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3화
진희의 공격은 계속해서 기세를 탔다. 앞선 서한과 카온의 공격과는 달랐다. 백이면 백 모두 다른 방식과 검술로 밀어붙이는 진희에게 붉은 기사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진희는 점점 붉은 기사를 몰아갔다. 둘은 대로변이 아닌 좁은 골목으로 점차 이동했다.
붉은 기사는 어떤 공격이라도 받아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검술을 지녔지만, 진희 또한 어떤 방어라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검술을 지녔다.
둘의 재능이 평등하다면, 방어가 아닌 공격이 유리한 건 당연했다.
“선빵 필승이거든.”
진희가 붉은 기사의 품 안으로 돌진했다.
모든 공격은 줄타기와 같다. 진희가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붉은 기사의 검이 진희를 찌를 테지.
그러나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는 건 붉은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방심한다면 진희의 검은 망설임 없이 붉은 기사의 목을 노릴 것이다.
만약 진희가 붉은 기사를 완벽히 이기려 한다면, 위험한 줄타기를 몇 번이고 성공해야 할 것이다. 승률은 높게 잡아도 50%,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목표는 승리가 아니었다.
“으랏차!”
진희가 호쾌하게 숨을 내뱉으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가드하고 있던 붉은 기사의 검이 위로 튕겨 나갔다. 아예 검을 놓아버렸다면 좋았겠지만, 붉은 기사는 결코 검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좋다. 진희는 검에 마력을 휘감으며, 마음속으로 바르그의 이름을 외쳤다.
‘슬슬 일어나지?’
반응이 왔다. 검을 마력으로 끊임없이 괴롭혔더니, 잠들어 있던 바르그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여긴 어디야?]
‘잔말 말고 집중해. 그 번개 또 쓸 수 있어?’
붉은 기사에겐 마력이 있다면, 진희에겐 바르그가 있다. 은색의 검신이 작게 진동했다. 일어났다는 신호다.
바르그는 번개와 바람의 정령. 정령왕 바로 아래의 고위 정령이 무기화된 만큼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번개의 장점은 치유 불가와 방어력 무시. 바람은 예리함과 속도를 부여한다.
진희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의 마력을 검에 담았다. 신체를 강화하는 마력을 최소화하고, 오로지 검에 집중한다.
‘눈치 빠르네.’
붉은 기사는 방어를 멈추고 곧장 뒤로 도약했다. 심상치 않은 위력임을 눈치챈 것이다.
이게 진희와 다른 점이었다. 만약 진희였다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곧장 공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 차이점이 붉은 기사가 패하게 될 원인이 되었다.
“유나야! 뛰어!”
서한과 카온을 마법으로 짊어지고 있던 유나가 진희의 호령에 바로 뛰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들으며 진희 또한 앞으로 달렸다.
목표는 당연히 붉은 기사의 정면. 그러나 검이 노리는 건 기사의 목이 아니었다.
“……!”
“늦었어!”
진희의 검은 붉은 기사의 바로 앞, 땅바닥을 조준했다. 번개와 바람을 품은 검은 천둥처럼 땅을 후려쳤다.
콰앙-!
폭음이 터지며 바닥이 무너졌다.
‘역시.’
바닥을 부수자 지하수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의 수도는 지하수로가 잘 갖춰져 있기로 유명하다. 현대의 그것처럼 체계적이고 깔끔하진 않았지만, 규모만큼은 수도의 수로를 책임질 정도로 거대했다.
바닥을 무너뜨린 진희는 곧장 위로 도약했다. 바닥의 깊이는 고작해야 5m. 작정하고 뛰어오른다면 올라오기 어려운 높이도 아니다.
그렇기에 진희는 골목의 양쪽 건물에도 검을 휘둘렀다.
건물이 무너지며, 그 잔해가 바닥을 향해 쏟아진다.
“어딜 올라오려고.”
그제야 지하수로로 추락하고 있던 붉은 기사가 진희의 계획을 깨닫고 점프하려 했지만, 이미 진희는 기사를 향해 번개를 내리꽂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타앙-!
검에서 튀어나온 바르그의 번개가 붉은 기사를 바닥으로 추락시켰다.
그리고 몇 번이고 번개를 뽑아냈다. 먼지로 인해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연속된 충격으로 주변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박살이 났다.
‘상처는 없겠지만.’
정령의 번개와 진희의 마력이 섞인 강력한 공격이었지만, 붉은 기사가 이 정도 공격으로 상처를 입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진희는 몇 번이고 검을 휘둘러 주변 건물을 무너뜨리고, 곧장 유나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붉은 기사는 건물들의 수많은 잔해에 깔렸다. 이걸로 잠깐의 시간은 벌 수 있었다.
“헉, 헉, 빠, 빨리 오셨네요!”
“넘겨.”
진희는 유나에게서 서한과 카온을 넘겨받았다. 신장 차이가 어마어마하기에 두 사내는 진희의 어깨에 매달린 채로 땅바닥에 발이 닿았지만, 진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최대한 잘 따라와.”
“네, 네!”
진희는 다리를 마력으로 강화했다. 지금부터 전력질주로 도망칠 생각이었다.
“이크.”
달리기 시작하자 그들이 싸웠던 장소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렸다. 붉은 기사가 건물들의 잔해를 뒤엎고 있었다. 진희는 최대한 기척을 줄이며, 건물 사이로 몸을 숨겼다.
* * *
“결국 ‘저건’ 누구야?”
겨우 얻은 휴식 시간이었다. 서한은 유나에게서 받은 붕대로 머리의 상처를 막으며 말했다. 카온의 팔을 살펴보고 있던 진희는 한숨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예요.”
“너라니, 넌 여기 있잖아.”
“저는 여기 있고, 저기 있는 건 예전의 저예요.”
예전의 자신. 그 불가사의한 단어에 서한이 인상을 찌푸렸다.
“꼭 네가 두 명 존재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정확한 표현이네요.”
이제 숨기는 것도 어려웠다. 진희는 자신을 복잡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카온을 뒤로하고 서한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유나는 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을 탐색하고 있었다.
“전 환생했어요.”
카온에 이어서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서한은 마음을 가다듬고 진희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전생은 바제트로, 수도방위기사 단장이었고, 배신당해서 죽었죠. 그리고 눈 떠보니 지금의 저였어요.”
“그래서 갑자기 등장한 거군.”
그렇다면 아귀가 맞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괴물 신인이 튀어나왔다는 이야기보다, 환생해서 힘을 각성했다는 소설 같은 전개가 차라리 믿기 쉬웠다.
물론 지금껏 이주민은 보고된 적 있어도, 환생자가 보고된 적은 없었기에 마냥 수긍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진희가 거짓말을 할 리도 없었다.
“저기에 있는 건 전생의 저였어요. 던전의 환상인지 뭔지는 알 수 없지만요.”
“환상이면 더 끔찍한 일이지.”
저런 괴물의 환상을 실체화할 만큼 대단한 마법사가 있단 뜻이다. 서한은 붉은 기사가 환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 그렇군. 너희 둘은 전생에서 서로 알던 사이였던 거고.”
서한은 카온과 진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내 모습을 한 누군가를 알고 있었어. 그렇지?”
“…….”
진희가 대답하기 곤란해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서한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우습군, 나도 모르는 내가 저쪽 세상에선 너희의 원수였나 봐?”
이번에도 진희는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얼굴을 싫어한다는 농담을 하던 진희와 이유를 알 수 없는 카온의 적대감의 원인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이 처음 진희를 보았을 때 느꼈던 기시감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진희를 보았을 때 묘한 감정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서한은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뭐, 됐어.”
그리고 깔끔하게 고민을 접었다. 이 상황에서 분란을 일으켜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던전에서 나가면 다 설명해. 너희들 과거나, 내 모습을 한 그 사람 얘기도 다 같이. 이제 와서 나랑 관계없는 일이라고 입 다물진 않겠지?”
이미 서한은 동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처음엔 원수처럼 대하던 카온도 의지할 정도였고, 진희에 이르러선 말이 필요 없다.
진희는 쓰게 웃으며 서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의 얼굴을 본 서한이 이를 갈았다.
“너 진짜, 그 표정 정말.”
서한이 진희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미소를 지우기 위해 양손으로 진희의 얼굴을 사정없이 눌러댔다.
“아파요.”
“다신 그 얼굴 좀 하지 마.”
“왜요, 두근거려요?”
서한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
* * *
“그래서 저 괴물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약점 같은 거.”
“없어요.”
서한의 물음에 진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도 불가능해?”
“승산은 대충 5할 정도 되겠네요.”
높은지 낮은지 알 수 없는 수치였다. 바르그의 힘과 수비적인 바제트의 성향을 생각해서 나온 수치였다.
“우리가 다 덤벼들면?”
“음…… 그럼 6할?”
서한이 혀를 찼다. 진희가 자신들의 힘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적이 방어에 치중하면 뚫기 어려워요.”
그저 상성의 문제였다. 높은 방어력과 회피력을 가진 적에게 인원수로 밀어붙여 봐야 소용이 없었다. 서한과 카온은 붉은 기사의 몸놀림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고, 진희에겐 공격력이 부족했다.
“그럼 다른 계획은 없어?”
“글쎄요.”
진희도 턱을 괴고 고민에 잠겼다. 함정, 기습, 어떤 전략을 짜봐도 무난하게 이기는 그림이 안 나왔다.
“나 진짜 강했구나.”
“자기 자랑은 적당히 하고. 전생의 네가 졌던 기억은 없어?”
내가 바제트의 적이었다면 어떤 전략을 사용했을까. 진희는 자신이 패전했던 몇 안 되던 전쟁을 떠올렸다.
“제 잘못으로 진 적은 크게 없는데요.”
“그러세요.”
서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단서가 될 만한 이야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저 기사 이성은 있는 거겠죠?”
문득 뭔가가 생각난 듯 진희가 손뼉을 쳤다.
“대화를 할 수 있는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성이 없으면 그런 싸움이 나올 리 없어.”
서한은 시종일관 방어하며 카온과 서한의 공세를 파훼시키던 붉은 기사를 떠올렸다.
“으음, 그럼 시간을 벌 수단이 있긴 한데요.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진희는 서한과 카온에게 자신의 작전을 설명했다. 처음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듣던 둘은 이내 썩은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너 기사 아니었어? 기사도는 어따 팔아먹었어?”
“그게 밥 먹여주나요? 저 지금 헌터거든요?”
진희의 말에 카온이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 * *
일행은 현성, 종혁과 조우했다.
한참 주변을 탐색하던 유나가 던전의 구조를 파악한 덕분이었다.
“던전 넓이는 말도 안 되게 넓긴 한데 법칙이 있어요. 공간이 뒤틀려 있거든요. 어느 한 방향으로만 걸어도 누군가와 만나게 돼요.”
“무슨 법칙인데?”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같은 느낌이에요.”
뭔 소린지 모르겠다. 진희는 자신의 비유가 탁월했다는 표정의 유나를 지나쳐 현성에게 다가갔다. 현성은 굳은 표정으로 종혁을 업고 있었다.
“그냥 기절한 거네요.”
“죄송합니다. 설마 마야가 테러범일 줄은…….”
“괜찮아요, 저도 변장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까.”
진희는 과거 마야를 만난 적 있었다. 수정구를 발견한 곳, 거석상과의 전투가 있던 던전이 마야를 처음 만난 장소였다. 그때 목소리와 체격까지 바뀌는 변장술을 목격했다.
‘안일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