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92화
“으으.”
청하는 입술을 다물고 탁자 앞에 섰다. 상대적으로 키가 작다 보니 바닥에 받침대를 대고 올라가야 했다.
사내는 연신 진희 쪽을 짜증 어린 눈으로 쏘아봤지만, 이내 청하가 탁자 앞으로 나오자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따라왔다.
‘이걸로 1승은 땄다.’
장비 오브도 보이지 않는 옷차림과 어린 나이, 사내는 청하가 이제 갓 헌터가 된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한 등대는 난이도는 높지만 다칠 일이 없다 보니 어린 연령의 헌터도 도전이 가능한 곳이다.
그렇기에 간혹 청하처럼 초보 헌터들이 호기심 차, 혹은 방송을 타고 싶단 욕심으로 찾아오곤 했다.
그 특징을 잘 아는 사내는 미션이 시작되자마자 청하를 찾아온 것이다.
‘저 여자도 괜찮긴 한데.’
장비라곤 허리춤에 찬 검 말곤 보이지 않는 진희 또한 사내의 표적 중 하나였다. 하지만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곁에 있던 청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자신이 찌질하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하게 탁자 앞에 섰다.
아이랑 대결한다고 욕하는 무리도 적잖아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부러움에 찬 눈을 하고 있다는 걸 사내는 알고 있었다.
‘너희도 이길 수만 있으면 철판 깔 거잖아.’
그의 헌터 등급은 C. 널리고 널린 C급 헌터에게 PD의 방송 출현은 인생 역전의 기회와도 같았다.
물론 생방송에 얼굴이 알려지는 건 껄끄러운 일이었지만, 그쯤이야 나중에 이미지 세탁하거나 헤어스타일을 바꿔 아닌 척하면 그만이다.
“이번 팔씨름 선수는 이 두 분이시군요.”
혼자 김칫국을 마시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사내와 달리 청하는 은빛의 탁자를 두들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겠지?’
흘끔 진희를 바라보니, 그녀는 당연히 이길 거라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진희가 허튼소리를 할 사람도 아니다. 청하는 애써 긴장되는 마음을 다잡고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 두 선수 앞으로.”
사내 또한 허리를 숙이고 팔을 내밀었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자세를 취했다.
‘어, 이 녀석 손이 단단하네.’
사내는 청하의 손에서 느껴지는 물집과 근육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누나 말이 맞네.’
반대로 청하는 사내의 말랑말랑한 손과 손목을 느끼며 작게 웃었다.
키 차이는 머리 하나가 나지만, 이렇게 손을 맞잡고 대결을 하려 하니 어째선지 자신감이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드론의 카메라를 애써 무시하며 청하가 숨을 들이쉬었다.
“자- 그럼 땅 하면 시작하겠습니다. 손에 힘을 푸시고-”
PD가 다가와 둘의 손을 쥐고 흔들었다.
“셋, 둘, 하나-”
흔들던 손을 멈추고, PD가 외쳤다.
“땅!”
쾅-!
시작과 함께 사내의 손이 책상 위로 처박혔다.
* * *
“다 끝났는데요.”
벽에 등을 기대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서한이 고개를 들었다. 흙이 묻은 뺨을 닦아낸 소라가 삐딱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4급 던전의 마지막 방이었다. 출현하는 몬스터는 리자드맨이었고, 서한은 우두머리인 족장을 죽인 후 남은 잔당들을 3인방에게 맡겼다.
아무리 우두머리를 죽였다 한들 4급 던전의 위험성은 C급 헌터에게도 버겁게 마련인데, 3인방은 상처 하나 없이 던전을 클리어했다.
‘물론 중급 정도이긴 한데.’
4급 중에서 높은 수준의 던전은 아니었다. 우두머리와 도중에 놓인 함정 때문에 턱걸이로 4급이 된 던전이었지만, 그래도 D급 헌터가 쉽게 클리어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아직 안 끝났어. 전리품 수거해.”
“꼭 해야 돼요?”
“당연하지.”
던전 난이도에 비해 리자드의 시체는 제법 괜찮은 전리품이었다. 비늘은 가공하면 갑옷으로 만들 수 있고, 목젖에 있는 마력석은 화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데 좋은 매개체가 된다.
서한은 이런 전리품에 욕심을 낼 인물은 아니었지만, 초보 헌터들에게 몬스터 시체를 갈무리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소라는 툴툴거리면서 리자드들의 시체가 있는 쪽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천재들이란.’
서한도 천재란 소리를 곧잘 듣곤 했지만, 직접 자신의 눈으로 아이들의 성장세를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아이들의 실력은 저번 시험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으로 성장했다.
공격 마법 서너 번 외우면 탈진하던 민혁은 열 번을 외워도 지치지 않았고, 소라의 방어력과 능력 활용은 동일 계급 헌터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었다. 종혁은 이미 C급 서포터라고 해도 무방했다.
3인방의 전투는 수준이 매우 높았다.
전방에서 소라가 방어를 담당하고 민혁이 공격 마법을 시기적절하게 사용하며 적을 해치운다. 민혁은 신체 능력도 출중해서 마치 현성이 그러했듯이 전방과 후방을 넘나들며 파티의 교두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종혁의 텔레파시 능력은 둘의 활력을 끊임없이 유지시켜 주었다. 소라는 마음껏 주먹에 마력을 담아 적을 후려 팼고, 민혁은 쉬지 않고 주문을 외워 던전 내부를 불태웠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아이들은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단 점이다.
텔레파시 능력을 기반으로 한 연계 활동은 말할 때 필요한 수십 초의 시간을 단축했다.
수년을 같이한 파티처럼 그들의 전투엔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충분히 C급 수준이긴 해.’
진희가 C급 상위까지 아이들을 성장시키리라 했는데, 서한이 생각하기엔 얼마 걸리지 않을 듯했다.
“저기요.”
“어.”
전리품을 모두 챙긴 소라가 다시 다가왔다. 여전히 삐딱한 자세와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 서한은 태연히 말했다.
“다 끝났으면 나가자.”
소라가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쯤이야 진작 알고 있었다. 애당초 아이들에게 호감을 가져본 적이 없던 서한이기에 굳이 불편한 관계를 개선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덕분에 곁에 있던 종혁 혼자만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러고 보니까요. 저희가 얼마나 강해진 걸까요?”
“얼마나?”
짐을 꾸리고 던전을 나가던 중, 종혁의 물음에 서한이 고개를 기울였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서한에게 종혁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억지로 짜낸 질문이다 보니 두서가 없었다.
“그게, 진희 누나는 칭찬해 주시지만 다른 헌터가 사냥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도 D급보다는 강하겠죠?”
“강하지.”
서한은 짧게 대답했다. 아이들의 실력은 D급과 비교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 C급은요?”
이 이야기엔 소라도 관심이 있었는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걸음을 멈추고 서한이 뒤를 돌았다. 팔짱을 끼며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딱 C급 정도야. B급과는 상대도 안 되고.”
“…….”
기대했던 대답은 아닌지 아이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현실을 말해주면 실망할 줄 알았다. 서한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너희에게 가장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지?”
“음, 경험이요?”
대답은 종혁이 했다. 서한은 고개를 저으며 종혁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너희의 실전 적응력은 충분히 대단해. 더 많은 경험을 한다면 강해지긴 하겠지만, 그게 가장 부족한 건 아니야.”
“어…… 그럼 뭐예요?”
진희가 가르친 기술이 C급, D급 헌터 사이에서 모자랄 리 없다. 숙련도가 모자라서 그렇지 기술만 보면 A급 헌터에게 전수해도 요긴하게 쓰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 어려운 기술을 어렵지 않게, 자신의 수준에 맞게 잘 소화해 내고 있었다.
B급에게 미치지 못하는 건 경험 때문이 아니다.
“마력이야.”
“마력량이요?”
“비유하자면 마력 방출량이지.”
서한은 손가락을 들어 소라를 가리켰다.
“만약 저번 시험 때 청하가 검에 마력을 두 배 이상 휘감을 수 있었다면, 그 건틀렛으로 막을 수 있었을까?”
“못 막아요.”
단순한 계산이었다. 마력이 깃든 무기의 충돌은 곧 마력량의 차이로 승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 못 막지. 그리고 B급의 마력 방출량은 어림잡아 너희의 다섯 배다.”
“…….”
그 정도의 차이가 날 줄은 몰랐는지, 아이들이 순간 얼어붙었다.
“너희의 힘은 확실히 대단해.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마력도 C급치곤 부족함이 없어. 하지만 B급은 달라.”
괜히 C급을 관문급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B급과 C급 사이엔 어마어마한 재능의 차이가 존재한다.
마력을 얼마나 저장할 수 있고, 또 어디까지 방출할 수 있는지. 이건 훈련으로도 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차이였다.
“너희가 10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1의 기술을 가진 B급을 이길 순 없어.”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C급이 열 명이 있다 하더라도 B급 한 명의 재능엔 비교할 수 없다. 이것이 B급이 각광받는 이유였다.
“……그럼 저흰 아무리 노력해도, B급이 될 수 없습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민혁의 질문이었다. 기술을 갈고 닦는다 해도 재능이 없다면 B급에게 이길 수 없단 말은, 마치 그들의 미래를 재단하는 것 같았다.
“그건 모르지.”
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한이 말했다.
“너흰 아직 성장 중이고, 그게 어디까지 갈지는 몰라. 관문을 돌파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다.”
“……저희가 재능이 부족하면, 결국 B급은 될 수 없단 말씀이시네요?”
낮은 목소리로 소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노력 안 할 거야?”
“아뇨.”
혀를 차며 보란 듯이 어깨를 편 소라가 말을 이었다.
“B급이 안 되더라도, 바득바득 갈고닦아서 기술로 다 때려잡을 수 있게 수련할 거예요.”
그것참 대단한데, 라며 서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너희가 B급도 안 될 인재였다면, 진희가 건드리지도 않았겠지만.’
진희의 눈썰미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서한은 진희가 선택한 아이들의 재능이 고작 B급에서 끝날 수준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사실을 굳이 말해줄 정도로 서한은 착한 어른이 아니었다.
* * *
“와, 와아아!”
“이겼어, 세상에!”
누구도 청하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다. 청하는 평범한 옷차림의 어린아이였고, 상대방은 딱 봐도 헌터스런 장비를 갖춘 성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눈에 보이고 있었다. 사내의 팔은 책상에 내다 꽂힌 상태고, 청하는 여전히 곤란한 얼굴로 사내의 팔을 누르고 있었다.
“네- 승자가 정해졌습니다! 패자분은 다음 기회를 노려주세요.”
웅성거리는 대중 가운데 PD만은 느긋한 어조로 사내를 탁자 밖으로 밀었다. 아직도 얼이 나간 얼굴로 입을 뻥긋거리고 있었다.
“저, 자, 잠시만요. 저 한 번만 더…….”
“에이, 제 방송 아시잖아요. 한 번 더는 없습니다.”
사내가 다시 탁자 앞으로 가려 했지만, 결국 PD의 손에 밀려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