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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78화 (78/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78화

정령왕은 진희에게 미래를 물어보았고, 진희는 중립이라 대답했다.

정확히는 이렇게 말했다.

‘알아서 잘 살게요.’

건드리는 사람이 영웅이라면 악당이 될 테고, 악당이 선빵 치면 영웅이 될 거라고 대답했다. 심플하지만 직설적인 대답에 이번에 웃은 건 정령왕이었다.

이후 정령왕은 현시대에 대한 짤막한 코멘트를 남겼다.

‘운명의 굴레가 커진다는 건, 곧 그 운명이 무너졌을 때의 후폭풍 또한 커진단 뜻이야. 조심해, 네 운명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어긋나면 넌 또다시 성벽을 파괴하게 될 거야.’

대체 자신이 뭔 짓을 했다고 성벽을 파괴한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몸조심하란 뜻으로 여긴 진희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처음엔 자신의 성향을 살피려는 정령왕의 의도가 좋게 보이진 않았다. 결국 A급 시험도 이자가 자신을 보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고, 그는 진희를 의심하고 있는 형편이었으니까. 하지만 진희는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희가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란 걸 확인한 정령왕은 순식간에 태도를 바꿔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혜수에게 위험이 될 인물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껄렁한 태도 뒤에 숨겨진 애정과 솔직함이 싫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얻은 것도 있고.’

진희는 이후 궁금했던 점을 여럿 물었다. 운명과 성벽의 상관관계, 환생과 이민자, 징조의 색 등등. 모든 의문점이 풀린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괴짜와 이세영에게 질문하는 것보다야 훨씬 편했다.

“언제든 놀러 오세요. 꼭 그이 때문이 아니라, 진희 씨 같은 분 정말 좋아하거든요.”

혜수가 악수를 위해 손을 건넸다. 진희는 그 손을 맞잡으며 대답했다.

“그럴게요. 아무래도 저희 애가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니까요.”

혜수의 타박에 기가 죽어 있던 유나가 번뜩 고개를 들고 말했다.

“네! 민혁이 꼭 보내주시면…….”

“김유나.”

“조용히 할게요.”

유나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났다.

* * *

수정구 던전 공략의 날이 밝았다.

진희는 오래간만에 모인 파티원들을 살펴보았다.

“얼굴 보기 진짜 힘드네요.”

“……죄송합니다.”

현성이 고개를 꾸벅이며 사과했다. 서한이야 세영 호위 사건 이후로 보지 못했다지만, 현성은 수정구를 사용해 보자고 말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바빠서 얼굴 까먹겠다고 농담이라도 하려고 했던 진희는 현성의 얼굴을 보고 참았다. 현성의 안색은 10년은 늙은 것처럼 초췌해 보였다.

“일이 힘들어요?”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드네요.”

또다시 정부 쪽 일이 문제일까. 진희는 덩달아 힘들어 보였던 윤수를 떠올렸다.

“아, 그리고 A급 승급 축하드립니다. B급 승급도 축하드렸어야 했는데, 순식간에 A급이 되셔서 놓쳤군요.”

“뭘요, 어려운 것도 아니었는걸요.”

“네, 뭐, 어렵지 않게 통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좋은 경험이었어요.”

“그, 그렇군요.”

현성은 진희 덕분에 일이 배로 늘어났단 이야기를 하려다, 진희의 속 시원하단 미소에 입을 꾹 다물었다. 진희가 벌인 사건 때문에 현성에게 진희의 정체를 묻는 상관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특히 방위대와 앙숙이나 다름없는 정책기획실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진희에 대한 음모론을 펼치는 중이었다.

“그래도 적당히 해주세요.”

“누가 들으면 나쁜 짓 한 줄 알겠어요.”

진희의 불만 섞인 목소리에 현성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축하 선물은 없나요?”

뭔 선물? 현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진희가 손을 내밀었다.

“승급 축하 선물이요. 축하한다면서 설마 맨입으로 온 건가요?”

“…….”

머릿속에 진희 때문에 생긴 온갖 잡일이 떠올랐지만 현성은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분노를 가라앉혔다.

“다, 다음에 준비해 올게요.”

“기대할게요. 이번처럼 오래 못 봐서 얼굴 까먹기 전에요.”

“……네.”

그간 제대로 된 연락조차 하지 못한 건 현성의 실수가 맞았기에 할 말도 없었다. 수정구 사용을 부탁했으면서 정작 본인은 일 때문에 찾아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동안 보육원에서 아이들 시험까지 있었는데 찾아오지 못했으니, 진희뿐 아니라 그간 친분이 있던 아이들에게도 미안했다.

“근데 윤수 씨는 안 왔나요?”

“윤수는 일이 많기도 하고, 파티 포지션에 어울리지 않아서 데려오지 않았습니다.”

“아하.”

당연히 윤수를 데리고 올 줄 알았던 진희가 현성의 설명에 납득했다.

서한, 진희, 카온을 필두로 한 전위를 맡는 인물만 세 명이었다. 올라운더 현성, 통신과 서포팅을 맡고 있는 종혁을 포함한다 해도 후위를 맡아줄 인물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모셔왔습니다.”

“안녕하세요.”

현성의 등 뒤에 가려져 있던 인물이 걸어 나왔다. 녹발과 졸린 눈이 인상적인 정령사, 김유나였다.

“마침 조혜수 길드장님께서 진희 씨를 도와줄 일 있냐고 물어보시길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래 보여도 유나 씨는 길드 내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는데, 진희는 쓰게 웃으며 유나를 바라보았다. 유나는 어딜 봐도 억지로 끌려온 기색이 완연했다.

자신의 목적인 민혁도 없는데, 정체불명의 던전을 공략한다고 파견되었다는 사실에 강한 불만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잘 부탁해.”

“네이.”

진희가 악수를 건네자 유나가 건성으로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번 던전 잘 끝나면 민혁이랑 자리를 주선해 볼게.”

“헉! 진짜요?”

유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빛을 되찾았다.

물론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희는 거짓말을 진심으로 능숙하게 꾸밀 줄 알았다.

“물론이지. 도움을 줬는데 갚아야 하지 않겠어?”

“열심히 할게요! 뭐든 시켜만 주세요! 사흘이면 충분할 거 같아요!”

“응? 사흘?”

“네, 민혁이 만나는 기간이요.”

“…….”

외박까지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진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는 다 챙겼어?”

유나가 종혁과 함께 후위 포지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지나간 후, 서한이 다가왔다. 서한은 오래간만에 완전 무장을 하고 있었다.

눈에 띄는 건 그의 상체 장비가 중갑옷이 아니라 가죽 갑옷에 철판을 덧댄 경장비였단 점이었다. 그간 서한은 방어력이 높은 장비를 선호했었다.

“저야 준비는 다 했죠, 근데 서한 씨 장비 때깔이 달라졌네요.”

“네가 기교 좀 익혀 보라며. 다양한 검술을 쓰려면 갑옷 바꾸는 건 어쩔 수 없었어.”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힘이 좋다 한들 중갑옷을 입은 이상 몸놀림의 자유도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한 손 검을 이용한 기교 있는 검술을 사용하려면 갑옷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했다.

“장비를 바꿨군.”

“네, 제법 괜찮죠?”

서한이 진희의 갑옷을 살펴보았다. 정부에서 받은 포상금을 토대로 갖춘 갑옷은 온갖 마법이 인챈트되어 있는 최상급 아티팩트였다. 비록 물리 방어력이 떨어지는 가죽 위주의 갑옷이었지만, 진희의 속도를 지원해 주기엔 무리가 없었다.

진희는 갑옷을 강조했지만, 정작 서한의 눈은 진희가 들고 있는 검에 꽂혔다.

그간 사용하던 아밍소드와는 생김새가 달랐다.

백색의 칼날을 감싼 고풍스러운 붉은 가죽의 검집과 번개가 형상화된 크로스 가드가 인상적이었다. 외견도 깔끔하고 멋졌지만, 검에서 풍기는 마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디서 얻은 거야?”

이 정도로 강력한 마력을 내뿜는 검이라면 유물 혹은 던전의 보상일 것이라 생각한 서한이 물었다. 진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제 반려동물이에요.”

“……뭔 소리야?”

“아, 정령은 반려동물 신청 못 하던가.”

정령계에서 소환하는 방식이 아니니 소환된 정령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애매했다. 진희가 영문모를 소리를 중얼거리자 서한이 또 시작이란 얼굴로 말했다.

“됐다. 적어도 검을 바꿔서 다행이네. 저번 검은 내구도는 좋아 보였지만, 어울리진 않았으니까.”

좋은 아티팩트였지만 진희의 수준에 걸맞은 무기는 아니었다.

아직 무기를 못 구했다 하면 A급 승급 선물로 하나 마련해 주려 했던 서한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뒤엔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길잡이다. 이번에 동행할 예정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마야라고 합니다.”

마야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시원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마찬가지로 기동성을 위한 가죽 갑옷을 입은 마야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도 반가워요. 서진희라고 해요.”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마야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오브화하지 않은 석궁을 등에 매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중거리 지원을 위해 데려온 헌터인 듯싶었다. 이로써 전위와 후위의 균형은 얼추 맞춘 셈이다.

“그런데 저희 처음 가는 던전이잖아요, 길잡이가 필요해요?”

“마야는 던전 구조 인식과 지도 제작에 일가견이 있어. 초행길이니까 오히려 길잡이가 더 필요하지. 들어가서 길이라도 잃어버리면 어떻게 하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앞선 경험 탓에 길잡이가 곧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진희가 서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파티 멤버는 대충 정해졌네요.”

파티원 모두가 장비를 정비하고 진희의 주변으로 모였다.

장소는 카온과 서한이 대련하던 폐교의 운동장이었다. 혹시나 수정구를 사용했을 때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우선 전위.”

탱커 카온과 딜러 서한과 진희. 셋 다 포지션 스위칭이 가능하다.

“후위는 이렇게.”

메시지로 인한 서포팅과 마력 전달을 할 수 있는 종혁, 언제든 전위와 스위칭 가능한 주술사 현성, 딜러 역할과 서포팅 역할을 할 수 있는 유나.

“마야 씨는 탐색과 감시를 부탁해요.”

“네.”

마야는 전투 인원은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 딜러로서 활약할 수 있었다.

파티의 인원은 총 7명. 3~4명이 전위라는 딱 괜찮은 조합이 완성되었다.

전력도 만만치 않았다. 특수한 경우인 종혁을 제외하면 모두 최소 B급 이상의 무력을 가진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 서한과 현성, 진희, 카온의 무력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그럼 열게요.”

진희는 곧장 종혁에게 텔레파시를 연결하라 신호를 보냈다. 현성과 서한이 데려온 인물이니 이능력의 비밀에 대해 지킬 필요는 없었다.

텔레파시가 연결됨을 느낀 후, 진희는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파직-

수정구 안에 있던 검은색 빛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진희의 마력에 반응하여 마치 심장처럼 두근거리던 검은빛은 순식간에 그 크기를 키워 수정구를 깨뜨렸다.

“으악!”

“공격은 아니에요! 다들 자리 유지하세요.”

진희는 이 빛이 일종의 균열, 게이트란 걸 깨달았다. 당황해하는 종혁을 현성이 붙잡았다.

수정구에서 빠져나온 빛은 천천히 주변을 물들더니, 이윽고 모든 사람을 집어삼켰다.

“다들 준비!”

진희의 마지막 말과 동시에 검은 빛이 일행을 이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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