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8화
털었을 때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
귀족으로 태어나봤던 진희의 지론이었다. 하물며 돈이 모이는 헌터 관련 직종이라면 더욱 그렇다.
“대충 이 정도네.”
“이걸 어떻게 합니까?”
진희는 책상 위에 정리된 서류를 들여다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리를 도와주었던 카온이 묻자, 진희가 서류 하나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만지기도 더러울 정도로 저속한 범죄 행위들이 낱낱이 이 서류에 기록되어 있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새삼 세상은 달라도 사람 사는 곳은 똑같단 생각을 하며 진희가 혀를 찼다.
“빈틈을 노려야지. 들인 수고도 있으니, 함부로 쓸 순 없어.”
“빈틈이 언제입니까?”
진희는 카온이 묶어준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음침한 후드티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눈과 코까지 가린 커다란 후드로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지금.”
* * *
“커도 너무 컸습니다.”
관리본부의 회의실, 정책 고문이란 직책을 달고 있는 중년의 남성이 말했다. 그의 말에 회의실 내부의 인원은 모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벽화와 금빛의 테이블, 샹들리에가 걸려 있는 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나이가 지긋한 인사들이었다. 이 회의실에 모인 건 관리본부의 인사뿐 아니라, 방위대의 간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 신현성에게 불만을 가지고, 그를 매도하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안 그래도 테러범 잡은 덕택에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판국입니다. 그 나이에 소령이 말이나 됩니까? 심지어 전시 상황도 아닌데.”
방위대는 표면상 군대 계급을 따르고 있었다. 아직 서른이 되지 않은 소령이라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겪어보지 못한 고속 승진이었다.
이곳에 있는 방위대 간부들 계급 대부분이 중령 내지는 소령이었다. 현성이 승진을 하게 되면 난데없는 같은 계급 동료가 생기는 꼴이다.
“이번 기회에 기를 눌러야죠.”
정책기획실장, 한만성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위대분들도 동감하시지 않습니까?”
간부들은 한만성의 말에 동감하며 여기저기서 불만을 토로했다.
“실력을 제하고도 소령의 자질은 아닙니다.”
“테러범을 구속하는 상황에서 던전에 간다니, 직무유기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대위가 중령에게 바락바락 대드는 꼴이라니…… 쯧!”
현성의 실력은 모든 간부가 인정하고 있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의 수사력이나 무력, 그리고 정의감은 역대 방위대 대원 중에서 으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과 그들이 생각하는 예의는 다른 법이다.
“업적 좀 생겼다고 무례하게 구는 녀석이 그릇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를 대우해 주진 않는다. 현성은 규칙과 기준을 준수하는 인물이었고, 그렇기에 그의 상사에게도 도덕을 강요했다. 그 강요에 넌더리가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사소하고 구차한 것들이었기에 간부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법인 카드를 멋대로 쓰지 마라, 연장 근무를 허위로 작성하지 마라, 출근 시간을 준수하며 결제 순서를 오인하지 마라 등등.
원래 맞는 소리를 쓰게 하는 사람일수록 미움받는 법이다.
이 아이 같은 이기심은 나이를 불문했다.
“징계위원회를 열면 되겠습니까?”
“당연히 열어야 합니다.”
“음, 하지만 징계를 내릴 만한 명분이 더 있습니까? 자리를 비웠다는 거 하나 가지고 큰 징계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애당초 테러가 일어난 당일 현성은 오프였다. 이들의 트집도 억지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간부들에게 다시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현성을 욕하는 무의미한 대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가 최근 들은 게 있습니다만.”
그때, 한만성이 비릿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한창 현성에 대한 악담을 퍼붓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신현성과 금강 후계자가 서로 친분이 있단 이야기 알고 계십니까?”
“허어.”
“들은 적은 있습니다.”
놀란 사람도 있었고,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다. 방위대의 정상 업무를 위해 도와준 기업이 다름 아닌 금강이었기 때문에, 현성과 금강 사이에 어떤 친분이 있으리라 의심하던 사람들이었다.
테러범을 잡기 위해 잠복 임무를 할 때, 현성과 그의 후배 윤수가 호위했던 인물이 금강 기업의 이시영이었기에 나름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최근 금강의 두 번째 후계자가 국내에 돌아왔죠.”
“유럽 지부장 말씀하시는군요.”
관리본부의 정책회의 때 방문했던 이세영의 이야기였다. 한참 헌터의 규제와 사회책임에 대해 열변을 토했던 게 떠올랐다.
“그와 이서한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금강이란 거대한 왕좌를 두고 다투는 두 후계자가 사이가 좋을 리 없었다. 이런 뻔한 이야기를 대체 왜 꺼내나 싶어 사람들이 불만 어린 어조로 되묻자, 한만성이 만족스럽단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자, 그럼 이서한이 신현성과 친분이 있는 걸, 이세영이 좋아할까요?”
“그건…….”
“이것도 당연한 대답입니다. 기꺼울 리 없죠. 이서한의 발이 넓어지는 걸 놔둘 리도 없고요.”
이제 회의를 주도해나가는 건 한만성이 되었다. 그는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회의실 테이블을 빙빙 돌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세영과 신현성은 성향이 다소 비슷합니다. 헌터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업의 독주를 막으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생각해 봅시다. 그런 이세영이 신현성과 저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 한다면 어디를 택하겠습니까?”
성향이 같다고 무작정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해관계를 잘 따져야 한다.
이세영은 그 이해관계를 매우 잘 따지는 기업인이며, 동시에 이상주의자였다.
“성향은 같으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신현성. 반대로 성향은 다르지만, 잘 대화하면 정책 수립에 도움이 되는 관리본부.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요?”
신현성이 S급 헌터라는 대단한 직함이 있었지만, 금강은 이미 S급 헌터를 3명이나 보유한 대기업이었다. 게다가 신현성의 성격상 기업에 이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결국 그는 이세영과 같은 인재 마니아에겐 그림의 떡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관리본부는 다르다. 이세영이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였다.
“이세영이 저희 편을 들어주실 거라 생각하시는군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건 생각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바로 어제 직접 연락을 받았거든요. 저희와 만나보고 싶다고요.”
한만성이 당당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유였다.
이세영에게 로비가 들어왔다. 신현성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줄 테니, 자신이 원하는 법안과 정책들 기획에 도움을 달라며.
한만성은 그걸 대번에 받아들였다.
“이세영의 정보력은 다들 아시지요? 그는 단 3년 만에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를 모조리 포섭하여, 금강을 용병업이라면 둘째가도 서러운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그 눈과 귀는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그가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신현성의 약점 정도야, 하나둘쯤 알고 있겠지요.”
“과연, 정보를 산 거군요.”
한만성은 말 그대로 ‘정치’를 한 것이다. 이세영에게 관리본부의 권한으로 미끼를 휘두르며, 신현성을 막다른 골목에 밀어 넣을 정보를 샀다.
신현성의 운신이 좁아진다면 관리본부 입장에선 이득 볼 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신현성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기업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고, 방위대의 힘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뤄질 것이다.
‘저 머저리들은 모르겠지만 말이야.’
신나서 떠들고 있는 방위대 간부를 흘겨보며 한만성이 웃었다.
방위대 간부는 그저 짜증 나는 신현성을 욕 먹일 생각에 기뻐하고 있었지만, 신현성이 몰락할수록 자신이 타고 있는 배도 침몰할 거란 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거래는 관리본부만 이득을 보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세영이 지금, 이 장소로 와 정보를 팔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 말씀입니까?”
“예, 모두가 같이 자리한 이곳에서 일을 처리해야 여러분도 절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정보이기에 서면으로 주고받아도 문제가 없었지만, 이세영은 보안을 근거로 직접 만나겠다고 말했다.
한만성이야 나쁠 게 없는 조건이었다. 다른 간부들 앞에서 보란 듯이 정보 교환이 이뤄진다면, 자신의 위상 또한 올라가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만성이 급하게 회의를 개최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 왔나 봅니다.”
그때 회의실에 위치한 인터폰의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만성은 수화기를 들어 비서에게서 상황을 들었다.
아무래도 이세영이 직접 오진 않고, 그의 부하 직원이 찾아온 듯했다.
“안으로 모셔.”
곧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호화스러운 회의실의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와 검은색 후드티를 입은 여성이었다.
너무나도 가벼운 복장에 간부 중 한 명이 불편하단 표시로 헛기침을 했지만, 한만성은 재빨리 그의 모습을 가리며 여성에게 다가갔다.
“빨리 오셨군요. 환영합니다, 정책기획실장 한만성입니다.”
“반가워요.”
후드 아래로 보이는 미려한 입매가 호를 그렸다.
‘어라? 이 목소리…….’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한만성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제 자리는 어디죠?”
“아, 이쪽입니다.”
한만성이 정신을 차리고 여성을 자리로 안내했다. 일부러 가장 상석을 준비했다. 특유의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여성을 자리로 안내한 한만성이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말씀드린 이세영 지부장님 대신에 찾아온…… 아, 혹시 성함이?”
한만성의 물음에 여성이 빙그레 웃으며 후드를 벗었다.
새까만 장발이 어깨 아래로 늘어지며, 나른한 미소를 지은 여성이 입을 열었다.
“서진희라고 합니다. 여기 구면이 좀 계시네요.”
“……어?”
왜 네가 거기서 나와?
한만성의 넋이 나간 목소리와 함께, 진희가 말을 덧붙였다.
“근무 시간에 뒷담이나 하러 모이다니, 참 편한 직장 생활이네요, 그렇죠?”
“다, 당신 뭐야!”
한만성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다가왔다. 하지만 진희가 가만히 자신을 올려다보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진희의 무력을 눈앞에서 목격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의 공포가 떠올라 발목을 붙잡았다.
“앉아요, 서 있으면 피곤하잖아요?”
“나, 나는…….”
“앉으라니까?”
한만성은 결국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회의실의 간부들은 몇 명은 경악의 표정으로, 대부분은 당황한 얼굴로 진희와 한만성을 번갈아 보았다.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눈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번에 A급이 된 서진희라고 해요. 이렇게 말하면 아시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