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1화
현성의 말에 마야가 감동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정의감이 대단하시네요.”
“그런 대단한 책임감이 있는 건 아니에요. 어찌 상황이 이렇게 된 거죠.”
“무슨 상황인데요?”
“있습니다, 그런 게.”
더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현성의 단호한 말에 마야가 어색하게 웃었다. 진희 앞에서 웃으며 농담을 하던 현성이었지만 낯선 사람에겐 벽이 두꺼웠다.
‘이미 늦었지만.’
마야는 텔레파시에 집중하고 있는 종혁을 돌아보았다.
‘이 애만 오래 붙잡고 있으면 된다, 이거죠?’
나머지는 이곳의 악마가 해결해 줄 거라고 그랬다. 마야는 그녀에게 지시를 내린 상사를 떠올리며 남모르게 웃었다.
* * *
말도 안 된다.
서한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전투에서 절망을 느꼈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눈곱만큼도. 천재라고 불렸던 서한마저도 전력의 차이를 여실히 느낄 정도였다.
“마력을 사용한 공격은 소용없습니다.”
힘겹게 공격을 막아낸 카온이 피를 뱉으며 말했다. 붉은 기사는 여유라도 부리듯 뒤로 물러나 카온과 서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저게 빈틈을 찾기 위한 관찰이란 것을 알고 있다. 서한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검을 들었다.
방금까지 붉은 기사를 노도와 같이 몰아쳤던 서한이지만, 모든 공격은 저 불가사의한 움직임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공격도 성공하지 못해 짜증이 일던 서한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뭐로 공격하라고. 마법?”
“마찬가지입니다. 마력 저항력이 드래곤 수준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거 인간이냐?”
“전성기엔 더했습니다.”
카온이 방패를 들고 서한의 앞으로 나섰다. 대련을 자주 한 덕분인지 둘의 호흡은 잘 맞았다. 카온이 시야를 방해하거나 방패로 공격을 막아서고, 서한이 계속해서 빈틈을 찾아내 공격하는 단순한 조합이었다.
둘의 호흡은 어디 하나 엇갈리는 곳 없이 완벽했다. 서한은 이 이상 개인을 상대하는 완벽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달은 건, 이 대치가 무려 30분 동안 지속된 후였다.
‘파훼되고 있어.’
붉은 기사는 무리하는 일이 없었다. 카온의 방패를 뚫을 공격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억지로 공격하려 들지 않았다.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서한의 반격이 허용될 수도 있다는 그 작은 가능성을 완벽히 없애기 위함이었다.
압도적인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방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카온과 서한의 공격을 관찰하며 둘의 조합을 조금씩 파훼해 나가고 있다.
그 증거로 서한과 카온의 온몸엔 잔상처가 가득했지만, 붉은 기사의 갑옷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자신들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서한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반격의 기회를 주지 않고, 완벽하게 이길 속셈이군.”
“예.”
진지하게 전투에 몰입한 진희와 똑같은 성향이었다.
진희는 도박적인 전투를 즐겨 하지만, 변수를 완전히 줄인 압도적인 싸움 또한 종종 보여줬다.
서한이나 현성과 대결할 땐 서로 합을 나누는 걸 좋아했지만, 그녀가 기분이 나쁜 날엔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하고 당하곤 했다.
붉은 기사는 그런 기분 나쁜 날의 진희와 똑 닮았다.
‘오히려…….’
진희보다도 상대하기 어렵다. 검술의 숙련도는 큰 차이가 없었다. 단지 붉은 기사에겐 어마어마한 화력이 존재했다.
카온의 방어를 뚫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마력 출력, 마력 공격을 모조리 막아내는 마력 저항력. 이길 만한 방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약점은 없나?”
이미 서한은 카온이 저 붉은 기사와 안면이 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게 진희와 연관되어 있음을 진작 깨달았다.
“없습니다.”
그렇기에 카온의 대답을 듣고 역시나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저 기사가 진희와 똑같은 타입의 검사라면, 실력 차이가 아니라면 이길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진희가 이곳에 있었다면.’
서한은 한심한 생각이라며 각오를 다졌다.
아무리 승산이 없다 한들 남에게 기댈 만큼 약해진 건 아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붉은 투구 너머의 안광에 전의가 흔들렸지만 서한은 딛고 일어섰다.
“강하게 간다.”
뒤는 없다. 지지부진한 공방을 계속해봐야 자신들의 움직임이 파훼될 뿐이다. 서한의 말에 카온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온 또한 이 전투에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도박 수라도 던져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서한은 이를 악물고 검에 마력을 담았다.
* * *
“슬슬 지겹지 않아?”
철창을 손보던 윤수는 고개를 돌렸다. 철창 안의 소년, 테러범 레인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윤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감자의 수다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윤수가 대답 없이 철창을 만지고만 있자, 레인이 비웃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도 웃기네. 그냥 죽이면 될 걸, 왜 지금까지 살려두는 거야?”
“…….”
“안 그래? 네 상관은 날 죽일 생각도 하고 있던데, 정작 저기 위쪽 사람들은 아니었나 봐?”
레인의 처분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상부에선 레인의 문제를 언급하는 걸 꺼렸고, 그간 현성의 집착 어린 활동에 겨우 레인의 마력 회로를 모두 추출해 버리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미 현성의 주술에 의해 마력 대부분이 고갈된 레인은, 최근에 실시된 마력 회로 추출로 인해 완전한 일반인이 되었다. 마법은 물론이고 신체를 강화하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윤수는 손보던 일을 끝내고 다시 레인을 보았다. 식사는 꾸준히 주고 있으나 제대로 먹는 일이 없다 보니, 레인의 몰골은 초췌하다 못해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죄수복 아래의 팔과 다리는 뼈만 남아 있고, 앙상한 얼굴에 머리만이 더벅머리인 채라 마치 비렁뱅이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형형한 회색 눈동자만은 건재했다.
“점심은 30분 후에 챙겨줄 거야. 이번엔 다 먹도록 해.”
윤수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레인의 몰골이 처참해도 동정심이 생기진 않았다. 테러범들로 인해 생긴 사상자는 어마어마했고, 아직 저들의 정체를 밝히지 못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아직 테러를 일으킨 적들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인 하나 잡은 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걸 알기에 현성은 몸소 이 철창을 만들었다.
온갖 원귀와 신이 적힌 부적을 도배한 철창이었다. 만지기만 해도 저주받고, 억지로 떼려 하면 죽음에 이르는 흉악한 부적들이었다.
현성이 윤수에게 레인을 맡기고 간 것도 이 부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성은 레인을 구하기 위해 테러범들이 찾아오리라 예상했다.
‘불가능할 거 같긴 하지만.’
윤수는 레인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하품하고 자리에 앉았다. 레인이 똑바로 보이는 정면이 윤수의 자리였다.
철창만이 아니라 이 주변엔 수십 가지가 넘는 주술들이 결계를 펼치고 있었다. 윤수마저도 현성이 돌아오기 전까진 나갈 수 없었다.
윤수는 S급 헌터라고 해도 이 결계를 쉽게 뚫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슬슬 출발하셨겠지?’
현성이 진희 일행과 던전으로 떠난 지 세 시간이 넘었다. 윤수는 길게는 사흘까지 레인을 감시하란 임무를 받았다. 현성은 몇 번이고 당부했다. 자신이 없는 틈을 타 테러범들이 습격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곳은 헌터 관측 방위대 본부에 위치한 건물이었다. 경계가 삼엄하기론 국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곳에 침입해서, 결계까지 뚫고 들어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흰 너무 늦었어.”
“응?”
“차라리 날 빨리 죽였어야 했어.”
온몸이 포박되어 의자에 앉아 있던 레인이 몸을 굴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천장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몸은 그분이 만들어주신 거야. 인간의 신체를 만드는 것쯤,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처음으로 레인의 입에서 배후에 대한 단서가 나오자, 윤수가 침착한 어조로 되물었다.
이제야 대답을 해주는군, 레인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너흰 내가 마법을 쓸 수 없다고 안심하고 있겠지. 인간의 몸에서 마력을 뺏아가면, 운명에 순응하는 평범함밖에 남지 않으니까. 하지만 간과한 게 있어.”
“뭘?”
“이 몸은 중요하지 않다는 걸. 범인(凡人)인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내 영혼의 주인을.”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하지만 윤수는 그 말에 단서가 있을지 몰라 하나하나 기억했다.
“내 영혼은 오로지 내 것이 아니야. 그분이 빌려주신 자그마한 영혼의 파편이 날 이렇게 성장시켰지.”
“그분이 누군데?”
“부단장님.”
“……부단장?”
한 단체의 이인자를 뜻하는 단어다. 윤수는 부단장이란 키워드보다, 그보다 상위 계급인 단장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부단장님은 자신의 영혼, 운명을 나눠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자신의 힘이 줄어도, 부하의 안전과 성공을 위하시는 멋진 분이시거든.”
“……꼭 영혼으로 분신 놀이를 하고 있단 것처럼 들리는데.”
“하하, 재밌는 비유네. 비슷해. 나는 그분의 분신이나 다름없으니까. 내 보잘것없는 영혼은 그분의 영혼 한 방울에 의지하고 있거든.”
영혼.
현대의 마법이 발전할 때마다 거론되는 뜨거운 화제다. 마법사들은 영혼의 존재를 긍정하지만, 영혼을 구조화하는 것엔 실패했다. 죽은 인간의 영혼이 어디로 가는지, 영혼이란 건 어떻게 탄생하는지. 아직 인간의 영혼은 미지의 영역이다.
오로지 주술사, 소환사와 같은 특수한 직종들만이 영혼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또한 영혼의 시작과 끝, 정체에 대해선 깊이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레인은 부단장이 그 영혼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처럼 말했다.
그렇다면 부단장이란 사람도 주술사란 말일까? 윤수는 레인의 말에 집중했다.
“차라리 날 빨리 죽여서, 그분의 영혼에 상처 입혔다면 너희도 승산이 있었을 텐데.”
레인은 천장을 바라보던 고개를 돌렸다. 윤수는 회색빛 눈동자를 마주치고 흠칫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레인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무서우리만치 어둡고 가라앉은 눈동자가 윤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오래 살려두면 안 됐어. 그분이 오고 있는 게, 느껴지거든.”
“……오고 있다고?”
“그래. 오고 계셔.”
윤수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붙어 있던 전화기를 들었다. 방위대 본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발신음만 울릴 뿐 아무도 받지 않았다.
“너희는 오해하고 있어- 요.”
“젠장, 설마…….”
“제가 두려워하는 건 당신들이 아니에요.”
윤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정말로 이 아이를 숨기고 싶었다면, 여기가 아니라 그 여자의 곁에 뒀음 됐을 텐데. 이런 결계로 안심하다니 미련하군요. 아니다.”
레인이 어울리지 않는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착한 아이처럼 주변을 너무 믿었다고 해야 하나.”
콰앙-!
바깥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윤수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레인만을 지켜보았다.
폭발음 이후엔 희미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테러다. 윤수는 직감했다.
“방위대도 엉망이군요. 제대로 된 전력이라곤 그 주술사뿐이고, 내부는 뿌리부터 썩어 있어요. 이렇게 일이 쉽게 풀릴 줄은 몰랐는데, 잘됐네요.”
“넌…… 누구지?”
“이 아이의 부모예요. 그간 아이를 돌봐주느라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부단장. 레인이 말했던 그자다. 레인의 영혼에 자신의 영혼을 섞어둔 자,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진 레인마저도 우러러보는 능력자.
“레인은 이제.”
“제가 데려갈게요.”
그제야 윤수는 자신의 뒤에서 말소리가 이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