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90화
현성은 엮여 있는 문제가 복잡해서 뭐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진희는 단숨에 해답을 도출했다.
“위부터 텁시다.”
“위요?”
“청소 순서는 위부터 아래로. 위쪽 사람들을 털면 먼지라도 떨어지겠죠.”
진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리가 알아봐야 할 건 이래요. 첫째, 테러범과 결탁한 꼰대들. 둘째, 테러범들의 정체와 연관된 이주민들. 셋째 제 전생(前生)과 연관된 사람들. 마지막으로 넷째.”
진희는 수정구 던전을 탈출한 후 현성에게 자신의 전생에 대해 간략하게 말한 바 있었다.
“또 다른 수정구 던전을 돌파하기.”
이 네 가지 목표는 모두 연관되어 있으리라 진희는 장담했다.
이주민이란 성벽이 무너져 게이트를 통해 도망쳐 온 이들이다. 카온의 처지와도 같다.
그렇다면 바제트의 세상의 주민들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아니더라도 게이트의 진실과 성벽을 무너뜨린 범인들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희는 테러범이 성벽을 무너뜨린 일당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 ‘시체’. 테러범이 쓰던 꼭두각시 마법이랑 닮았어요. 예전에 시영이를 도와줬을 때 봤거든요.”
“……과연.”
현성은 그제야 진희가 왜 테러범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갔다.
여태껏 목적도, 입장도 표명하지 않은 테러범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앓았는가. 세상에 목적이 없는 테러범은 없었기에, 현성은 그들이 대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희의 증언에 그들의 목적이 감이 잡혔다.
“그 테러범은 진희 씨의 전생 때도 존재했다. 이 말이군요.”
“수법이 똑같거든요. 그리고 이주민들도 사정이 비슷하다면, 테러범은 여기저기서 활동한 셈이 되죠.”
테러범의 목적은 아마도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
테러범 레인이 사용한 마법은 바제트의 시체를 되살린 마법과 유사했으며, 그들 중에선 게이트를 열고 닫는 능력을 가진 마법사도 존재한다.
그렇기에 성벽이 무너진 세상의 이주민들을 조사하려 했다.
테러범의 수법을 알고 정체의 실마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그간 복잡하게 꼬여 있던 문제들이 단숨에 해결될지도 몰랐다.
자신의 시체를 이용해 성벽을 무너뜨렸다면, 바르그가 자신을 보고 ‘성벽을 무너뜨린 인간’이라고 칭하는 이유 또한 설명이 된다.
그들은 바제트의 시체로 제국을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고, 그것이 성벽이 무너진 원인이었다.
“하지만 우린 녀석들에 대한 단서가 너무 적고, 심지어 붙잡은 테러범조차 놓쳤죠. 그러니까 위부터 털어보는 거예요.”
“어렵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정부 소속인데…….”
“오히려 지금 움직여야 일이 쉽게 풀릴걸요. 괜히 저희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간 시간을 벌게 만들 테니까요.”
“그건 일리 있습니다만, 어떻게 움직이실 겁니까?”
“우선 몸집을 키워야죠. 이름값도 하면서.”
중국에서 알려진 별명이 역천검이라고 했던가. 그런 오그라드는 명성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헌터로서의 실력을 알려줄 기회가 필요하긴 했다.
권력자와 싸우기 위해선 그만큼의 권력이나 재산, 혹은 명예가 필요한 법이다.
이참에 관리 본부 같은 이들이 함부로 방해할 수 없도록 이름을 알리고, 힘을 키우는 것도 좋다.
“실력 있는 헌터도 단원으로 모집해서 싸움을 준비하려고요.”
“단체로서 몸집을 키우겠단 말씀이신가요?”
“맞아요. 일개 개인이 정부나 단체와 싸워 이길 순 없을 테니까.”
진희답지 않은 말이라고 현성은 생각했다.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결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진희가 단체의 힘을 중요시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기사단장으로서, 귀족으로서 살아왔던 그녀는 개인과 단체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현성 씨도 도와주실 거죠?”
“진희 씨 말마따나, 저도 단원이니까요.”
“고마워요, 저도 현성 씨를 믿고 있어요.”
히죽 웃는 진희를 보며 현성도 마주 웃었다.
반쯤 강제로 단원이 된 느낌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진희의 기사단과 반목할 생각은 없었다.
기사단의 힘은 국내 그 어떤 파티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S급 수준의 헌터가 세 명에 특수한 능력을 가진 루키가 넷, (주로 서한 덕분에) 재정 지원도 좋고, 경력은 두말할 것 없다.
오히려 이런 배에 탑승 안 하는 승객이 멍청한 거겠지. 현성은 생각했다.
“하여간 현성 씨는 이 자료들을 가지고 의심 인물을 압박해 주세요. 길드와 연합하는 것도 좋겠네요. 그쪽은 믿을 만하니까요.”
말을 험하게 하던 정령 왕을 떠올리며 진희가 덧붙였다.
“알겠습니다. 진희 씨는 던전으로 가실 예정입니까?”
“업적도 쌓고, 애들 던전 경험도 쌓을 겸 헌터다운 일을 해보려고 해요. 서한 씨도 같이 간다 했으니, 일단 주변 2급 던전들 싹 털어버리게요.”
“……서한 씨도 같이하나 보군요.”
“네, 서한 씨가 별다른 일이 없다면요.”
진희가 서한과 함께 움직인단 이야기에, 현성은 잠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진희 씨가 금강 소속인 것처럼 보일 텐데요.”
“어쩔 수 없죠. 이미 금강이랑 한패라고 생각들 하던데요?”
“음.”
그도 그랬다. 관리 본부에선 이미 진희가 서한과 동맹이라고 단정하는 분위기였다. 이세영을 이용하려 했던 것도 진희가 서한의 부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계자 싸움에 연관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건 안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밀 수 있다면 서한 씨를 회장으로 밀 생각이었어요. 이세영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편은 아니고, 시영이야 너무 어리니까.”
“……그렇군요.”
“아까부터 왜 그래요?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진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묻자, 현성은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으음.”
현성이 실없는 이야기를 할 사람은 아니다. 뭔가 불안하다고 생각한 게 있나 보다 생각한 진희가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다.
“별문제 없을 거예요.”
“네.”
진희의 말에 현성이 복잡한 웃음을 지었다. 비틀린 그의 눈꼬리가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 * *
“A급까지 됐다면 그다음은 업적보단 유명세가 더 중요해요.”
단원들을 모아놓고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 설명하던 중, 던전을 돌아다닐 거란 진희의 이야기에 청하가 끼어들었다.
“그저 급수에 맞는 던전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최근 이슈인 던전을 공략하는 게 더 효과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흐음, 그래?”
“네, 누나가 만난 이하늘이란 마법사도 그런 식으로 유무브에서 인기를 얻은 거거든요.”
“너 아직도 그 사람 구독해?”
“가, 가끔 봐요.”
진희의 물음에 청하가 눈길을 피했다. 청하가 밤마다 새벽까지 인터넷에서 헌터 영상을 즐겨 보고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 하여간 그냥 던전이 아니라, 유명한 던전을 공략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단원도 더 모집하는 거잖아요? 다른 유명 헌터 파티들도 다 그렇게 해요.”
실속이 있는 던전일수록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는다. 그 던전에 상주하는 헌터들이 다른 헌터들의 이목을 배제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대중들도 위험한 던전이 아닌 이상에야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유명할수록 위험하단 이야기 아니야?”
“보통은 그렇지.”
종혁의 합당한 의문에 청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특수한 던전은 위험하지 않아도, 유명한 경우가 있어. ‘완전한 등대’ 같은 곳.”
“아, 거기!”
종혁의 뒤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거기 가봤는데! 1층에서 떨어졌지만.”
“거기가 어딘데?”
“입장하면 탑의 1층부터 시작되는 특이한 던전이야. 한 층의 몬스터들을 모두 잡아야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어서, 헌터들이 엄청 도전하고 있어.”
‘완전한 등대’는 최근 인터넷 영상 콘텐츠에서 인기 있는 던전이었다.
층마다 절묘한 난이도를 자랑하는데, 1층은 C급과 B급이 통과할 수 있지만, A급이라 한들 5층 이상 올라가 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던전에 죽치고 있는 PD가 있거든요.”
“PD?”
“네, 유무브에서 유명한 헌터 PD예요. 본인이 B급 실력자이기도 한데, 길잡이라서 이런저런 던전 내부를 영상으로 올리거나, 헌터들의 활약상을 직접 촬영하기도 해요.”
시영과 청하는 그 채널을 구독하고 있었는지, 진희가 관심을 보이자 열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던전 안에선 전자 제품을 쓸 수 없지만, 그 PD가 들고 있는 건 특수 제작된 카메라라고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화질은 떨어지지만, 진짜 직촬이라서 엄청 실감 나요.”
“이하늘도 그 PD랑 일하고 싶어서 친해지려고 난리 부리기도 했대요.”
“별별 사람도 다 있네.”
B급 헌터라면 억대의 수입을 벌 수 있는 부자일 텐데도 굳이 영상 PD에 목매고 있다니, 세상 특이한 사람도 다 있다. 진희가 신기하다는 눈빛을 하자 청하가 자신의 휴대폰으로 해당 채널을 보여주었다.
“요즘 PD가 열중하고 있는 게 그 완전한 등대예요. 헌터들의 도전을 시간과 점수로 나눠서 랭킹을 작성하고 있거든요. 봐요.”
채널엔 1등부터 100등까지 수많은 헌터가 기재되어 있었다. 각각 죽인 몬스터의 수와 각 층의 돌파 시간이 적혀 있었다.
“완전한 등대의 특징인데요, 우선 올라가기 위해선 그 층에 있는 몬스터를 모두 잡아야 하고, 싸우고 있을 때 상처가 하나라도 나선 안 돼요.”
“상처가 나면 안 된다고?”
“네, 조금이라도 다치면 그 자리에서 퇴출되거든요. 그래서 위험하지 않으면서도 유명한 던전이란 거예요.”
던전의 종류야 가지각색이라지만, 이쯤 되면 오락 시설이나 다름없었다. 던전의 정체성 참 모호하다고 생각하며,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등대가 어디 있는데?”
하지만 재밌어 보였다.
진희가 흥미진진하단 얼굴로 웃었다.
* * *
던전의 입구는 한 공원이었다. 일반인들은 출입 금지가 된 공원은 헌터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부분이 C급과 B급으로, 인터넷에 이름을 날리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이들이었다.
완전한 등대는 보상을 주지 않는다. 애당초 끝까지 돌파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을뿐더러, 전리품이랄 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몬스터는 마력석은커녕 시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데다가, 층을 돌파했을 때 보상도 주지 않는다.
그저 PD의 영상에 찍히겠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우리 차례가 오긴 와?”
“으음, 보통 PD가 그때그때 미션을 줘서 추려내긴 하는데요.”
수많은 헌터를 피해 공원의 가장자리에 온 진희는 한껏 흥분한 청하를 보며 물었다.
청하는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으며 대답했다.
“가장 고가의 장비를 가진 사람 열 명이라든가, 달리기가 빠른 사람 열 명 같은 걸로 정해요.”
“그런 터무니없는 미션에 사람들이 잘도 따라주네.”
“미션은 생방송으로 나가고 있거든요. 보는 사람이 수만 명인데 반칙하거나 PD의 말을 무시하면 바로 쓰헌 취급당해요.”
“썬?”
“쓰레기 헌터의 준말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