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5화
“근데 이야기의 결말은 항상 영웅이 이기는 걸로 끝나잖아요. 그럼 우리도 걔들 못 이기는 거 아니에요?”
마야의 합당한 의문이었다. 결국 모든 게 운명대로, 순리대로 이어진다면 자신들의 행위는 결국 무용한 게 아닌가. 마야의 물음에 부단장이 작게 웃었다.
“마야 씨는 교육 시간에 잘 듣지 않았군요.”
“조금 졸긴 했죠.”
“많이 졸았을 거예요. 우리 가문의 목표를 아시나요?”
부단장의 물음에 마야가 잠깐 고민하는 듯하다 이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어…… ‘운명을 개척하자’요?”
“맞습니다.”
부단장은 커피를 내려놓고 레인을 조금 더 편한 자세로 눕히기 위해 다리를 바로 했다. 허벅지 위에 레인의 머리를 올리고 말을 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성벽을 부숴, 그 세계 사람들의 운명을 자신의 뜻대로 바꿀 자유를 쥐여 주자는 뜻이지요.”
“아하.”
“그렇다면 마야 씨, 저희가 계속해서 성벽을 부수고, 모든 세상 사람들의 운명이 자유롭게 해방된다면, 영웅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동화 속 영웅들처럼 모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할까요?”
“아니겠죠? 성벽이 사라진다는 건 운명이란 게 소용없는 세상이 되니까요.”
“맞아요, 그게 우리가 바라는 겁니다. 즉, 이 세상의 성벽을 부수고 난다면, 제아무리 영웅이라고 해도 숙적의 앞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직 운명의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이 지는 일이 없을 뿐이죠.”
세상이 위험에 빠지면 그 위험을 해결하기 위한 영웅이 등장한다.
운명이 건재한 세상이라면, 영웅은 세상의 보정을 받으며 위험을 해결한다. 말하자면 주인공 보정이다. 세상의 주인공이 영웅이 되고, 악역은 조연으로서 퇴장한다.
뻔한 스토리, 뻔한 클리셰. 그게 바로 세상의 운명이고, 성벽이 지키고 있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성벽이 무너지면 모든 운명이 사라진다.
영웅이 악당이 될 수도, 악당이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어제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기적은 흔한 마법이 될 테고, 인과관계는 비틀려 예상이란 게 소용없는 세상이 탄생한다.
그게 가문이 원하는 것, 부단장이 바라는 세상이었다.
“우리는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에요. 영웅들의 운명이 흐려지는 순간을요.”
“그, 그렇군요.”
이해가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마야의 떨떠름한 얼굴에 부단장이 작게 웃었다.
“마야 씨는 함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를 수도 있겠네요.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세상은 착실하게 무너져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무너지기 시작하는 세상을 보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때가 되면 그 녀석들을 이길 수 있나요?”
“아무렴요.”
부단장은 확신을 담은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운명을 파괴하는 길을 스스로 걷고 있거든요.”
* * *
성공했다. 진희는 손잡이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느끼며 직감했다.
검은 정확하게 적의 목을 꿰뚫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 덕분에 붉은 기사의 검은 박살 났고, 양옆의 서한과 카온이 붉은 기사의 양팔을 날려 버렸다. 팔이 잘리고, 검이 부러지며, 목이 뚫렸다.
완벽한 승리. 그렇게 생각한 진희는 고개를 들어 붉은 기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기사의 체격은 진희보다 크다. 큰 키와 덩치는 기사답게 늠름했다.
그리고 그 얼굴 또한 차분하고 수려한 이목구비가.
“뭐야?”
자신과도 똑같은 얼굴이.
“너, 왜 울고 있어?”
울고 있었다.
부서진 투구 안에 있는 얼굴은 눈물 자국이 선명한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회색빛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 한평생 봐왔던 자신의 얼굴은 본 적 없는 슬픔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붉은 기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망한 눈으로 진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진희가 저도 모르게 손에 쥐고 있던 검에 힘을 빼자, 바르그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데드(Undead)군.]
“뭐?”
[죽지 못했어. 그래, 그래서 네 영혼이 ‘두 개’가 아니었던 거야.]
“무슨 소리야, 바르그?”
[잘 들어, 서진희.]
붉은 기사의 몸이 허물어져 간다. 팔이 잘리고 목이 뚫렸음에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붉은 기사의 신체는 진희의 위로 쓰러졌다.
가벼웠다. 피가 돌지 않는 신체는 무섭도록 차가웠다.
[이 신체는 이미 죽었어. 죽은 신체에, 너의 잔류 영혼을 이용해 누군가가 꼭두각시를 만든 거야. 모든 기억과 감정은 너(진희)에게 흡수되었지만, 다 흡수되지 못하고 남은 찌꺼기(바제트)는 이 신체에 남아 있어.]
환생했음에도 진희의 자아가 충돌하지 않은 이유.
그건 상처 입은 바제트의 영혼이 산산조각이 나, 자신을 유지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야.]
정령 바르그는 단언했다.
[누군가가 네 영혼을 이용했어.]
그 결과물이 언데드다.
바제트는 비통한 죽음 끝에, 시체와 영혼마저 능욕당하고 있던 것이다.
진희는 자신에게 다가와 붉은 기사의 시체를 치우고 일으켜 주는 카온을 보며 말했다.
“카온.”
“예.”
“나중에, 내가 죽은 다음의 이야기 좀 자세히 알려줘.”
이제 더 이상과 과거로부터 도망갈 수 없었다. 진희의 눈빛에 카온이 두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던전은 공략되었다.
붉은 기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일행은 수정구를 개방했던 폐교 운동장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만신창이였다. 카온과 서한은 말할 것도 없었고, 큰 주술을 사용한 현성은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다. 연속된 공간도약으로 유나는 두통을 참고 있었고, 난생처음 던전을 공략한 종혁은 안색이 새파랬다.
오로지 진희만이 힘든 기색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손안에 있는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박살 난 수정구에 더 이상의 마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언데드가 된 자신, 잔류 영혼, 그리고 꼭두각시.
연상되는 건 한 가지다. 진희가 현성에게 그 단서에 대해 말하려 하던 그때, 운동장 저편에서 청하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누, 누나! 현성 아저씨!”
청하는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방위대가 공격당했대요! 테러범들에게요!”
현성이 이를 갈았다. 험악해진 현성의 인상에 서한이 그의 등을 툭 두드리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상황이 어떻대?”
“어, 어, 현성 아저씨를 찾는데, 방위대가 공격당해서 큰일 났다고만 들었어요.”
청하의 말에 서한이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통화음이 울리고, 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에요? 제게 전화를 다 하고.
“방위대 공격당했단다. 너라면 소식 들었겠지. 나도 곧 돌아갈 건데, 너 오늘 스케줄에 관리본부 정책 회의 참석 있었으니까, 가는 길에 애들 데리고 상황 파악 좀 도와줘.”
-……우리가 정부와 친하게 지낸 적이 있던가요?
“우리와도 관련된 사건이니까 말하는 거야, 진희도 듣고 있으니까 좀 도와봐라.”
전화 너머의 목소리, 이세영의 말투가 단숨에 바뀌었다.
-진희 씨의 부탁인가요?
진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부탁이라고 둘러대란 뜻이었다. 서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러니까 얼른…….”
-걱정 마세요, 이사님이 말씀하시자마자 소집시켰으니까요. 10분 내로 달려갈 거예요.
행동력 하나는 빠르다. 아마 진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이번 부탁을 빌미로 거래를 하자 했을지도 몰랐다. 서한이 어쩔 수 없이 거래를 승낙하면 ‘이미 지원을 보내뒀어요.’ 하고 느긋하게 대답할 셈이었겠지.
-그런데 정부 쪽 사건에 저희가 개입해도 되나요? 관리본부 쪽엔 꼰대가 좀 있을 텐데.
“그건 걱정 마.”
서한이 현성을 바라보자, 현성이 부탁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관리본부에 미치지 못하지만 현성 또한 방위대에선 끗발 좀 날리는 인물이었다.
“상황 파악보다, 테러범들이 무슨 방법으로 도망쳤는지 잘 알아보라고 전해줘요.”
진희가 덧붙였다. 서한은 시영에게 진희의 말을 전했다.
시영의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끝나자, 현성이 가장 먼저 짐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고로, 전 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경계를 하지 않은 탓이에요.”
“탓하려면 끝도 없어요. 그리고 아직 할 말 남았으니까, 보육원으로 돌아가서 잠깐 쉬고 가세요.”
“네?”
“그쪽은 괜찮을 거예요. 서한 씨랑 그 동생도 도와준다고 하니까.”
아마 가봤자 의미는 없을 것이다. 게이트를 사용하는 그들의 행방을 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테러범은 다시 공격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들이 방위대를 기습할 수 있는 근거는 현성의 빈자리였다.
현성과 서한, 그리고 진희가 없는 틈에 일을 벌인 게 분명했다. 마야가 던전에서 일행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든 일이나, 종혁을 무력화시킨 이유는 일행의 발을 던전에 묶어두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진희의 설득에도 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윤수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안전을 확인해야 해요.”
“……그건 어쩔 수 없네요.”
현성이 자신의 후배를 얼마나 위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기에 진희도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럼 저희 모두 같이 가죠.”
피곤하지만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카온은 태양을 보는 순간 상처가 회복되고 있었고, 진희는 애당초 마력 소모 말곤 큰 상처가 없었다.
가장 중상은 서한이었는데, 그는 찰과상에 불과하다며 걱정 말라고 말했다.
현성은 혼자 갈 수 있다며 진희의 제안을 또다시 거절하려 했지만, 주술의 후유증으로 비틀거리는 사람을 혼자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종혁아, 넌 먼저 돌아가 있어. 시영이 부르고, 주변 경계 잘하라고 전해.”
“네, 네!”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챈 종혁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행은 방위대 본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방위대 본부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화재가 이제 막 진정되었는지 건물 곳곳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소방관과 응급 대원의 고함이 난무하는 가운데, 현성은 주변 직원을 붙들고 윤수의 안부를 물었다.
다행히 윤수는 안전하게 구조되었다고 했다. 현성은 다급히 윤수가 휴식을 취하고 있다는 임시 막사로 달려갔다.
“괜찮아?”
“아, 선배님.”
머리에 붕대를 두른 윤수가 어색하게 웃으며 현성을 반겼다. 간이침대에 앉아 있던 그에겐 상처라곤 보이지 않았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저보단 선배님들이 더 심각해 보이는데요.”
핏자국이 남아 있는 카온이나 서한의 몰골에 윤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히려 침대에 누워야 할 건 윤수가 아니라 카온과 서한으로 보였다.
“후우, 안 다쳤으니 다행이다.”
현성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침대 앞 의자에 주저앉았다. 윤수가 볼을 긁적이며 일행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괜찮아요, 다친 곳 없다니 다행이네요.”
윤수는 테러범 레인을 가둔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기습까지 당한 와중에 테러범의 목표나 다름없던 감옥의 지킴이가 멀쩡하다니, 어딘가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