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6화
진희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윤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없긴 합니다. 그 부단장이란 녀석이 침입했단 건 알겠지만요.”
적이 자신의 뒤를 잡았다고 생각하여 반격하려던 순간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마법이었어?”
“잘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것도 못 느껴서…… 검사를 받았는데 잔여 마력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어디 다친 흔적도 없었대요. 아, 그리고.”
윤수가 자기 자신도 의아하단 얼굴로 막사의 천막을 들췄다. 자신 말고도 많은 사람이 치료받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던 서한이 혀를 차며 말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군.”
“맞아요.”
놀라운 일이었다. 병상에 있는 모든 직원은 상처 하나 없었다. 진단하고 있던 의사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건물 무너진 거 보면 아시겠지만, 폭발이 있긴 했대요. 그런데 폭발에 휩싸였던 직원들이 모두 무사해요. 놀라서 계단에서 굴렀다거나 탈출하다 넘어졌다는 경상자는 있지만 테러범들에게 직접 공격당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처음엔 테러가 아니라 사고가 아닌가 싶었다더라고요.”
테러범이 보여줬던 초창기 모습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유력자들에게 무력으로 테러를 일삼던 그들이 매우 평화적인 방식으로 자신들의 동료를 탈취했다.
현성이 인상을 찌푸렸다.
“폭발이 있었는데 상처가 없단 게 말이 돼? CCTV 영상에선 문제없대?”
“일단 테러범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어요. 그냥 갑자기 폭발이 일어났고, 사람들이 놀라서 쓰러지는 화면밖에 없다더라고요. 건물이 무너졌는데 거기에 깔린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요.”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천장이 무너짐에도 깔린 사람도 없었고, 바닥이 무너졌음에도 어디 하나 부러진 사람이 없었다.
“오싹하군. 그런 말도 안 되는 일까지 가능하단 말이지.”
서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테러범의 신출귀몰함은 둘째 치고,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벌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테러 수준의 난동을 부렸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고, 자신들의 목적인 동료 탈환은 성공했다.
방위대 입장에선 완벽한 패배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반항조차 할 수 없는 매우 굴욕적인 패배.
잠시 막사 안에 적막이 흘렀다. 침묵을 깨뜨린 것은 천막을 들추고 들어온 이세영이었다.
“다 모여 있으시네요.”
이세영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진희에게도 눈웃음을 쳤지만 진희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상황은 어때?”
“우리 쪽 헌터들이 주변을 살피곤 있지만, 큰 단서는 없는 것 같아요. 인명 피해가 전무하단 소식만 들었네요.”
세영은 팔짱을 끼며 턱으로 윤수를 가리켰다.
“그나마 거기 계신 분이 테러범의 목소리를 들은 유일한 분이에요. 다른 직원분들은 테러범의 옷자락도 못 봤다더군요. 덕분에 행적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완전 농락당했군.”
“맞아요. 아무리 방위대가 허술했다고 해도, 이 정도로 당할 줄은 몰랐어요.”
세영의 평가는 냉정했지만 옳은 말이었다. 현성은 말이 없었고 윤수는 입을 꾹 다물며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에 세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러분을 탓하는 게 아닙니다. 인력 부족이란 건 알고 있으니까요. 신현성 씨가 없는 틈을 타 공격해 온 것 아닙니까. 만약 주변 헌터들이 좀 더 협의적이었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세영은 답답하다는 듯 서한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정책 회의 때도 나왔던 사안입니다. 상위 등급 헌터들의 병역 의무에 대해 깊이 논의할 필요가 있어요. 이사님이 그 이상한 던전에 가겠다고 불참하시지만 않았어도 제법 승산이 있었을 텐데요.”
“난 그런 정책에 찬성한다고 말한 적 없다. 그리고 그게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불평이냐?”
“네, 지금이니까 낼 수 있는 의견이죠. 이 피해를 보고도 찾아온 헌터가 한 명이라도 있었나요? 다들 SNS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지,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서한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이마에 손을 올렸다. 모든 일에 자신의 이상을 대입하는 세영의 안 좋은 버릇이 나온 탓이다.
“폭발이 일어난 직후, 테러범이 나타났다고 연락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와야 하는 것 아닌가요? 듣자 하니 직원이 긴급 구조 문자를 주변에 있던 헌터 수백 명에게 날렸다는데 한 명도 찾아온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이게 말이나 됩니까? 한국은 정의감이란 단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가요?”
세영의 말투는 점점 격해져 갔다. 서한의 앞에서는 유독 공격적으로 변하는 세영이었기에 대화는 점점 말다툼으로 변질해 갔다.
결국 중간에 낀 카온이 둘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때, 진희가 떠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만요, 세영 씨.”
“네, 무슨 일인가요?”
“아까 폭발이 일어난 직후에 헌터들에게 문자를 날렸다고 했죠?”
“맞아요.”
“사태가 진정된 후가 아니라?”
“정확히 폭발 직후입니다. 직원들의 대처가 빨랐죠.”
“내용은 뭔가요?”
“테러리스트에 의해 정부 기관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강남구에 거주하는 헌터 분들의 시급한 도움을 바랍니다…… 같은 문장이었다고 해요.”
“분명 아까 여기 직원들은 윤수 씨를 제외하고 테러범들의 옷자락도 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랬죠.”
진희가 이번엔 윤수에게 물었다.
“윤수 씨가 일어난 건 언제쯤인가요?”
“어…… 상황이 다 정리되고, 여기 막사에서 눈을 떴어요.”
“테러범의 목소리를 들은 건 윤수 씨뿐이니까, 증언도 깨어나서 하셨겠네요.”
“네, 맞아요.”
진희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펴며 말했다.
“직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폭발에 당했을 테니, 이게 테러범의 짓이란 걸 아무도 몰랐겠죠? 유일하게 테러범의 정체를 알고 있던 건 윤수 씨뿐이었는데 기절하고 있었고요. 게다가 문자는 폭발이 일어난 직후에 보내졌다고 했어요. 그것도 ‘테러리스트’란 단어를 명시해서요.”
세영과 서한의 시선이 진희에게 모였다.
“테러범이 직접 위해를 가한 적도, 모습을 드러낸 적도 없으니 직원들은 테러라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게 당연해요. 그런데 그 문자를 보냈다는 사람은, 어떻게 폭발이 나자마자 이게 테러범의 소행이라고 알고 있던 건가요?”
진희의 말을 끝으로 막사 안에 기나긴 적막이 감돌았다.
“문자 보낸 사람, 그리고 상황 파악한 직원, 지금 당장 찾으세요.”
어쩌면 방위대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썩어 있을지도 모른다. 진희의 말을 끝으로 서한과 현성이 동시에 막사를 나갔다.
* * *
“웬일로 우리 딸이 전화를 다 걸었대.”
서혁은 전화를 받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희에게서 전화가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얼굴은커녕 목소리까지 잊어버리겠다는 농담도 덧붙였다.
하지만 진희는 서혁의 우스갯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말했다.
-미안, 테러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어. 의뢰를 하고 싶어.
“음, 진희 부탁이라면 무료로 조사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냥 받아. 이쪽 일에 가족 관계까지 연관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내 딸이지만 성격 참 대쪽 같다. 이것도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거란 걸 아는 서혁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좋아, 어떤 의뢰인지는 들어보고 가격을 정할게. 말해봐.”
-테러범의 본거지나 정체를 알고 싶다 같은 건 어렵지?
“어렵지. 괴짜도 모르는 걸 내가 알겠어?”
걔는 알고 있어도 말 안 해줄 것 같은데, 하고 전화 너머의 진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방위대에 테러범과 유착한 인물이 있는 것 같아.
“호오.”
-그 사람을 좀 찾아줘. 나도 찾으려고는 하는데, 시선이 몰려서.
“맞다, 최근 A급 됐다고 했지. 게다가 유명인까지 물 먹였다면서?”
-그것 때문에 날 안 좋게 보는 사람이 좀 늘었거든. 그래서 아빠한테 의뢰하는 거야.
자신을 믿는다는 딸의 말에 기쁘긴 했지만, 점점 더 위험한 길로 향하고 있단 생각에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최근 유력자들에게 주목받는 이슈는 당연히 테러였다. 솜씨 좋은 헌터를 호위로 두면 안전했던 과거와 달리, 수준급의 실력을 지닌 테러범의 등장은 불안의 신호탄이었다.
테러범을 잡아달란 이야기부터 테러범을 고용할 수 없냐는 의뢰까지 받아본 서혁이었지만, 정작 테러범의 정체를 파헤치는 건 진전이 없었다.
현성과 함께 알아낸 건 테러범이 이주민이란 추측 정도였다.
서혁은 한참을 대답하지 않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들어주는 건 어렵지 않아. 테러범에 비하면 일반인 뒷조사야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여기까지 파고들게 되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어. 정부 쪽 일은 특히.”
-알아.
“괜찮겠니?”
-괜찮아. 더는 모른 체할 수 없게 되었거든.
진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서혁은 자신의 딸이 한번 마음먹은 건 반드시 해내는 성격이란 걸 알고 있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진희의 고집을 꺾어 본 적이 없었다.
서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좋아, 알았어. 한번 알아볼게.”
-고마워. 돈은…….
“의뢰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한꺼번에 줘. 선수금은 필요 없으니까.”
-알았어.
진희는 의뢰에 대해서 몇 가지 더 덧붙이곤 전화를 끊었다. 서혁은 폰을 다시 주머니로 집어넣으며,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죄송해요, 갑자기 전화를 받아서.”
“괜찮아요. 제가 갑자기 찾아온 거니까요.”
진희와 대화하느라 목이 탔던 서혁이 테이블 위의 컵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이곳은 자택 근처의 작은 카페였다. 손님이 드물고 조용한 이 카페는 서혁이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가끔 들르는 장소이기도 했다.
자신의 신상을 철저히 가리는 서혁이었기에, 이 카페에 누구와 같이 찾아온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물며 진희조차도 서혁이 이 카페 단골임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여성은 서혁이 오는 걸 예측이라도 한 듯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혁이 카페에 들렸을 때, 그녀는 그가 즐겨 먹던 커피를 미리 주문한 상태로 그를 반겼다.
“브리온 같은 대기업이 날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당황스럽네요.”
“브리온에서 서혁 씨를 찾은 게 아니에요. 제가 찾아낸 거죠.”
브리온은 서혁의 본명조차 모를 것이다. 외국계 기업인 브리온은 괴짜에 신경을 쓰면 더 썼지, 한국에서만 활동하는 탐정인 서혁을 경계하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온의 쌍둥이, 클로이는 달랐다.
“서혁 씨의 능력은 저만 알고 있거든요.”
그녀는 서혁에게 의뢰를 위해 찾아왔다. 브리온도, 금강도 알아내지 못한 서혁의 동선을 예측까지 하면서.
“방금 의뢰가 또 늘어서 바쁩니다만, 그래도 성의를 봐서 들어볼까요?”
서혁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진희와 똑 닮은 웃음에 클로이도 마주 웃었다.
“이주민에 대해서 알고 싶어요. 한국에 숨어 있는 이주민 모조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