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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87화 (8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87화

18. 헌터의 정치

사태를 정리하는 건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현성은 쑥대밭이 된 방위대를 정리했고, 서한은 그를 도왔다. 서로 사이가 나빴던 둘이었지만 일 관계에 있어선 선을 지켰다.

서한이 움직인 금강의 지원 덕분에 방위대는 빠르게 정상 업무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반면 진희와 카온은 과거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진희는 자신이 죽었을 당시의 상황을 털어놓았고, 카온은 붉은 기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서한 또한 이 모든 이야기를 같이 듣고 있었다.

“촌극이군.”

황태자 케네스의 이야기가 나올 때, 서한은 이를 갈며 그를 부정했다.

“무능해, 대체 왜 그런 상황까지 간 거야?”

“당시 제국 중앙 귀족은 썩을 만큼 썩어 있었거든요.”

“그럼 물갈이를 해야 할 거 아냐.”

그게 말이야 쉽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진희는 쓰게 웃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황태자는 바제트를 손절한 셈이었다.

‘골든 웨이브’ 전쟁으로 막대한 영토를 확보한 제국이었지만, 그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선 또 다른 희생을 치러야 했다.

주변의 국가는 제국의 무력을 두려워해 연합하기 시작했고, 황태자의 독주를 막고 싶었던 중앙 귀족은 다른 황자를 지원하며 황태자의 세력을 압박했다.

국가의 이익보단 세력의 이익을 중시한 결과였다.

중앙 귀족들은 기사도를 중요시하는 바제트의 성격을 잘 알기에 수도 방위를 맡기며 온갖 책임을 위임했고,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걸 당하고 앉았어?”

서한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진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전생이라고 해도 성격이 똑같은 건 아니에요. 당시의 전 착했거든요.”

착한 진희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서한이 진짜냐는 눈빛으로 카온을 바라보자, 카온이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결국 황태자는 전쟁의 주역이자 중립파였던 드라노이드 가문을 내치기로 결심했어요. 제 동생을 섭외하고, 중앙 귀족들과 같이 절 죽음으로 몰고 갔죠.”

“왜 가만 당해준 거야?”

“그땐 지쳤거든요.”

지금이라면 귀족이고 나발이고 다 엎어버렸겠지만, 당시의 바제트는 그만큼 막다른 길에 몰려 있었다.

어려서부터 검술을 깨우친 천재였지만 그만큼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나이도 빨랐고, 젊은 나이에 전쟁을 경험해 정신이 피폐해진 시기였다.

그러던 중 귀족들은 바제트의 죄책감을 자극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사용했다.

“제가 이끌던 병사 중 전사했던 사람의 가족을 데리고 와서, 이 전쟁은 다 당신 때문이니 내 아들 살려내란 비명을 듣기도 하고. 제 아래서 무훈을 세운 부관이 다시 최전방으로 배치되어, 제게 원한을 품고 있던 적군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주기도 했어요. 차근차근 당했죠.”

“…….”

전쟁의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는 현대에서도 잘 알려진 정신 장애다. 기사도를 갖춰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바제트는 그렇게 무너졌다.

서한은 뭐라 말하고 싶어 했지만, 바제트의 죽음이 전생의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란 걸 알기에 위로의 말도 건넬 수 없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서한 씨와 황태자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나도 환생했다면, 같은 사람이잖아.”

“설령 그렇다 해도 서한 씨는 달라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황태자는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서한처럼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킬 줄 아는 어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황태자란 지위를 지키기 위해, 무표정한 가면 뒤로 불안에 떠는 어린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제트가 황태자를 신뢰하고 존경했던 이유는 그가 자신의 부하를 진정으로 아낄 줄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마저도 변질했지만.’

어찌 되었건 세 명이 해야 할 과거 이야기는 이걸로 일단락되었다. 아직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건 카온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듣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현성 씨가 안 보이네요, 바쁘대요?”

“그쪽은 문제가 좀 복잡해. 사실 나도 이걸 말해주려고 온 거긴 한데.”

서한이 짜증 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인명 피해가 없기에 금방 끝날 줄 알았던 테러사태는 예상외의 방해에 지체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상부의 책임 전가였다.

“분위기가 좋지 않아.”

서한이 짜증 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테러 당시에 신현성이 자리에 없다는 걸 트집 잡고 있어. 테러범과 유착관계에 있는 녀석이 관리본부 쪽에 있는 건 확실한데, 내부 여론이 신현성 쪽에게 좋지 않아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그게 왜 현성 씨 탓이에요?”

“본인이 데려온 테러범을 놓친 것도 모자라, 테러 당시에 자리에 없었으니까. 애당초 테러범 관리가 신현성이 해야 하는 일도 아니지만, 방위대의 권력 구조가 좀 이상하거든. 테러범을 잡아 온 게 너니까 네가 알아서 범인 간수도 해라, 이거지.”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었다. 국내를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범을 잡은 게 현성인데, 다른 직원들은 그 테러범의 관리 감독에 도움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 본부에 테러가 일어나자 그 테러범을 잡고도 관리 안 한 현성의 탓이란다.

“이기적이네요.”

진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도둑놈 심보였다.

“방위대가 너무 일방적으로 당한 것도 커. 이 부끄러운 작태를 숨기기 위해서 누군가 책임을 떠맡아야 하는데, 그게 신현성에게 화살이 돌아간 거지.”

서한은 이참에 방위대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간 현성이 방위대에 대해 말을 삼갔기 때문에 진희도 제대로 된 사정을 들은 적이 없었다.

“방위대는 헌터 범죄에 대해 수사권이 보장된 수사 기관이야. 그리고 헌터들에게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공식적인 방위 기관이기도 하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헌터들은 평균 급이 낮아.”

당장 B급 헌터인 나윤수만 하더라도 방위대에선 정예 취급받는 헌터였다. S급은 현성 한 명, A급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재능의 헌터들이 즐비한 한국의 방위 기관치곤 초라한 숫자였다.

“그러다 보니 신현성 혼자서 방위대 업무를 대부분 담당하는 상황이 됐어. 방위대의 상부는 대부분이 군인 출신이고, 나이가 있다 보니 헌터인 양반도 별로 없어. 실무와는 거리가 멀지. 결국 발로 뛰는 건 신현성이고, 실력도 좋으니 자연스럽게 방위대의 중심이 신현성이 된 거야.”

하지만 딱딱한 사고방식과 군인식 계급에 익숙해진 상부가 그 꼴을 좋게 볼 리 만무했다.

젊으면서도 유능한 아랫사람을 탐탁지 못하게 여긴 그들은 현성의 일 처리마다 방해하곤 했다.

“이건 아까 말했던 중앙 귀족들과 다를 바가 없군.”

“아, 저도 그 생각했어요.”

진희와 서한의 생각이 일치했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은 비열해지게 마련이다.

“방위대 상부는 무능한데도 고집이 세다는 소문은 기업 쪽에서도 파다해. 그래서 사이도 안 좋지.”

“현성 씨가 매일 상사 욕을 하던데, 그 이유가 있었네요.”

“차라리 윗대가리들을 다 치워 버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올라서면 좋으련만, 그런 야망은 또 없어서 문제지. 그 녀석 여우처럼 웃지만 정의감은 대단하거든.”

“외모 차별이에요.”

“지금 그게 문제냐?”

서한이 헛기침하고 말을 이었다.

“하여간 방위대 상부는 이 상황을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있어. 안 그래도 테러범을 잡은 수훈 때문에 벼르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꼬투리를 잡았다 싶은 거지. 관리본부도 비슷한 꼴이고.”

“관리본부랑 방위대는 왜 사이가 나쁜 거예요? 어차피 산하기관 아니에요?”

“그것도 좀 묘해. 이건 좀 정치적인 이야기긴 한데.”

서한은 한숨과 함께 설명했다.

“관리본부는 저번 여당(정권)에서 만든 기관이야. 만든 지는 대충 15년쯤 됐네. 그리고 방위대는 5년쯤 된, 이번 여당에서 만든 기관이지. 정권 교체가 되다 보니, 신생 정부 기관들의 역할 배분이 묘하게 됐어.”

“그냥 통합하면 안 되는 건가요?”

“안 되지. 관리본부는 정책의 수립과 법안을 만드는 기관이지, 무력 기관이 아니야. 반대로 방위대는 철저히 국가 방위를 위해 만들어진 무력 기관이고. 무력 기관은 정치에 관여하면 안 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군대가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과 비슷해.”

“아하, 이해가 되네요. 근데 관리본부에서 현성 씨를 싫어하는 이유는 뭐예요?”

“이건 신현성 잘못도 좀 있어. 걘 방위대 실세이면서 동시에 헌터들의 규제 정책에 관심이 깊거든.”

현성은 여기저기 건드린 기관이 많았다. 헌터와 기업 규제, 지역 방위를 위한 상비군 설치 등등, 기업 입장에선 현성의 제안 대부분이 거슬렸을 것이다.

그건 헌터 관리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관리본부는 친(親)기업 성향이 강해. 본부장부터 아래 간부들의 정치 성향이 뚜렷하거든. 그래서 A급 헌터 시험에 기업 인사를 부르기도 하잖아.”

“하긴, 거기 실장인가 하는 사람도 기업 사람들과 친하더라고요.”

“우리(금강)야 관리본부랑 굳이 친하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기업에선 로비도 많이 해. 그런 관리본부인데 신현성이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요약하자면 방위대는 밥그릇 뺏기기 싫어서 현성을 노리고 있고, 관리본부는 현성의 정치 성향과 참견에 칼을 갈고 있었다는 뜻이다.

긴 이야기였지만 결국 자존심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나라 잘 돌아가네요.”

“여차여차 돌아가긴 하지.”

진희의 넌더리 난다는 말투에 서한이 쓰게 웃었다.

그의 정치적 활동도 깨끗하다고만 볼 순 없다 보니, 방위대와 관리본부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이번 테러의 책임을 현성 씨가 뒤집어쓰고 있나요?”

“안 되게 막으려고 하지만, 어느 정도 감수는 해야겠지. 내부적인 징계가 있긴 할 거야.”

기업의 입장에서 더 이상 관여하기도 어려웠다.

진희는 서한의 말을 이해했다. 금강 기업의 후계자가 과하게 개입하면 반발이 있을 수도 있었다.

“사정을 듣고 나니 띠껍긴 하네요.”

비속어를 섞어가며 혀를 찬 진희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테러범에 대해서 조사를 계속하려면 현성과 방위대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무리 방위대가 힘이 없다 하더라도, 수사권을 지닌 기관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성도 어엿한 동료였다. 그가 테러범을 막기 위해 노력해온 걸 알기에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하던 중, 마침 관리본부에서 A급 승급 시험을 봤던 때가 떠올랐다.

“혹시 서한 씨는 공무원의 부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죄를 덮기 위해선 더 큰 죄로 가리면 된다. 진희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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