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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95화 (95/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95화

“그건 상관없어요. 진희 언니는 매력적이니까. 현성 오빠랑 서로 경쟁을 하든 말든, 별 감흥 없어요. 언니가 그런 유치한 싸움에 넘어갈 사람도 아니고.”

문젠 그게 아니라고 소라는 덧붙였다.

“언니를 대하는 태도가 싫어서 그래요. 언니는 저희에겐 부모님이나 다름없어요. 은정 선생님처럼. 저희를 구해줬고, 기회도 줬는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분이니까.”

소라가 햄버거를 들고 오는 민혁과 종혁을 흘끔 보고 말을 이었다.

“현성 오빠는 언니에게 존대 쓰죠? 언니가 현성 오빠한테 존대하니까 그러는 거예요. 하지만 아저씨는요?”

“…….”

“말투뿐만이 아니에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아저씨는 언니가 곁에 있는 걸 당연하다는 것처럼 행동하잖아요. 진희 언니는 아저씨 물건이 아니에요. 부하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죠. 아저씨는 분명 첫 만남 때부터 언니한테 재수 없단 소리 들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맞다. 싸가지 없게 굴었다가 진희에게 양아치란 말까지 들었었다.

아저씨의 거리감이 마음에 안 들어요. 소라는 종혁에게 햄버거를 받으며 말을 끝냈다.

“좋아한다면 더 존중해 줬음 좋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존중 못 받는 모습을 보기 싫었다.

단순하고도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 * *

완전한 등대.

입장하자마자 거대한 로비에서 시작하는 이 던전은 한 층을 클리어해야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던전이다.

PD가 이 던전을 중계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도전자에게 핀 마이크와 소형화된 카메라를 주고, 싸우는 화면을 바깥에서 중계하는 것이다.

“이게 통신이 돼?”

“생긴 건 전자 제품 같지만, 아티팩트예요. 딜레이가 좀 있지만 영상을 송출하는 마법이 달려 있거든요.”

PD는 마법과 과학의 하이브리드 장비라며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가격 또한 일반 카메라, 마이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가의 장비라고 한다.

“뭐, 등대처럼 작은 던전에만 사용할 수 있어서 활용성은 꽝이지만요.”

진희는 마이크를 착용하고 게이트 앞에 섰다.

“이제 날 중계하는 거야?”

“제 방송은 분할 화면으로 진행돼요. 당신이 들어가면 전 다시 사람들을 데리고 미션을 진행해야죠. 물론 상황 발생할 때마다 중계는 할 거예요.”

시청자들은 공원에서 진행되는 미션과, 등대 안에서의 진희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인터넷 방송치곤 치밀한 구성이었다.

“주의 사항 같은 거 있어?”

“없어요.”

어차피 조금이라도 다치는 순간 탈락하는 던전이다. 위험한 요소는 없었다.

“그럼 기대하고 있어. 클리어하고 올 테니까.”

“카메라로 지켜는 봐줄게요.”

던전을 통과할 거라곤 티끌만큼도 기대하지 않는 PD에게 진희가 웃어 보였다.

“내 제안 잘 생각하고 있어.”

“네- 네.”

대충 대답하는 PD를 뒤로하고, 진희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다.

“와, 넓네.”

1층은 새하얀 광장이 인상적이었다. 아무런 장식품도 없는 새하얀 벽과 바닥 때문에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선 느낌이었다.

전등이 없는데 사위가 밝았고, 창문 하나 없어 지독한 폐쇄감이 특징인 장소였다.

-들리세요?

“아, 들려.”

카메라 쪽에서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잡음이 섞이긴 했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시면 바로 시작돼요. 나타난 몬스터들을 모두 처치하는 게 각 층의 미션이고요. 몬스터가 나오는 순간 시간을 재기 시작할 거예요. 층마다 타임 어택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빨리 클리어하면 뭘 줘?”

-일주일 동안 제 채널 최상위에 영상을 올려줘요.

별거 없구나, 진희가 아쉽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행운을 빌게요.

통신이 끊겼다.

진희는 검을 꺼내 들고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특별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바르그. 일어나 봐.’

[으음.]

검을 꺼내 들며 바르그를 깨웠다. 이게 잠의 정령인지 번개의 정령인지 모르겠다며 진희가 툴툴거리자, 바르그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어. 나라고 자고 싶어 자는 게 아니야. 아직 불안정해서 그래.]

‘언제 안정되는데?’

[몰라.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야?]

‘던전.’

진희가 자신의 상황을 짧게 전달했다.

[등대라…… 혹시 이 등대의 꼭대기에 어떤 이가 있는지 알아?]

‘아무도 끝까지 가본 적이 없대.’

[흐음…….]

‘왜?’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묘하게 신성력이 느껴져. 아주 미약하긴 하지만.]

일단 올라가 보면 알겠지, 바르그는 그 말을 끝으로 검에 번개의 마력을 담았다. 진희가 자신을 깨운 이유 정도야 알고 있었다.

[출력은?]

‘반 정도면 되겠지.’

바르그의 번개에 진희가 마력을 담았다.

청하가 말하길, 1층 타임 어택은 최고 기록이 1분 30초였다고 한다.

진희가 한 걸음 내딛자, 바닥이 울리며 아무것도 없던 광장에 별안간 몬스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모습은 가지각색, 리자드맨부터 오크, 고블린 등 잡다한 인간형 몬스터 수십 마리가 진희를 노려보았다.

소환된 몬스터 특유의 이지를 상실한 눈빛이었다.

지금부터 1초. 이제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한다.

“으랏차!”

진희는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중단 베기. 하지만 검에 담겨 있는 마력은 심상치 않다.

바르그의 번개는 진희와 상성이 좋았다. 불안정하지만 순간 출력이 어마어마하고, 파괴력은 다른 정령들의 마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력하다.

작정하고 검기와 번개를 조합한다면, 이 등대의 광장을 번개로 가득 채우는 것쯤 일도 아니다.

쾅-!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새하얀 번개가 모든 몬스터를 일도양단했다.

몬스터들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고, 진희에게 덤벼들 여유도 없었다.

-……어?

카메라에서 다시 PD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이쪽 화면을 보고 있었는지, 진희의 검이 지나간 자리를 보며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클리어 시간…… 3초?

“자, 다음 층으로 가볼까?”

몬스터들의 시체는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사라졌다. 전리품을 얻을 수 없다는 게 이런 뜻이구나.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린 진희는 광장 중앙에 생긴 계단을 향해 나아갔다.

-자, 잠깐만요. 지금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못 봤어?”

-아뇨, 보긴, 보긴 했는데. 대체 그게…….

“잘못 본 거 아니야.”

계단을 올라가며 진희는 웃었다.

“왜 이렇게 당황해? 방송해야지, PD님.”

이렇게 대단한 배우를 앞에 두고 초보처럼 버벅거리면 안 되지.

“오늘부로 당신 채널 대문엔 내 얼굴만 보이게 될 텐데, 홍보할 문구나 생각해 둬.”

* * *

“난리 났네.”

방송을 보고 있던 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 속 생방송에선 진희의 콧노래까지 들리고 있었다. 1층 몬스터들을 단숨에 학살하는 장면은 카메라에 확실히 잡혔다.

단지 너무 빨리 지나간 데다, 검기라고 볼 수 없는 은빛 번개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마법이다, 아티팩트다 하며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개중엔 진희의 실력을 폄하하는 사람도 많았다.

[당연히 아티팩트발이지. 주문도 안 외웠는데 저런 번개가 나오겠냐? 딱 봐도 검이 아티팩트임.]

[이젠 관심 모으려고 비싼 무기까지 들고 오나 보네.]

[어디 돈 많은 집 아가씨인가 보지.]

현성은 새삼 이 채팅을 진희가 볼 수 없단 사실에 안도했다.

“우리 딸 강하긴 무지 강했네.”

같은 방송을 보고 있던 서혁이 허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저게 전력이 아니야?”

“전력으로 했으면 몬스터가 양단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났을걸요.”

진희의 파괴력은 같이 싸워왔던 현성이 잘 알았다.

“당신도 저렇게 가능해?”

“가능은 하지만, 3초 만에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주술사인 현성은 주문을 외우고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파괴력은 보장하지만, 진희처럼 빠른 공격은 불가능했다.

물론 검을 쓰는 주제에 어지간한 마법보다 높은 파괴력을 내는 진희가 반칙인 것도 한몫했다.

“채팅도 난리네.”

채팅에선 진희의 실력이 진짜냐 아니냐는 갑론을박이 치열했다.

그러나 진희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채팅은, 2층의 기록을 본 후에 모두 멈췄다.

[클리어 기록…… 4초.]

2층의 보스는 거대한 골렘이었다. 계단을 올라가자마자 골렘을 발견한 진희는 단숨에 땅을 박차 올라 골렘의 머리 위에 안착, 주먹으로 골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녀의 주먹에 단단한 머리가 박살이 났고, 마력석까지 파괴된 골렘은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고 땅에 쓰러졌다.

무기조차 사용하지 않고, 수많은 헌터를 좌절시켰던 골렘을 맨손으로 패 죽였다.

그제야 채팅창의 사람들은 진희가 A급 아니냐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하라니까…….”

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영상 사이트의 대문에 어떤 영상이 헤드라인을 차지할지는 안 봐도 예상이 갔다.

“저기.”

“네?”

“다음 주에 진희가 집에 온다길래 저녁밥 해주려고 했는데, 그때 삼겹살 참나물 튀김이랑 초콜릿 버팔로윙 해주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 안 하는 게 좋겠지?”

“현명한 선택이시군요.”

골렘 뚝배기처럼 당신 뚝배기가 날아갈지도 모릅니다.

현성은 뒷말을 꾹 삼켰다. 하기야 자기 아빠한테 그럴 리는 없겠지 싶었다.

“음, 부엌에서 음식 만들 때 간혹 등줄기가 오싹하던데, 진희였으려나.”

“…….”

‘……그런 짓 안 하겠지?’

설마하는 눈길로 서혁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쟤는 알아서 할 테니까 놔두고. 이게 말했던 자료야. 진희랑 당신이 말했던 상부 쪽 사람들 재산 상황, 그리고 이주민 관리 보고서.”

“감사합니다.”

서혁에게서 USB를 받으며 현성이 감사를 표했다.

“앞선 자료야 그러려니 하는데, 뒤에 건 왜 필요한 거야? 이주민에 대해선 당신이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관리하는 부서가 다르니까요.”

현성은 헌터들에 대한 정보만을 열람할 수 있었다. 이주민에 대해선 그의 권한 바깥의 일이었다. 서혁이 그래?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네, 그거 작성자가 헌터 관리 본부 소속이던데.”

“……그렇군요.”

예상하긴 했다. 이주민이 의무적으로 국가 소속 헌터가 된다는 건 그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그렇게 국가 소속 헌터가 된 이주민의 정보를 그가 얻을 수 없단 것이다.

누군가가 방위대에서 정보를 열람할 수 없게 막고 있다.

헌터에 대한 정보를 수정할 권리가 있으면서도 방위대가 아닌 집단.

헌터 관리 본부일 게 뻔했다.

“이만큼 썩어 있을 줄이야.”

현성이 쓰게 웃었다. 시야를 바꿔보니 새삼 깨달았다. 그간 자신이 몸담아 있던 조직이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

“이주민 보고서 중에 이상하거나 아귀가 안 맞는 정보들은 내가 따로 체크해 뒀어. 한번 확인해 보고, 진희한테도 전해줘.”

“알겠습니다.”

현성이 USB를 주머니에 넣었다.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았다. 방위대 일이 줄어든 대신 다른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조직에 들키지 않고서 상부의 비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첩보의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캐내야 할 대상이 너무나도 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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