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94화
진희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PD의 마력, 근력은 우수했다. B급 최상위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PD의 마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방송만 하는 괴짜인 줄 알았더니, 손을 맞잡아 보고 그녀가 신체 수련도 부지런히 하는 사람임을 알았다.
팔의 근육, 자세, 마력을 사용하는 센스 모두 탁월했다. 진희가 청하에게 알려주었던 팔씨름을 이기기 위한 마력 사용법의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신이 더 대단하네요.”
PD는 허탈한 듯 중얼거렸다.
“조- 금도 움직이지 않는군요.”
주변 관객들은 탁자 위의 두 팔이 미동도 안 하는 이유를 둘의 실력이 동일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실력이 비슷하더라도 작은 차이가 있다면, 팔이 조금이라도 흔들렸어야 한다. 단 1㎝도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진희가 PD를 봐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PD의 입장에선 거대한 바위를 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PD는 분명 전력을 다했지만, 진희는 압도적인 힘으로 맞서 PD의 팔을 정지시켰다.
고작해야 팔씨름 싸움이었지만, PD는 진희의 실력이 자신을 훨씬 웃돌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냥 이기시면 되는데.”
PD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로 자신에게 승리해 던전 입장권을 획득하면 그만이다. 왜 굳이 버티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신 제법 괜찮네.”
“네?”
“혹시 이거 방송 나가고 있어?”
“마이크는 껐어요. 혹시 몰라서.”
수많은 시청자는 지금 PD와 진희가 치열한 시합을 벌이고 있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PD의 말에 진희가 그럼 다행이네, 하며 말을 이었다.
“손아귀 굳은살 보니까, 활을 다뤘나 봐? 견착하는 어깨 힘도 괜찮으니까, 총도 다뤄봤던 것 같고. PD라면서 방금 전까지 던전 돌던 헌터 같네.”
“눈썰미 참- 좋으시네요.”
“맞아. 그 눈썰미로 괜찮은 사람들을 찾고 있지.”
진희가 팔을 당겼다. 아주 약간 힘을 주는 것만으로 PD의 팔이 밀려 나갔다. 약 반 뼘 정도 밀고 나서, 다시 팔을 정지시켰다.
“무슨 소리죠?”
“난 동료가 필요해.”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진희는 방긋 웃었다.
“네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거든.”
진희의 눈은 상냥하게 접혔지만, 눈동자는 PD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차가웠다. PD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탁자에서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빠지지 않았다. 진희가 꽉 잡은 손은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았다.
“……농담 그만하고, 이겼으니 일어나시죠.”
“난 농담 잘 안 해.”
아까 청하와 이야기할 때, 진희는 자신의 정보력에 이런저런 고민을 했었다. 지금은 서혁이나 현성의 정보에 기대고 있는 처치였다.
자신만을 위한 정보통이 필요했다. 정보력뿐 아니라 언론과 세태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인물이 갖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나타난 게 PD였다.
인터넷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가진 방송인이자 B급의 실력자.
‘PD란 사람, 어떤 사람이에요?’
그때 마침 전화가 온 현성에게 물었다.
현성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진희는 생각했다.
“네가 내 동료가 되어줬음 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진희가 팔을 한 번 더 당겼다. 이번엔 한 뼘가량 내려간 팔. 이미 반쯤 기운 자신의 팔을 보며 PD가 한숨을 내쉬었다.
“초면인데,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럼 정중하게 어떻게 물어봐 줄까?”
“우선 이 손 좀 놓고 말하죠.”
“안 돼. 놓으면 방송 켜고 도망칠 속셈이잖아.”
이게 자신을 영입하려 했던 이세영의 심정일까. 진희는 웃음을 거두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것이 되어준다면, 네가 바라는 걸 이루어줄게.”
“방금 내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표현의 일종이야. 물론 동료지.”
PD가 미심쩍은 얼굴로 입술을 내밀었다.
“뭘- 이뤄주겠단 거죠?”
“미공략 던전. 이번에야말로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와줄게.”
덜컹, PD가 허리를 빼자 탁자가 흔들렸다.
“이런, 가만히 있어. 카메라가 보고 있잖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네가 마지막으로 도전했던 던전이 어딘지 조사해 봤거든. 똑같은 던전을 세 번 도전해서 세 번 다 실패했더라. 피해도 만만치 않았고. 그 직후 헌터 일에서 멀어진 거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어요.”
“기록에 남으니까.”
“업적 비공개를 해뒀을 텐데요, 저는…… 그렇군요. 당신, 정부 쪽 사람인가요?”
PD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가까이서 보니 PD는 생각보다 순한 눈동자가 인상적인 얼굴이었다. 크고 동그란 눈동자가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정부 쪽 사람 중에 동료가 있긴 하지만, 그쪽 편은 아니야. 오히려 사이가 좋지 않아. 그건 너와 같을걸.”
“…….”
PD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희가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기에 괜한 말을 삼가려 했다.
물론 진희도 그녀의 사정을 상세히 아는 건 아니었다. 현성이 잠깐 건네준 정보만으론 PD의 모든 걸 알기는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대략적인 상황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PD는 파티에서 탈퇴당한 입장이었다.
“그 던전이 어딘지 아신다면, 그런 말 함부로 못 할 텐데요.”
“내 실력을 알고 있다면 그렇게 빼지 못할 텐데.”
“당신이 누군지 어떻게 알아요.”
그도 그렇네, 진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팔이 움직였다. 이제 PD의 팔은 탁자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조금만 내려가면 PD의 패배가 확정될 것이다.
“그럼 믿을 수 있게, 내 실력을 보여줄게. 이 던전으로.”
“등대에서요?”
“그래, 지금껏 아무도 통과 못 했다고 했지?”
등대에 도전한 헌터 중에 A급 헌터도 있었지만, 누구도 등대를 끝까지 오르진 못했다. PD 또한 마찬가지였다. 진희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클리어해 줄게. 동료 이야기는 그 이후에 계속하자.”
탕, 오랜 대치에 비해 승부는 쉽게 결정되었다. 마력의 충돌이나 충격음도 없이 PD의 팔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진희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손을 털었다. PD가 그랬던 것처럼 과장 섞인 뉘앙스로 말했다.
“좋은 승부였습니다, PD님. 미션은 통과한 거겠죠?”
어처구니없는 사람이다. PD는 허망한 얼굴로 진희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이겼어.”
진희가 PD를 이기는 광경을 목격한 이선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주변 관중들 또한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물론 등대에 A급 헌터가 찾아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이가 PD를 손쉽게 이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실 대단한 사람이 아닐까. 이선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진희는 PD의 안내를 받아 게이트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지금 말을 걸 순 없었다. 던전에서 나온 뒤에 말을 걸어보자고 생각하던 찰나, 진희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
거리가 제법 먼 편이라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술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잘, 해봐?’
뭘 잘 해보란 거지? 이선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그 말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앞에 있던 소년, 청하를 향해 한 말임을 깨달았다.
청하 또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진희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선은 사람들의 시선이 진희에게 몰린 사이 다가오는 자들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들은 청하와 진희에게 졌던 사내들이었다.
‘서, 설마.’
잘 해보란 게, 아이보고 저 사람들을 상대해 보라고 말한 거였나? 이선은 경악 어린 눈으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공원의 구석으로 향했다.
사내들 또한 몰래 청하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이선은 사내와 청하를 번갈아 보다, 다시 진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진희는 이미 이쪽엔 시선도 주지 않고 게이트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가 천재라 한들, 적은 C급 무리다. 상대가 될 리 없다. 이선이 황급히 청하의 뒤를 따라갔다.
* * *
“청하는 잘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네.”
던전 일이 모두 끝나고, 샤워를 한 후 정산소에 부산물들을 모두 팔고 나온 3인방은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방문했다.
“잘하고 있을걸.”
그리고 그 뒤를 서한이 따라왔다. 소라가 도끼눈을 뜨며 왜 따라오냐고 묻자, 자신도 요기 좀 하려 한다고 대답한 서한이 3인방을 지나쳐 무인 주문기에서 햄버거를 시켰다.
“사줄 테니까 골라.”
“앗, 그럼 괜찮고요.”
“……너도 되게 특이하다.”
사준다는 말에 소라가 안색을 바꾸고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정산소에서 학생으로선 상상도 못 할 금액을 받아놓고 고작 햄버거 하나에 태도가 바뀔 줄은 몰랐다.
“근데 아저씨는 이런 곳 안 올 줄 알았는데요.”
“내가 무슨 중세 시대 귀족이냐?”
누군가의 말마따나 전생은 황족이긴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서한이 이죽거리자 소라가 하긴, 하고 팔짱을 끼며 서한의 외견을 평가했다.
“그런 고상한 외모는 아니죠.”
“…….”
말을 말자며 서한이 넓은 테이블로 향했다.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그 곁에 앉았다.
“근데 왜 난 아저씨냐? 현성은 오빠라 부르던데.”
“친절하면 오빠고, 재수 없으면 아저씨죠.”
“소, 소라야.”
종혁이 소라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하며 말렸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든다 한들, 도와주는 사람을 함부로 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생각했다.
“됐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고등학생과 얼굴을 붉히며 싸울 정도로 못난 어른은 아니다. 서한이 턱을 괴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그 신현성이 친절하다라.”
기업 인사들에겐 여우, 요괴 따위로 불리던 현성이 아이들의 인기 스타일 줄은 몰랐다.
“엄청 친절해요. 우리 본 지 일주일 만에 보육원 아이들 이름 다 외웠거든요.”
“나도 외웠어.”
“아저씬 프로필을 외운 거잖아요.”
“뭐가 다른데?”
“다르죠. 이름을 외웠다고 다 만나본 건 아니잖아요?”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아이들에겐 그렇게 보일 수 있겠군. 서한이 쓰게 웃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걸 알고 있기에 일부러 얼굴을 보이지 않은 것인데, 그 모습이 소라에겐 냉정하게 보인 듯했다.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법을 모르기에 그 나름대로 겁주지 않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소라야, 적당히 해.”
가만히 있던 민혁이 한마디 거들었다. 평소에도 적대적인 소라였지만 오늘은 정도를 넘었다.
민혁의 말에 소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대충 이 3인방의 권력 구조를 잘 알겠군.’
그 모습을 보며 서한은 생각했다.
“별로 궁금하진 않지만, 물어나 보자. 왜 그렇게 날 싫어하냐?”
카운터에서 번호를 불렀다. 종혁과 민혁이 음식을 받기 위해 일어나는 걸 보며 서한이 물었다. 소라는 팔짱을 낀 채 서한을 노려보았다.
“아저씨가 언니를 좋아하니까요.”
“…….”
매우 직설적인 표현에 서한이 순간 말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