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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96화 (96/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96화

“아, 그리고 브리온사(社)도 주의하라고 말해줘.”

“브리온? 왜죠?”

“뭔가를 꾸미는 건 아닌데…… 하여간 전해줘. 진희도 대충 알아들을 거야.”

브리온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 때문에 주의를 주는 건지 진희도 알아들을 터였다.

클로이. 브리온의 신입 헌터이자 진희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가진 자 중 한 명.

서혁은 클로이에게 어떤 비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전하도록 하죠.”

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혁에겐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진희가 의뢰한 정보는 한 번에 정리가 될 정도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 나중에 진희랑 같이 저녁 먹으러 와. 대접해 줄게.”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성이 찝찝한 얼굴로 서혁에게 고개를 숙이곤, 카페를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서혁이 중얼거렸다.

“쟤도 참 불쌍해. 언제까지 정부에 묶여 있을는지.”

진희의 독선적인 성격 반만 닮았으면 좋으련만, 연장자인 서혁이 보기에 현성은 정의나 신념에 과하게 휘둘리는 경향이 많았다.

마음 가는 대로 삶을 살아봐도 좋을 텐데.

서혁은 능력은 있으나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현성을 안타깝게 보며 중얼거렸다.

* * *

“어때? 난리 났어?”

-네, 아주 많이요.

PD의 목소리엔 묘한 활기가 느껴졌다. 미친 듯이 올라가는 채팅과 시청자 수에 그녀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PD는 미션을 멈추고 진희의 화면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3층의 몬스터는 세 마리의 거대한 괴수였다. 늑대와 사자, 그리고 독수리.

이번에도 진희는 계단을 오르자마자 앞으로 돌진했다. 과연 난이도가 오르긴 했는지, 앞선 골렘과 달리 괴수들은 곧장 진희에게 공격 자세를 취했다.

늑대와 사자는 달려들었고, 독수리는 하늘을 날았다.

하지만 진희는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괴수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우선 하나.”

아가리를 열고 진희를 잡아먹으려 했던 늑대의 목이 떨어졌다.

“둘.”

앞발을 휘두르려던 사자는 가슴팍부터 등까지 쪼개졌다.

“마지막.”

하늘로 올라가려던 독수리는 진희의 검기에 날개를 베인 후, 땅바닥에 추락했다. 비명을 내지르는 독수리의 목을 검으로 쉽게 잘라 버린 진희가 물었다.

“몇 초?”

-5, 5초예요.

“그럼 다음 층은 6초에 끝내야 하려나.”

진희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PD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체가 뭔가요?

“마이크.”

-지금은 껐어요. 이미 생중계 서버 터져서 화면도 안 나오고 있거든요.

“그래도 돼?”

-녹화한 방송을 나중에 틀어주면 그만이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정체가 뭐냐니까요?

“멋진 언니?”

-농담 아니에요. 이 정도 실력의 A급이면 제가 모를 리 없는데…….

A급 된 지 한 달 남짓 되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진희가 말없이 웃기만 하자 PD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진짜…… 당신이라면 꼭대기 층을 클리어할지도 모르겠네요. 다른 A급도 이 정도로 빠른 클리어는 못 했는데.

“꼭대기엔 뭐가 있는데?”

-잘 모르겠어요. 등(燈)이 있는 곳까지 간 사람은 있지만, 그곳에서 영상이 끊겼거든요.

“적이 어떻게 생겼길래?”

-그걸 몰라요. 계단 올라가자마자 퇴장당했어요.

꼭대기까지 올랐던 헌터는 이후 몇 번 더 도전했지만, 단 한 번도 등이 있는 꼭대기를 클리어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진희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꼭대기에 신성력을 쓰는 몬스터가 있는 건가.”

-네?

“아무것도 아니야.”

바르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신성력을 쓰는 몬스터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던전에선 어떤 몬스터가 등장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음은 4층, 나온 몬스터는 작은 골렘들의 군대였다. 가지각색의 갑옷을 걸친 골렘의 군대가 도열하여 진희를 맞이했다.

이건 10초 안에 끝내긴 힘들겠다. 진희는 검에 마력을 둘렀다.

-저 골렘들도 마력을 사용해요. 활을 쓰는 녀석도 있으니까, 주의하셔서…….

PD의 주의 사항을 다 듣기도 전에 진희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방식은 앞서 싸웠을 때와 동일하다. 단지 이번엔 좀 더 많은 마력을 담아 공격할 뿐이었다.

-우와.

그리고 그 단순한 전략은 보기 좋게 통했다. 두부 썰리듯 썰어지기 시작한 골렘들을 보며 PD는 멍하니 감탄을 내뱉었다.

그간 보아왔던 헌터들의 분투가 우스워질 정도로 가벼운 학살극이었다.

-설마 S급은 아니죠?

“글쎄에.”

PD의 질문에 모호하게 대답을 한 진희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층을 가득 채웠던 골렘이 어느새 모두 정리되어 있었다.

“몇 초야?”

-45초예요.

1층처럼 한 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괜히 마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하나하나 처리했더니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다. 늦었네, 하고 중얼거린 진희에게 PD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덧붙였다.

-여기 최고 기록이 12분이에요.

“다 굼벵이들이었나 봐.”

-A급이거든요?

“A급 굼벵이였구나.”

-……이건 편집해야겠다.

이걸 방송에 내보내면 괜한 분쟁이 일어날 게 뻔했다. PD의 말에 진희가 작게 웃었다.

그리고 드디어 아무도 통과한 적 없다는 5층에 도달했다.

계속해서 똑같은 하얀 벽만 보다가 정중앙에 거대한 등을 보니 이곳이 새삼 등대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S급 헌터는 한 명도 온 적 없어?”

-S급이 뭐가 아쉬워서 여기에 와요? 자기 업적 숨기고 활동하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굳이 올 필요 없나.”

-당연하죠. 등대처럼 얻을 게 없는 던전에 왜 S급이 오겠어요? S급은 걸어 다니는 대기업이에요. 팔 한 번 휘두르는 걸로 몇천만 원을 벌어들이는 거물인데, 굳이 올 필요 없죠.

그 거물 중 한 명은 지금 고등학생들 상대하고 있을 텐데.

진희는 뒷말을 삼키며 웃었다. 아무래도 PD는 S급에 과한 환상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던전이 ‘등대’인 줄 안 거야? 5층까지 올라오지 않으면, 등대인 줄 모르겠는데.”

새하얀 벽과 바닥만 보이는 방을 보고 등대라고 판단하긴 어려웠다. 어떻게 이 던전이 완전한 등대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한 진희가, 마지막 계단 하나를 앞두고 서서 PD에게 물었다.

-사실 이 던전을 제보해 주신 분이 있거든요.

“누가?”

-익명이라 잘 모르겠어요. 닉네임도 언네임드였구요. 아, 그 얘긴 덧붙였었네요.

“어떤 얘기?”

진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귀중한 성벽의 잔해니까, 많이 도전했음 좋겠다든가.

“……뭐?”

여기서 또 성벽 이야기가 나와?

진희가 되물으려 했지만, 이미 그녀의 몸은 5층에 다다른 직후였다.

그녀가 5층에 오르자마자, 등의 빛이 그녀를 향해 켜졌다.

“뭐야?”

진희는 저도 모르게 등을 피해서 몸을 날렸다. 옆으로 구르듯 피한 그녀는, 등의 빛을 눈속임 삼아 달려온 한 인영을 발견했다.

“……사람?”

진희가 피할 걸 예상 못 했는지, 진희가 서 있던 장소에 엉거주춤하게 멈춘 인영이 고개를 들었다.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백발과 푸른 눈동자가 인상적인 인영은,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백색의 튜닉을 입고 있었다.

마치 그림의 한 장면 같다.

새하얀 벽과 마찬가지로 하얀 등, 그 빛을 등지고 있는 백발의 여성.

단발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여성이 진희를 바라보았다. 진희마저도 순간 말을 잃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은, 이 세상 유일한 검은색의 도신의 검을 들었다.

온다.

진희는 직감하고 뒤로 점프했다.

-누, 누굽니까?

“몰라, 잠깐 입 다물고 있어.”

말하면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진희는 단숨에 자신에게 파고드는 백발의 여성에게 검을 마주 들며 말했다.

지금껏 진희가 상대했던 ‘인간’ 중 가장 빠르고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서한과 현성도 이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을 하진 못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언데드 상태인 바제트보다 조금 못한 수준이다.

‘바르그.’

바르그에게 번개를 꺼내게 만든 진희는 곧장 검을 찔러 넣었다.

백발의 여성은 고개를 기울이는 것으로 부드럽게 검을 피한 후, 역으로 검을 휘둘러 들어왔다.

[조심해라.]

“말 걸지……!”

마!

진희는 여성의 검을 검 손잡이로 받아내며 곧장 왼 주먹을 날렸다. 여성은 가드를 들고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충격이 적잖은 듯 뒤로 밀려 나갔다.

[너와 같다.]

“뭐가!”

-누, 누구랑 대화 중이에요, 당신?

[성벽을 부순 자다.]

진희와 영혼의 색이 같단 이야기다.

“그놈의 성벽, 그냥 골판지 같은 거 아냐?”

그게 아니고서야 성벽 부쉈다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발견되나. 진희가 혀를 차며 다시 한번 번개를 흩뿌렸다.

백발의 여성은 검에 마력을 휘감아 번개를 튕겨냈다. 정체불명의 검붉은 마력이 불길하게 타올랐다.

‘검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사람은 아니야.’

야생적인 몸놀림이나, 과격한 마력 사용 방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백발의 여성은 진희의 검기처럼 일정한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화염처럼 비정상적인 형태로 검기를 뽑아내고 있었다.

효율적이지 못한 마력의 사용이었지만, 파격적인 마력량 때문에 파괴력은 이미 정도를 넘어섰다.

“저기요, 말 알아들어요?”

진희가 손나팔을 만들고 말을 걸었지만 백발의 여성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시 검을 세우고 달려들어 왔다.

-사, 사람 맞죠?

“맞아.”

가까이 붙었을 때 호흡을 느꼈다.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호흡은 그녀가 인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 사람이 왜 던전에 있는 건데요?

“나도 몰라!”

네가 모르는 걸 내가 알겠냐! 진희가 이를 악물고 공격을 막아냈다.

검술이랄 게 없으니 몸놀림 자체는 단순했지만, 저 검붉은 마력의 파괴력이 문제였다. 바르그의 번개가 함께하니 밀리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상처 하나만 나면 퇴출당하는 던전의 룰이었다.

저 일렁이는 불길 같은 마력에 한 번이라도 닿는 순간, 진희는 패배한 셈이 된다.

‘페널티 너무하네, 정말이지.’

앞선 몬스터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골렘들의 군대가 성가신 정도였다면, 5층의 난이도는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이었다.

“카메라 잠깐 꺼줄래?”

-네?

“이건 방송하면 안 될 거 같아.”

자신은 상관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뭐라 할 게 뻔했다. 특히 서한이나, 현성이나, 카온이.

진희는 검을 수평으로 들고 자세를 낮췄다.

짐승 같은 몸놀림을 제압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나도 짐승처럼 몰아치면 그만이다.

드라고소드(Dragosword) 이 보(second step) 앞 베기 물어뜯기.

마치 드래곤이 목을 내밀어 사람을 물어뜯는 것처럼 난폭한 검술을 휘두르며, 진희가 백발의 여성에게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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