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4화
그 변장술을 알고 있었음에도 안일하게 대처했다. 타인을 파티에 영입할 땐 좀 더 면밀히 관찰했어야 했는데, 서한이 데려왔단 사실에 쉽게 마야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서한이 자신의 탓이라 말했지만 진희는 괜찮다며 화제를 넘겼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진희의 눈에도 알아차리기 힘든 변장을 서한이 눈치채긴 힘들었을 것이다.
‘진짜 마야가 어떻게 됐는지가 문제지만.’
안 그래도 복잡한 상황이기에 진희는 굳이 그 문제를 꺼내지 않았다.
“종혁이 깨어나면 계획을 준비하죠.”
“진짜 통할까?”
서한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단 얼굴로 진희가 준비해 온 소품을 살펴보았다.
“안 통하면 뭐 어때요. 효과 있으면 좋고, 아님 마는 거죠.”
태평한 진희의 대답이었지만 서한으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찬성한 작전이었다.
카온은 울며 겨자 먹는 표정으로 소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 떠올린 진희 씨도 참 대단하네요.”
그 모습을 보며 유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마침 종혁이가 있으니까, 마력 회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네요. 서한 씨랑 카온이 마력이 모자라죠?”
“아직 덜 회복됐어.”
“제가 보충할게요.”
이 계획의 중점은 두 가지다. 붉은 기사에게 얼마나 빈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틈을 타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가.
진희는 일점 돌파를 제안했다. 붉은 기사의 방어력을 뚫어내기 위해, 진희와 카온, 서한과 현성이 동시에 공격을 가하자는 이야기였다.
말은 쉽지만 그런 상황이 나올지는 미지수였다.
“신호가 잡혔어요.”
트랩을 체크하던 유나가 말했다. 트랩에 누군가가 걸렸다는 신호였다. 이 거대한 던전 속에 일행 말고 트랩에 걸릴 사람은 뻔했다.
시간이다. 모두가 무기를 들었다.
* * *
[일어나자마자 전쟁터구나.]
‘그러게 빨리 좀 일어나지 그랬어.’
잠에서 깨어난 바르그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 이쪽으로 넘어오면서 영혼에 상처가 많이 났거든. 그런데 여기는 어디야?]
‘던전.’
진희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일행은 곳곳에 숨은 채로 대기하고 있었고, 진희는 대로의 한가운데에 서서 적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의 전생이라. 아까 만났던 그 기사인가?]
‘맞아.’
[그래서 영혼이 똑 닮았었구나.]
‘영혼이 닮아?’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기사랑 나랑 영혼이 같단 이야기야?’
[몰랐나?]
오히려 바르그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저건 ‘너’야. 네 쪽이 완벽하긴 하지만, 저쪽도 불안정한 상태로나마 너의 영혼을 가진 분신이야.]
진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붉은 기사가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만들어진 환상, 혹은 몬스터라고 생각했다.
제국에서 붉은 기사를 마주했던 카온도 그렇게 말했었다. 바제트는 지구로 환생했으니, 저 기사는 바제트가 아닌 바제트를 똑같이 본뜬 몬스터일 것이라고.
하지만 바르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니야. 신체는 누가 재단했을 수도 있겠지만, 영혼만은 분명 너야.]
‘영혼이란 게 둘로 나뉠 수도 있어?’
[가능해.]
‘하지만 난 영혼을 나눈 적 없어.’
[영혼이 ‘남은’ 걸 수도 있지.]
남는다. 진희는 그 표현이 거슬렸다. 바르그에게 말뜻을 설명하라고 말하려던 찰나, 길 저편에서 붉은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기사는 잠시 진희를 바라보더니, 검을 꺼내 들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갑옷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난 게 보였지만 큰 상처는 없었다. 정령의 번개를 맞았음에도 끄떡없는 모습이었다.
“준비.”
진희의 말에 곳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진희의 곁에 유나가 다가왔다.
“으으. 하기 싫은데.”
유나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산발로 만든 채, 진희의 곁에 섰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근처 건물 안에 있던, 제국민의 일상복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울기나 해.”
“네에.”
유나는 한숨을 내쉬며 진희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진희는 한 손으로 유나의 허리를 휘감고, 다른 손에 있던 검을 들어 그녀의 목을 겨눴다.
유나가 엉성한 연기실력으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멈춰라, 기사 바제트! 움직이면 이 백성의 목숨은 없다.”
아주 당당하고 활기찬 음성이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온이 들으란 듯 한숨을 쉬었다.
바제트는 기사도를 지키는 모범적인 기사다. 진희가 된 지금과 다르게, 당시의 바제트는 책임과 정의에 매몰된 안타까운 영웅이었다.
진희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만약 붉은 기사가 과거의 자신처럼 생각하며, 약간의 이성이라도 남아 있다면.
“검을 버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기사 바제트, 검을 버려라!”
절대 이 제안을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작전명 인질극.
진희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만큼, 가장 잔인한 계획을 구상했다.
붉은 기사는 멈춰 섰다. 유나와 진희의 모습을 보고 망설이는 듯 보였지만, 무기는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조악한 인질극이 먹히고 있단 뜻이었다.
‘앞으로.’
종혁이 깨어났기에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었다. 진희는 일행에게 명령을 내리고, 유나에게 귓속말했다.
“싸움이 시작되면 바로 도망쳐. 공간 도약할 수 있지?”
“네.”
유나의 마법으로 붉은 기사에게 타격을 입히긴 어렵다. 진희는 유나와 종혁을 전력에서 제외했다.
싸움에 나서는 건 언제나처럼 진희와 카온, 현성과 서한이다.
진희는 불량스러운 어조로 붉은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기사? 소중한 제국민의 목숨을 버릴 셈인가?”
“…….”
기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말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고민에 빠진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희는 그 모습에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제국의 수도가 갑작스럽게 공습당했을 때의 자신도 저랬었다. 제국민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돌아다녔지만, 돌아온 건 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기사로서의 징계뿐이었다.
‘짜증 나네.’
과거의 과오를 직접 눈으로 보는 기분이었다.
“드라노이드 가문의 기사도가 땅에 떨어졌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백성을 버리다니 말이야.”
거듭 도발을 해봤지만 붉은 기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상황을 살피고 있는 것일까, 진희는 유나의 허리를 쿡 찔렀다.
도약을 준비하란 신호였다.
“그럼 난 명예가 없는 기사를 혼내줘야겠네.”
진희가 과장되게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인질을 죽이겠다고 대놓고 액션을 취한 셈이다. 진희의 검이 유나의 목젖 근처까지 다다른 그 순간.
‘온다.’
붉은 기사가 달려왔다. 다리에 마력을 집중하고, 먼 거리를 단숨에 좁혀오는 빠른 속도. 수십 미터의 거리를 초 단위로 돌파한다.
하지만 붉은 기사의 기습적인 공격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이 정도의 도발에 넘어올 줄은 몰랐지만.’
좀 더 이색적인 도발을 해봐야 하나 싶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유나는 그 즉시 공간을 도약해 진희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진희는 휘두르려던 검을 앞으로 잡았다.
아마 붉은 기사는 길의 좌우에 대기하고 있는 카온과 서한의 기습을 예감하고 있을 것이다. 뻔히 마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녀의 마력을 탐지하는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니까.
그렇기에 길의 정중앙으로 달려오면서 양팔에 마력을 집중해 방어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게 맹점이었다.
“현성 씨!”
진희는 이 자리에 없는 현성을 불렀다.
현성이 숨어 있던 장소는 다름 아닌.
[벼락장군이 춤을 추시며 죄인의 머리 위로 떨어지시니. 천지왕이 작두를 내려, 죄인을 심판하리라!]
하늘.
그것도 까마득한 높이의 하늘에서 주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질극은 붉은 기사의 빈틈을 만들기 위한 계획이었지만, 동시에 현성의 위치를 감지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끄는 역할도 겸했다.
진희와 서한, 카온에게 감각을 집중하던 붉은 기사가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늦었다. 그녀는 이미 진희에게 돌진하고 있었고, 현성의 주술은 하늘에서 발사되어 붉은 기사를 향해 하강하고 있다.
그가 행한 주술은 천지왕의 측근, 죄인을 심판하는 벼락장군의 벼락을 소환하는 것. 막대한 마력이 들어 쉽게 만들 수 없는 주술을, 종혁의 서포트 덕에 최고의 위력으로 시전했다.
마력의 출처는 진희였다.
진희는 서한과 카온, 그리고 현성에게 마력을 계속해서 퍼부으며 전력의 공격을 하도록 일러두었다.
현성이 만들어낸, 신의 힘을 빌린 벼락은 하늘을 찢고 지상으로 하강한다.
그 찬란한 풍경에 붉은 기사는 순간 눈을 빼앗겼다. 검은색 하늘을 가르는 새하얀 불빛이 두 눈을 가린다.
“전투 중에 한눈팔면 안 되지.”
“……!”
진희는 현성을 부름과 동시에 붉은 기사에게 달려갔다.
붉은 기사가 들려오는 음성에 놀라 다시 전방을 방어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하늘에선 현성이, 양옆에선 서한과 카온이. 그리고 정면에선 진희가 달려든다.
“그 갑갑한 투구 안 좀 보자.”
벼락과 검이 동시에 붉은 기사를 타격했다.
검술을 겨루는 건 의미가 없다. 진희와 붉은 기사는 호각일 테니까.
전투를 하는 것도 승산이 적다. 전성기의 바제트는 한 개의 기사단을 홀로 이겼던 자였다.
그렇다면 승부는 단숨에, 기습으로 결정한다.
개인의 기량 따윈 상관없이 오로지 화력만으로 결정되는 단순한 돌진이 진희의 계획이었다.
“하앗!”
붉은 기사는 현명했다. 가장 위협적인 공격은 머리를 노리는 벼락이라 판단하고, 검을 가로로 들어 벼락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마력을 뽑아내 전방에 방어막을 쳤다. 진희, 서한과 카온의 공격은 마력으로 막아내겠단 생각이었다.
이것도 예상한 바다.
“유나!”
기사단장의 수준은 그저 개인의 무력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자신에게 한정된 자원, 인재를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는가도 중요하다. 용병술은 군사의 기본 중의 기본.
진희의 부름에 대기하고 있던 유나가 또다시 공간도약을 사용한다.
대상은 진희, 목표는 붉은 기사의 바로 앞. 공간도약에 필요한 마력은 모두 진희에게서 가져간다.
단 한걸음의 공간도약이지만, 붉은 기사의 방어막을 통과했다.
“안녕?”
진희가 방긋 웃으며 검을 들었다.
붉은 기사가 허망하게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바라보았다.
* * *
“그들은 살아 돌아올 거예요.”
“네?”
레인을 구하고 나서, 부단장은 평범하게 차를 타고 귀환했다. 일행이 자주 가는 룸 카페에 들어서서 커피를 받아온 부단장은 마야에게 컵을 건넸다.
레인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터라, 부단장이 양팔로 품고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반신이 만든 곳이라면서요? 엄청 위험한 던전 아니었어요? 그 뭐더라, 단장님의 흔적도 거기 있다던데.”
“맞아요. 한 세상을 박살 낸 악마가 그곳에 보관되어 있죠.”
“그런데 어떻게 살아와요?”
“영웅이니까요.”
부단장은 평온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영웅의 운명은 그런 법이에요. 진정한 적을 만나기 전엔 무너지는 일이 없죠.”
“아무리 그래도…….”
부단장의 운명예찬은 항상 듣던 이야기였지만, 언제나 설득력이 떨어졌다.
결국 영웅은 운명이 정해준 적이 아닌 이상 죽일 수 없단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