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79화
한여름에 낮잠을 자다 보면 간혹 악몽을 꾸곤 한다.
끈적끈적한 공기와 무더운 기온 덕에, 여름날의 악몽은 사람을 끝도 없는 지저로 끌어당기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이 검은빛이 그랬다. 온몸을 사로잡은 빛은 기분 나쁜 감촉과 미묘한 안락함으로 사람을 악몽으로 이끌었다.
[후회한다.]
[돌이킬 수 없었다.]
악몽들이 그렇듯, 끊임없이 반복되는 말소리에 귀가 아팠다.
[나만은 그래서는 안 됐다.]
[나를 믿고 있었을 텐데.]
[네가 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죽고 싶지 않았어.”
서한은 눈을 떴다.
“허억!”
“정신이 듭니까.”
서한은 뺨에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흐릿한 시야를 다잡아 보니 눈앞엔 카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지금.”
“기절하셨습니다.”
“내가?”
“예.”
서한은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아무런 상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정신계 마법에 당한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카온에게 상황을 설명해 달라고 하려 했으나, 주변 환경을 보고 질문을 바꿨다.
“잠깐, 여긴 어디야?”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마을 안에 있었다. 위치는 검은색 벽돌로 장식된 건물들이 즐비한 마을의 대로변으로 마치 중세 유럽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단지 태양과 별이 없는 검은색 하늘이란 점과, 어둡고 우중충한 건물의 색상이 마을이 아닌 묘지를 연상케 했다.
던전의 풍경이 특이한 거야 드문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주변에 아무도 없단 점이었다.
“진희는?”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수정구를 사용하여 던전에 입장할 때 파티가 찢어지게 된 듯했다. 서한의 얼굴이 굳었다.
서한과 카온이 빠졌단 이야기는 파티의 전위 2명이 자리를 비웠단 뜻이었다. 다른 전위는 진희와 현성. 둘 다 탱커 역할을 하긴 어려운 이들이다.
심지어 파티가 더 찢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진희라면 그나마 낫지만, 종혁이나 마야가 홀로 떨어졌다면 그건 더욱 큰일이었다. 후위는 혼자 떨어질 경우 무력할 수밖에 없다.
“일어날게.”
서한이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기절했단 사실이 뼈아팠다.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주변을 탐색해야 했다.
왜 갑자기 악몽을 꾸면서 기절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서한은 빠르게 장비를 확인했다. 그리고 텔레파시를 사용했다.
“……역시 안 들리네.”
그렇단 이야기는 일행이 서로 텔레파시 범위 바깥에 있단 뜻이었다. 혹은 텔레파시가 방해받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종혁이 텔레파시의 중심인 만큼, 최우선적으로 종혁을 찾아내야 했다.
메시지 마법을 중지시키는 던전도 경험해 봤던 서한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선 이동하자.”
“어디로 갑니까?”
“잠깐만.”
서한은 자리를 박차고 올랐다. 그리고 곁에 있던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난리 났군.”
건물이 가득한 이 마을은 끝이 없었다. 지평선까지 가득 채운 검은색 벽돌집을 보며 서한이 혀를 찼다. 아무래도 던전의 규모는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거대한 듯했다.
다시 대로변으로 내려온 서한이 카온에게 말했다.
“우선 한 쪽 방향으로 걸어가자. 우리 둘끼리도 통신이 안 되는 지금 개별행동은 위험해. 위치는…… 이쪽으로.”
서한이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던 카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쪽으로 가는 이유가 있습니까?”
“없어, 감이야.”
“무슨…….”
“이런 상황에선 가만히 있는 게 가장 나쁜 선택이야. 어차피 확률이 반반이라면 우선 움직이는 게 옳아.”
서한은 자신을 노려보는 카온을 지나쳐 걸어갔다.
“믿어라. 던전 경험은 너보다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카온은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서한의 뒤를 따랐다. 던전에 관해선 자신은 초보자였으니 서한의 말을 따르는 게 타당했기 때문이다.
“…….”
주변을 살피며 전진하는 가운데, 둘의 불편한 침묵은 계속 이어졌다.
서한은 신경을 곤두세워 탐색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카온은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서한이 차라리 건물을 박살 내 소동을 부려볼까 고민하던 찰나, 카온이 입을 열었다.
“이 장소, 알고 있습니다.”
“뭐?”
“전 이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카온의 영문 모를 말에 서한이 고개를 돌렸다. 카온은 착잡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제가 살던 세계입니다.”
‘살던 세계?’
서한이 계속 말해보라며 눈짓했다.
“전 다른 세상에서 왔습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멸망한 세상입니다.”
카온은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의 행적을 설명했다.
기나긴 고민 끝에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진희 이외에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서한에게 꺼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다른 세상에서 넘어온 이주민이고, 그 세상은 멸망했단 말만 덧붙였다.
이미 이주민에 대해 알고 있던 서한은 크게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이내 이 던전이 그가 살았던 세계란 사실엔 미심쩍어하는 눈치였다.
“확실해?”
“확실합니다. 그때와 똑같은 풍경이니까요.”
카온이 한숨 어린 목소리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와 똑같은 하늘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써서 이미 멸망한 세계의 마을을 수정구에서 구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만약 이 던전이 멸망했던 당시의 세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면.
“악마도 있을 겁니다.”
“악마?”
“네, 세상을 무너뜨린 악마.”
이 던전의 존재 의의는 예상할 수 없지만,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고, 모든 기사가 목을 놓아 울던 그 시대. 카온은 수도로 달려왔었다.
“이곳은 제국의 수도입니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 가장 먼저 악마에게 멸망된 국가이고, 동시에 재앙의 시작입니다.”
차분히 이야기를 듣는 서한을 바라보며 카온이 나지막이 말했다.
“만약 이곳이 수도와 똑같은 장소라면, 수도를 멸망시킨 악마와 마주할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그 악마를 주의해야 한다?”
“주의가 아니라 도망쳐야 합니다.”
카온은 단호하게 서한의 말을 부정했다.
“제 과거를 이야기해 드리는 이유는, 악마를 마주하면 싸우지 말고 도망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잠깐, 그 악마가 그렇게 강하다고? 너와 내가 있어도?”
“전 지구로 넘어가기 직전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악마에게 당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이 같이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니, 오히려 당신이기에 악마에게 대항할 수 없을 것이다.
카온은 괜히 튀어나올 것 같은 악담을 꾹 삼켰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굳이 이 말을 건넬 필요는 없었다.
“그 악마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악마와 마주하면 전투가 아닌 도주, 그리고 파티를 찾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서한도 파티가 다 모이기 전까진 전투를 지양한다는 판단엔 동의했다. 굳이 과거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말을 했더라도 충분히 이해했을 전략이었다.
하지만 카온은 무조건적인 약속을 원했다.
서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온의 생각이 어떤 건지는 짐작할 수 없었지만, 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하.”
그러나 이미 늦었다. 카온은 서한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이미 악마가 다가오고 있었다.
“도망치십시오.”
“뭐? 잠깐, 등 뒤에 설마…….”
“돌아보지 말고!”
카온이 서한의 어깨를 잡고 자신의 뒤로 당겼다. 그리고 방패와 검을 꺼내 들었다.
“잠깐…….”
당황한 서한이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카온의 커다란 등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대로변 저편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찰칵, 철을 덧댄 군화가 벽돌 바닥을 걸을 때 나는 소리다.
“적이라면 같이 대응을…….”
“됐으니까 도망치십시오. 우선 마스터를 찾아서 데려와 주세요.”
“아깐 도망치자며!”
“이미 늦었으니까 하는 말입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적의 실력을 모르니 카온이 필사적으로 길을 막아서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같이 도망가지 않는 카온의 선택 또한 납득할 수 없었다.
서한이 다시 한번 카온에게 이유를 설명하라고 말하려 하던 그때.
“……어?”
핏줄기가 튀었다.
서한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거대한 카온의 등이 순식간에 날아가 벽에 처박히는 걸 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백여 미터의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두른 작자의 모습을 확인했다.
적색의 갑옷. 드래곤이 수놓아진 아름답지만 녹슨 갑옷을 입은 기사가 서 있었다.
입은 장비는 풀 플레이트 메일. 피부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철갑옷을 입고서.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소름 끼치게 정돈된 검은 도망칠 구석을 모조리 차단하는 방향으로 그를 노린다. 서한은 이 검의 궤적을 본 적 있었다.
모를 리가 없다.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검, 기교의 극에 달해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는 검, 날이 선 마력.
“서진희…….”
그 검을 보고 떠오른 인물은, 당연히 그녀였다. 넋이 나간 서한의 코앞까지 검이 당도했다.
“……헉!”
깜짝 놀라 뒤로 몸을 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서한이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다가온 기사의 검이 그의 미간을 정확히 찔러 들어온다.
“으아아아!”
그때, 벽에 처박혀 있던 카온이 방패를 집어 던졌다. 기사의 옆구리를 노리는 방패였으나, 기사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패를 유유히 회피했다.
몸놀림마저도 그녀를 생각나게 한다. 저 무겁고 움직이기 힘든 갑옷을 입고도 완벽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서한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뒤로 물러섰다. 곧장 검을 빼 들고, 다시 대로변으로 걸어오는 카온을 향해 말했다. 카온의 갑옷 옆구리는 이미 박살 나 출혈이 나고 있었다.
“저거, 누구냐?”
“…….”
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들고 기사의 앞에 설 뿐이었다.
이윽고 카온이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서한은 똑똑히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잊지 못할 상대였다.
“로드(Lord).”
적색 갑옷의 기사, 바제트 레임 드라노이드가 다시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