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9화
최근에 A급이 된 헌터는 단 한 명뿐이다.
유망한 인재였던 이하늘을 압도하고, 금강 기업의 후원을 받는 걸로 추정되는 인물. 그리고 호전적인 태도 때문에 A급이 되자마자 요주의 대상으로 부상한 인물이었다.
사람을 불러야 한다. 이곳에 있는 간부들은 모두 마력이라곤 다룰 줄 모르는 무능력자들이었다. 사색이 된 채 바깥의 경비원을 부르려던 간부를 보며 진희가 차갑게 말했다.
“소리 지르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헉…….”
그와 동시에 그녀의 마력이 회의실을 가득 채웠다.
마력에 면역이 없던 간부들은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저도 이야기만 하러 온 거니까, 서로 이야기만 하고 끝내요. 아셨죠?”
다시금 웃어 보인 진희였지만 순간 보여준 기세 때문에 간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애당초 경비원을 부른다 해도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다. A급, 나아가선 S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헌터가 눈앞에 있는데 고작 경비원이 막아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이거 범죄인 거 알아? 나가면 너도 테러범이랑 똑같은 신세 되는 거야!”
“전 대화만 하려고 왔는데 왜 이러실까. 절 들여보낸 것도 당신이잖아요?”
한만성이 부들거리며 나름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진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래서 어쩔 거냐는 듯 비아냥거리자 입을 다문 건 한만성 쪽이었다.
“그리고 당신들 절 어떻게 신고할 건데요? 비밀스러운 회의 중에 침입자가 나타났다고?”
맞는 말이었다. 이 자리는 외부에 유출되어선 안 되는 자리였다. 여기서 진희를 고발해봤자 피해를 입는 건 자신이었다. S급 헌터를 모략하려는 회의라고 누구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이세영이…….”
“당신네를 보고 싶어서 세영 씨한테 부탁을 좀 했거든요.”
한 간부의 중얼거림을 들은 진희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진희는 현성을 돕기 위해 두 명에게 연락했다.
서혁, 이세영.
둘에게 공통적으로 의뢰한 일은 방위대와 관리본부의 비리 수집이었고, 세영에게 특별히 부탁한 건 그의 이름을 빌리겠다는 요청이었다.
진희는 관리본부가 서한보다 세영 쪽을 선호하리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덕분에 뜻하지 않은 빚을 지우게 되었지만, 그 정도야 감수할 수 있었다.
굳이 이 자리에 진희가 직접 나온 것도 이유가 있었다.
‘직접 얼굴 보고 말해야 기어오르지 않거든.’
진희가 간부들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본론을 꺼냈다.
“여러분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대충 짐작이 가요. 현성 씨가 무진장 싫었나 봐요?”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대답 들으려고 한 질문이 아니었기에 진희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세영 씨한테 현성 씨 약점을 물어보기도 하고, 간부란 사람들이 참 치사하네요, 안 그래요?”
“방위대 일에 상관 마라. 민간인이 끼어들 일이 아니야.”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던 방위대 간부 중 하나가 말했다. 어찌나 표정이 진지한지, 눈빛 속엔 협박에 굴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돋보였다.
진희는 그의 명찰을 확인한 다음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서류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뒤지더니, 그의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낭독하기 시작했다.
“정재형 중령님이시네요. 오호라, 해군 출신이시네. 왜 여기 왔는지 대충 알겠네요.”
“지금 무슨 소린가.”
“해군 근무 당시 2억 원가량의 피복 방산 비리의 혐의로 제대, 이후 방위대에 들어와 통신 부대 대대장 위임.”
“자, 자네 지금…….”
“하지만 방산 비리를 행했던 업체와 유착이 지속되고 있어, 방위대에서 대여해 주는 C급 장비 중 저급 피복의 원인임. 나 참, 어쩐지 저번에 장비 빌릴 때 너무 저질이다 싶었는데, 당신 때문이었네요.”
진희가 들고 있던 서류를 던졌다. 그 서류 안엔 비리의 증거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그걸 확인한 간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 그의 모습을 보며 진희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다들 긴장하고 계시네요.”
“…….”
“네, 맞아요. 기대하신 대로, 여기 있는 서류 모두가 여러분의 비리랍니다.”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블러핑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도 뒤가 구린 사람들만 모아놓은 터라 아무도 그 증거를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웃기지 않아요? 어쩜 이렇게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만 모아놓을 수 있을까.”
“이, 이 많은 걸 대체 어디서…….”
“그건 알 필요 없으시고.”
진희가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자리만 상석인 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상관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려고 왔어요. 우리 애들 건드리지 마세요.”
“우리 애들……?”
“네, 현성 씨는 제 단원이라서요.”
현성은 명색이 S급 헌터였다. A급 헌터인 진희에게 ‘우리 애’란 말을 들을 정도의 계급은 아니다. 이해를 하지 못하는 간부들의 얼굴을 보며 진희가 가방에 있던 서류를 모조리 꺼내놓았다.
“앞으로 현성 씨나, 서한 씨 일을 방해할 때마다, 이 서류들을 한 장씩 언론에 배포하겠어요.”
헌터의 힘 때문에 언론이 약세라지만, 언제나 기회를 엿보는 그들이 헌터의 비호 아래 터뜨리는 방산 비리를 물지 않을 리 없었다.
그때 한 간부가 이를 악물며 진희의 말을 끊었다.
“이건 협박일세. 범죄라고.”
“에이, 범죄는 당신들이 한 거죠.”
이번에도 진희는 서류철에서 해당 간부의 이름을 찾아 낭독했다.
“김서찬 씨. 당신은 아들 조기 제대를 위해서 군의관과 대학병원 의사를 뇌물로 산 혐의가 있네요? 와우, 그리고 그 아들은 카지노에서 현역 군인을 폭행해 합의금을 물었다, 라. 당신은 정재형 씨보다 더하네. 낯짝은 어떻게 들고 다니세요?”
“…….”
“불만 더 있으신 분?”
손을 휘휘 저으며 물어보는 진희에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희는 서류들을 가방에 다시 집어넣고 한만성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가방을 떨어뜨렸다.
“당신이 가지세요.”
“뭐, 뭐?”
“이 많은 걸 들고 돌아가기도 귀찮으니까, 보관해 줘요. 아, 참고로 당신 건 제가 따로 보관해 두고 있어요.”
회의실 안에 있던 모든 간부의 시선이 한만성에게 쏠렸다. 지금껏 신뢰를 쌓아왔던 간부들의 눈빛엔 의심이 담기기 시작했다.
“나, 난 이딴 거 필요 없어!”
“에이, 가져요. 누가 이걸로 협박하는 데 쓰래요? 그냥 보관만 하면 된다니까요.”
자신의 약점을 누군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진희의 속셈은 뻔했다. 자신이 무리를 통솔할 수 없도록 이간질하려는 것이다. 한만성은 가방을 진희에게 도로 내밀었지만, 진희는 부드럽게 가방을 피하며 웃었다.
“그걸로 협박하거나 그러면 안 돼요?”
“그, 그런 짓 안 해!”
“아, 어차피 그거 말고도 훨씬 많으니까, 한만성 씨가 쓰고 싶으면 좀 써도 돼요. 양보해 줄게요.”
“필요 없어!”
한만성의 필사적인 외침에 진희가 키득거리며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한만성 씨도 제 제안 잘 지키리라 믿어요.”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녀분이 참 귀엽던데요.”
“허, 허억!”
그만이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한만성의 얼굴도 앞선 두 명과 다를 바 없이 창백하게 굳었다.
“공무원이면 제대로 일합시다. 이런 쓸데없는 회의 한다고 잰 체하지 말고요.”
진희가 자리를 떠나면서 덧붙였다.
“혹시 모르잖아요, 계속 뒷돈 먹다가 배에 탈 나서 진짜 펑- 하고 터질지.”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며 진희가 웃었다.
“물론 안에서 터진 건지, 밖에서 찌른 건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럼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녀는 들어올 때처럼 느긋한 걸음걸이로 바깥으로 나갔다.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은 그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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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음 날, 현성이 진희를 찾아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한 꾸러미 사서 카온에게 주고는 곧장 진희에게 고맙다 인사했다.
조금의 과장도 없는 담백한 인사에 진희가 빙그레 웃었다. 진희는 현성의 이런 면을 높게 사는 편이었다. 그는 감사와 사죄를 표할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뭘요.”
“……하지만 과했습니다.”
그러나 감사의 표현이 끝난 건 순식간이었다.
그 말을 할 줄 알았다며 진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들의 비리를 몰라서 폭로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들이 한국에서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에 다들 모른 체한 거죠. 이제 진희 씨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물론 서혁과 세영이 모아온 비리 자료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고 민감한 내용들이었지만, 현성도 알고 있는 게 제법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않은 건 적을 만들면 힘들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들이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이란 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일개 헌터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무형의 힘이 그들에겐 존재했다.
“진희 씨가 도와주신 덕분에 제가 편해진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진희 씨를 방해하려 들 거예요.”
“괜찮아요. 어차피 미운털은 단단히 박혔거든요.”
저번 A급 승급 시험 때부터 탐탁지 않게 보던 이들이었다. 저들과 친해지려는 마음은 진작 접었다.
오히려 적대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진희는 마침 책상 위에 있던 서류 하나를 현성에게 내밀었다.
“이건?”
“조사 좀 해봤어요. 테러범과 한패인 인사가 누구인지.”
서류엔 인물들의 프로필이 열거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테러범에게 동조할 이유에 대한 합리적인 증거들이 적혀 있다.
무고한 사람을 의심해선 안 된다지만, 그 근거가 하나같이 디테일하고 확실했기에 현성의 눈도 진지하게 변했다.
“많군요.”
“네, 과하게 많아요.”
현성마저도 놀랄 정도로 많은 이가 용의 선상에 있었다.
이주민들을 이용하려는 정부 인사부터 이번 테러로 인해 부당한 이득을 본 군인까지, 어떤 면에선 앞서 협박을 위해 조사했던 비리 자료들보다 놀라운 내용이었다.
“이만큼 썩어 있었나요?”
“조사한 사람 말에 따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라던데요.”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이래 왔다. 진희는 이 조사 결과를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20년 동안의 호황에 물이 고이다 못해 썩어 있음은 예상하고 있었다.
처음엔 무시하려 했다. 이번 인생은 편하게 살려고 마음먹기도 했고, 굳이 그들과 엮이지 않더라도 잘해나갈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번에도 자신은 어엿한 기사단장이었다. 얄궂은 인생이다.
“거슬려요.”
진희가 서류에 있는 인물들에 대한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절 고깝게 보는 것도 재수 없고, 제 정보가 퍼지기 시작하자 보육원에 손을 뻗는 애들도 짜증 나요. 계속 심기를 건드리는 테러범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떻게 할 겁니까?”
“차근차근 청소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