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2화
“어?”
“왜 그래?”
“트랩에 뭔가 걸렸어요.”
주변을 살피던 유나가 걸음을 멈췄다.
“트랩?”
“네, 걸어올 때 교차로마다 표식 트랩을 새겨뒀거든요. 누가 밟거나 거길 지나가면 신호를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 것도 했어?”
중간중간 마법을 쓰긴 했지만 워낙 마력이 적어 탐지 마법인 줄 알았다. 진희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유나가 걸음의 방향을 바꾸며 대답했다.
“잡기술이에요. 실은 길드에서 혜수 선생님이 갑자기 나타나실 때가 많아서, 그것 때문에 만든 마법이거든요. 정령의 마나랑 마력을 섞어 쓰는 거라 보통은 알아차리기 힘들어요.”
“……혜수 씨가 나타나면 곤란해?”
“네, 민혁이랑 실험하려는데 나타나서 말리신다니까요.”
그건 네 실험 방향이 잘못돼서 그런 게 아닐까. 진희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참고 유나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잠시만요, 제가 알아서…….”
“이게 빠르니까 가만있어.”
진희가 유나를 안고는 빠르게 달렸다. 비행 마법보다 빠른 속도에 유나는 비명을 질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던전의 모습이 제국의 수도라는 걸 알아차렸을 때부터 진희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클로이가 말한 제국의 멸망이란 단어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여, 여기서 좌측!”
방향을 꺾으며 한 번 더 가속했다. 순식간에 지나쳐가는 주변 풍경을 구경하던 유나가 갑자기 진희의 어깨를 쳤다.
“저쪽!”
진희가 자리에 멈춰 서서 유나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있었다.
“……너는.”
바닥에 유나를 내려놓은 진희가 자신을 기다리는 적을 보며 두 눈을 크게 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
“……마스터.”
서한과 카온은 각각 양쪽 벽에 처박혀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바닥은 피로 얼룩져 있고, 카온의 방패는 박살이 난 채로 땅에 나뒹굴고 있었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들은 계속해서 이동하며, 혹은 도망치며 싸워왔던 것인지, 대로변 너머에 반파된 집들이 보였다.
서한은 머리를 크게 다쳤는지 얼굴에 피를 흘리고 있었고, 카온은 팔이 피 칠갑이 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눈앞의 적에게 당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서한과 카온보다, 혼란스러운 전투의 흔적보다 먼저 눈을 사로잡는 건 정면에 서 있는 적이었다.
“누구야.”
“…….”
진희의 물음에 적은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갑옷을 입고 아밍소드에 묻은 피를 털어낸 기사가 진희를 바라보았다.
“누구냐고 물었다. 기사.”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붉은 기사는 자세를 잡았다. 허리를 낮추고 검을 수평으로 든 자세. 진희가 아밍소드를 들 때 애용하는 기초적인 검술 자세였다.
익숙하면서 익숙하지 않다.
자신이 매일 입었던 갑옷을 남이 입고 있는 걸 보는 것이, 자신이 행했던 자세를 남이 똑같이 따라 하는 걸 보는 것이.
그리고 자신(진희)보다 더 자신(바제트) 같은 마력을 보는 것이.
“대답해!”
진희가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붉은 기사가 돌진해 왔다.
강력한 금색의 마력을 온몸에 두르고, 대검처럼 변한 아밍소드가 진희의 목을 노려왔다.
“윽!”
한 박자 늦었던 진희가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했다. 고개를 숙이고 곧장 검을 뽑았지만, 이미 붉은 기사가 한발 앞섰다. 붉은 기사가 검을 휘두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뒤돌려 차기를 갈긴다.
진희는 침착하게 검으로 발차기를 막아내고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시야의 사각(死角)을 노리기 위해 붉은 기사가 고개를 들기 전, 허공을 박차 기사의 뒤로 돌아간다. 그와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붉은 기사 또한 막아낸다. 진희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등 뒤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자연스럽게 검을 들어 진희의 공격을 쳐냈다.
“진짜라고?”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자신이 방어했다면 저렇게 방어했겠지 싶은 완벽한 자세였다. 진희는 황급히 뒤로 도약했다. 반격할 기회가 있었지만, 만약 저 기사가 자신과 똑같은 검술을 구사한다면 공격이 무용이 될 가능성이 컸다.
“얘 누구야!”
“내가 알겠냐. 내가 너한테 묻고 싶다.”
진희가 소리치자 서한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붉은 기사는 차분히 몸을 돌려 진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자세를 취하며, 이번엔 진희의 공격을 기다렸다.
단 세 합을 나눈 것뿐이지만, 진희는 저 붉은 기사가 생김새뿐 아니라 과거의 자신과 흡사한 실력을 가졌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과 불은 비틀려라!]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유나가 마법을 사용했다. 정령과 융합한 마력은 특유의 화력을 뽐내며 붉은 기사에게 날아갔지만, 그녀는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허, 헐.”
오히려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두르자, 유나의 마법이 단숨에 무력화되어 허공에 흩어졌다. 유나가 허망한 목소리를 낼 때, 진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인가 보네.”
저 괴물 같은 마력 저항력.
전쟁의 선두에 섰을 때, 모든 마법사가 공포에 떨며 도망쳤던 원인이었다.
‘진짜 나야.’
저 방어력을 보고도 부정하긴 힘들었다. 진희가 언제나 전성기의 자신과 비교할 때, 가장 부족한 것으로 꼽는 게 마력 저항력이었다.
진희로 환생하고 나서 마력의 보유량은 크게 늘었다. 비록 마력 회로는 성장 중이었지만, 저장된 마력은 마법사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거대했다.
그러나 출력량은 달랐다. 아무리 마력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한들, 그걸 뽑아내는 출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연료가 많다고 엔진이 강해지는 건 아니니까.
전성기의 바제트는 연료와 엔진 성능 모두 공평하게 거대했다.
그렇기에 마력 저항력, 마력 출력에서 따를 자가 없던 기사였다.
“조금 자존심 상하네.”
진희가 중얼거렸다. 저 기사가 자신의 전성기를 구현한 괴물인지, 혹은 환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기 자신에게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너, 진짜 바제트야?”
“…….”
대답을 기대하면 안 되겠지. 게다가 내가 나냐는 선문답도 생각해 보면 우스운 짓이었다. 진희는 말이 없는 기사를 보며 다시 검을 들고 자세를 취했다.
“유나야, 서한 씨랑 카온 회수해.”
“네, 네?”
“여기서 이탈할 거야.”
“도망치는 건가요?”
“전략적 후퇴야.”
자기 자신과 전력으로 싸운다는 건 제법 기대되는 일이긴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붉은 기사를 볼 때마다 묘한 불쾌감에 소름이 일었지만, 지금은 서한과 카온의 안전을 확보하는 게 제일 중요했다.
“하, 하지만 따라오면 어떡하죠?”
유나는 공포가 어린 눈으로 붉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마법사이자 정령사인 그녀의 눈엔 기사가 몸에 두르고 있는 강대한 마력이 자세히 보였다. 감히 대들 수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괜찮아, 물러서게는 할 수 있으니까.”
과거의 자신이 아무리 괴물이라지만, 환생하고 나서 진희도 놀고 있던 것만은 아니다.
천재에겐 천장이 없다. 노력만 지속된다면 성장은 끝이 없다.
“난 천재거든.”
그리고 진희는 자신이 천재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녀는 유나가 곧잘 하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네가 진짜 나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난 그때 나보다 강해.”
진희는 확신했다. 검에 금색의 마력을 두르고, 이번엔 진희가 기사에게 돌진했다.
* * *
“어, 신호가 잡혀요!”
종혁이 현성에게 소리쳤다. 현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불을 바라보았다. 등불은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지만, 등불이 향하는 방향을 알기에 문제는 없었다.
“누나! 카온 형! 누구 없어요?”
종혁은 텔레파시를 통해 계속해서 일행을 호출했다. 처음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거리가 가까워진 것인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소음과 함께 들려왔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될 것 같아요!”
“알았어요.”
현성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혹시 모를 기습을 대비하여 주변에 경계 주술을 사용하며 집중하는 현성의 뒷모습을 보며 마야가 작게 중얼거렸다.
“시간은 대충 됐나.”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봤지만, 듣던 대로 깜깜하고 암울한 하늘이다. 성벽이 무너진 세상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기상이변이라고 했던가.
마야는 비죽 웃었다.
“마야 씨? 안 오세요?”
마야가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으니 앞서 나가던 종혁이 물었다.
“아쉽다, 얼굴은 내 취향인데.”
“네?”
“나 순한 인상을 참 좋아하거든. 근데 이제 볼 일이 없겠네.”
“그게 무슨…….”
갑자기 인상이 달라진 마야에게 종혁이 고개를 갸웃하려던 그때.
마야의 손이 종혁의 어깨에 닿았다.
“어?”
종혁의 몸이 굳었다. 손이 닿은 어깨부터 시작된 경직은 가슴을 타고 발끝까지 내려왔다.
고통은 없었으나 감각도 없었다. 온몸의 감각과 마력이 굳어버린 종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걱정 마, 죽이진 않을게. 마음에 들었으니까, 넌 살아 돌아왔으면 좋겠다.”
“……마야 씨?”
한참 집중을 하고 있던 현성이 뒤편의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 보기엔 마야가 웃는 얼굴로 종혁의 어깨를 매만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마력에 현성이 황급히 다가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현성이 종혁을 마야에게서 떼어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종혁의 얼굴은 핏기가 없이 창백했다. 눈만 부릅뜨고 있는 종혁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댄 현성은 그나마 숨을 쉰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으이구,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안 되죠. 그 언니라면 바로 내 목을 찔러버렸을 텐데.”
“뭐?”
고개를 든 현성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야를 발견했다.
“시간도 잘 버텼겠다, 전 이만 가볼게요!”
현성이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내 던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뤄진 공격이었으나, 이미 마야의 근처엔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게이트였다.
현성은 그제야 마야가 진희가 과거에 말했던, 게이트를 열고 닫는 테러범이란 걸 눈치챘다.
동시에 시간을 버텼다는 문장의 뜻도 깨달았다. 자신을 이곳에 묶어놓는다는 건, 곧 본부에 있는 테러범을 노리고 있다는 뜻과 같았다.
“설마……!”
“이미 늦었어요, 여우 눈 아저씨.”
마야는 자신이 연 게이트로 천천히 빠져나갔다. 현성이 재빨리 공격 주술을 던졌으나 게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마야가 느긋하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봐야만 했다.
* * *
전쟁터를 누빌 때의 바제트는 과감했지만, 동시에 냉철했다. 철저히 승산이 있는 전투 위주로 출동했고, 승전고를 울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전선을 밀어버리는 안전하고도 확실한 전략을 선호했다.
붉은 기사는 딱 그때의 바제트와 같았다.
변수를 줄이고 완벽한 승리를 위해 싸운다. 승산이 있기 때문에 싸운다는 단순한 진리를 따른다.
그러나 진희는 달랐다. 진희와 바제트가 하나가 되고 나서는, 그 진리를 정면에서 부정했다.
“싸우니까 이기는 거야, 바보야.”
승리할 수 있으니 싸우는 게 아니다. 싸우니까 승리하는 것이다.
수동과 능동의 다름은 곧 승패를 결정한다.
“……!”
“슬슬 무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