[정령 왕이 그랬던 것처럼.]
바르그가 있던 세상의 정령 왕도 성벽이 무너지며 타락했었다. 생존하기 위해 다른 생명의 존재를 먹어치우며 살아가던 그의 모습은 고귀했던 전성기와 달리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