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80화
17. Undead
제국에 게이트가 대량 생성되어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용인들은 움직였다. 주군이 죽은 후였기에, 가문의 명령에 따라 국경 지대를 수비하던 중이었다.
‘그럴 리 없어.’
제국의 수도로 입성하던 카온은 어떤 소문을 들었다. 현재 수도로 진격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군대에 그들의 주군인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가 있단 이야기였다.
카온을 비롯한 모든 용인이 소문을 부정했다. 주군은 죽었다. 그녀가 숨을 거두고 묘로 들어가는 것은 가문의 모든 식솔이 똑똑히 보았다.
‘도련님은?’
카온은 바제트의 동생을 주군으로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증오하고 있었다. 그녀가 죽게 된 계기와 시기, 그리고 상황은 동생을 범인이라고 지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 귀족들의 비호에 결국 그 어떤 처벌도 내려지지 않았다.
가문 휘하의 가신들이 인정하지 않았기에 가주 승계는 받지 않았지만, 결국 실질적인 드라노이드 가문의 대표는 바제트의 동생이었다.
카온의 질문에 가문의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르는 일이라니, 확인을 해봐야 하지 않나!’
‘그게, 방에서 나오시질 않으셔서…….’
겁을 먹은 게 분명하다. 카온을 비롯한 용인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의롭고 용기 있던 그들의 주군과는 너무나 달랐다.
바제트가 죽었다 한들 수도 방위의 임무는 아직 드라노이드 가문에 남아 있었다. 가문은 수도의 기사단과 협력하여 병력을 구성하고, 수도의 성벽을 지키기 시작했다.
하늘은 검게 변했다. 해와 달은 뜨지 않았고, 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게이트에서 나온 적들이 습격할 때 나타나는 징조였다.
긴장 상태에서 경계하고 있던 어느 날, 아무런 징조도 없이 성벽이 열렸다.
‘무슨 짓인가!’
카온은 벼락같은 노성을 지르며 성벽을 연 기사를 나무랐다. 적의 부대가 수도의 근방까지 진격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카온이 성벽 너머를 가리키며 크게 화를 내려 하자, 기사가 투구를 벗었다.
‘자네, 왜…….’
기사는 울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성벽 너머를 가리켰다.
‘성벽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오고 계십니다.’
‘뭐?’
‘그분이, 영웅이, 살아 돌아오고 계신단 말입니다.’
그제야 카온은 이 기사가 과거 바제트 아래서 전쟁을 겪었던 기사란 걸 깨달았다. 가슴팍에 전쟁 훈장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카온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성벽 바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서 정체불명의 적군들이 진격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선두.
‘말도 안 돼.’
붉은 갑옷. 드래곤과 별이 그려진 아름다운 갑옷을 입고 있는 한 기사가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바제트가 살아생전 기사들을 이끌고 진군하는 모습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성벽의 기사도 그 장면이 떠올라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붉은 갑옷의 기사는 손을 들었다. 저 수신호를 알고 있다.
‘문을…… 열어라.’
정말 당신입니까. 정말 당신이 다시 살아 돌아오신 겁니까.
그렇다면 어째서.
‘왜, 우릴 공격하시나이까.’
그날, 제국의 수도는 천 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단 일주일 만에 무너졌다.
전쟁에 참가했었던 노련한 기사들은 무릎을 꿇고, 반항조차 하지 않은 채 붉은 기사에게 살해당했고, 황제는 달아나려 했으나 결국 기사에게 목숨을 잃었다.
다른 용인들의 운명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엔 반격하려 했던 그들도 붉은 기사의 검술과 몸놀림을 보고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카온만이 살아남았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혹은 누군가의 은혜였던 것인지. 그는 수도에 나타난 게이트를 통과해 도망칠 수 있었다.
그 게이트를 넘어갈 때 온몸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느꼈지만, 드라노이드 가문의 보물이자 아티팩트였던 호부(護符)를 지니고 있던 덕분인지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카온이 눈을 뜨자, 그를 반긴 건 한국의 서울이었다.
* * *
“큰일 났네.”
진희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주변엔 유나를 제외하곤 다른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여긴 제국이잖아.’
진희가 유나 모르게 작게 욕을 내뱉었다. 상황이 또 묘해졌다. 테러범들이 노리던 수정구를 빼앗아 사용해 봤더니, 전생에서나 봤던 제국의 수도 한복판에 떨어졌다.
우연이라면 신의 장난이고, 누군가의 계략이라면 악질이다.
“던전은 맞지, 여기?”
“맞아요. 떠도는 마나도, 하늘도 현실 세계와는 다르니까요.”
유나는 비교적 빠르게 냉정을 찾았다. 그녀는 정령을 이용해 마을을 빠르게 살피더니 진희에게 짧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아무래도 이곳에 입장할 때 누군가 술수를 부린 것 같아요.”
“술수?”
“네,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했어요.”
던전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던 진희는 유나의 결론에 고개를 갸웃했다.
“술수라니, 누가 일부러 파티를 찢어 놨단 거야?”
“아마도요. 분명 무언가가 마력을 사용해 억지로 공간을 비틀었거든요. 마나가 아닌 인간의 마력이었어요.”
“공간을 비트는 걸 느낄 수 있어?”
“네, 공간 틈에도 정령이 사니까요. 계약했거든요.”
공간의 정령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진희가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유나는 짐짓 자랑하는 듯 어깨를 폈다.
“공간의 정령이라고 해도 여기저기 순간이동이 가능한 건 아니지만요. 적어도 공간의 이상 정도는 발견할 수 있죠. 전 천재거든요.”
유나의 성격이 대충 짐작이 가기 시작한 진희가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녀를 띄워주었다.
“대단하네. 아, 나 예전에 던전 안에서 게이트를 여는 사람을 본 적 있는데, 그것도 정령이 한 거야?”
“……게이트를 열었다고요?”
“응, 게다가 추적도 못 할 정도로 먼 거리를 단숨에 이동하던데.”
유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불가능해요. 저도 공간도약을 쓸 순 있지만 어디까지나 근거리만 가능하고, 제 방처럼 친근한 장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요. 도약하는 양 공간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구조를 파악하고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먼 거리나 익숙하지 않은 장소로의 도약은 곧 자살 행위라고 유나는 덧붙였다.
내가 있는 장소와 도착할 장소의 구조를 완벽히 이해해야만 가능한 게 공간도약이고, 그마저도 거리가 멀어지면 투자되는 마력이 터무니없이 많아진다.
“제가 길드에서 사용하는 공간도약은 한 번 할 때마다 중급 마법 정도의 힘이 들지만, 거기서 2배의 거리만 되더라도 마력은 10배가량 사용해야 돼요.”
결국 정령으로 인한 공간도약은 어려운 일이란 뜻이다.
그럼 대체 그 테러범들은 어떻게 손쉽게 공간도약을 했던 것일까.
“잠깐만, 여기 떨어질 때도 누가 억지로 공간을 비틀었다고 그러지 않았어?”
“네, 분명 인간의 마력이…… 그렇군요.”
유나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를 찢어놓은 게 진희 씨가 만났다던 사람일 수도 있겠어요.”
공간을 비트는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마법사는 드물다. 공간도약까지 사용이 가능한 마법사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 마법사들이 파티를 방해했다기보다, 테러범이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술수를 부렸다는 추론이 더 타당했다.
파티에게 술수를 부렸다는 건, 곧 파티와 함께 이 던전에 입장했단 소리였다. 진희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마야.”
서한이 데려왔다던 그 여자가 수상했다.
* * *
“대열을 갖추고 전진하겠습니다.”
“괘, 괜찮을까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종혁 군이 통신의 중심입니다. 저희 탐색 범위가 가장 넓어요. 먼저 움직여야 합니다.”
종혁은 현성의 말에 겁먹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희를 돕기 위해 던전에 들어가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가지고 출발했지만, 입장하자마자 의지할 사람이 사라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현성의 종혁의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습니다. 여긴 제가 있고, 진희 씨와 카온 씨도 쉽게 당할 인물은 아니니까요.”
현성의 위로에 종혁이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일행의 발목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끊임없이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능력 사용에 장애는 없습니까?”
“던전 때문이지 범위가 좁아졌어요. 이 정도면…… 사방 2, 3㎞ 정도밖에 커버 못 해요.”
“충분합니다.”
진희가 아닌 이상에야 1㎞ 이상의 범위를 탐색하는 건 불가능하다. 3㎞면 인간 레이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현성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향을 지시했다.
“마야 씨도 탐색을 계속해 주세요.”
“네.”
현성은 마야를 진영의 가장 앞을 맡겼다. 두 번째가 레이더 역할의 종혁, 후방을 현성이 맡는다.
‘이상해.’
주술 실력으로 따지면 국내에서 따를 자가 없는 게 현성이었다. 그런 현성이 보기에 이 던전은 그 구조가 특이했다.
‘주술의 흔적이 있어.’
던전에 마법이 걸려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지만, 주술이 사용된 경우는 없었다.
일반적인 주술은 초자연적인 존재, 즉 신이나 요괴에게 힘을 빌려 사용한다. 주술의 주문들은 신에게 바치는 노래나 기도인 경우가 많다.
자연의 마나를 마력으로 치환하여 본인이 주체가 되는 마법사와는 마력을 사용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이 던전에선 주술에서 말하는 ‘신’의 존재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마치 신의 권능을 마력으로 빌린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런 방식의 신비는 주술가가 아니라면 만들어낼 수 없었다.
‘문제는 무슨 신인지 감이 안 잡힌다는 거야.’
현성은 계속해서 하늘과 건물들 사이를 번갈아 관찰했다.
초자연적인 힘이 느껴지는 건 분명했지만, 그게 어떤 신인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해외의 던전에선 신화 속의 존재가 곧잘 나타난다고 하던데, 이 던전도 혹시 그런 종류인 걸까.
“어?”
가장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마야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땅바닥을 가리켰다.
“전투를 한 흔적 같아요.”
벽돌의 바닥엔 검의 상흔과 충격으로 인해 생긴 구덩이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현성은 잠시 마야를 비키게 하곤 바닥을 향해 주술을 사용하였다.
[귀신아, 등불을 밝혀 발자국을 찾는 귀신아, 너의 발목은 어디에 있느냐.]
현성의 응용성에 마야가 감탄했다. 잡귀를 사용하는 주술이었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현성의 손끝에서 나온 등불은 바닥에 닿더니, 이내 둥둥 떠올라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원귀(?鬼)를 길들이신 건가요?”
“조금요.”
발목이 잘린 귀신은 발자국에 집착한다는 특징을 이용한 주술이었다. 다행히 바닥 구덩이는 누군가가 발을 굴러 만든 것인 듯했다.
일행은 등불을 따라 천천히 전진했다.
“……현성 씨는 정부 소속이셨죠?”
“예.”
적막을 견디지 못한 것인지 마야가 현성에게 말을 걸었다.
“왜 정부 소속 헌터가 되셨어요? 아, 실례라면 무시하셔도 괜찮아요. 그저…….”
“정부 소속 헌터가 메리트가 없긴 하죠.”
현성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부, 국가에 소속된다는 건 곧 군인이나 공무원이 된단 소리였다. 실력만 있다면 막대한 부와 명예를 쟁취할 수 있는 헌터들에게 인기가 있는 직장은 아니었다.
해외에선 헌터들의 자산권을 지켜주면서 영입을 하는 제도도 있다곤 하지만, 한국에선 아직 요원한 일이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