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와 헌터의 겸직-77화 (77/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77화

빛이 사라지자, 혜수의 곁엔 물빛의 정령이 서 있었다. 이목구비가 없는 마네킹과 같은 얼굴, 푸른빛의 피부와 안개처럼 흔들리는 천 옷을 걸친 정령이었다.

물의 정령왕이다. 곁에 있기만 해도 피부로 느껴지는 물의 마나에 진희는 생각했다.

“네가 서진희군.”

“당신은 누구시죠?”

“물의 정령왕이자 조혜수 남편. 김방인이다.”

정령왕치곤 매우 구수한 이름이었다. 정령왕이라 불러야 할지 김방인이라 불러야 할지 헷갈린 진희가 말을 못 잇고 있자, 정령왕은 혜수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껄렁하게 다리를 꼬고 턱을 괴자, 이질적인 외모인데도 진짜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편분이 정령왕이세요?”

“으음, 조금 달라요. 제 남편이 정령왕이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혜수가 설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10년 전, 제 남편은 던전에서 사망했어요. 우수한 정령사였던 그이는 함정에 빠져 죽고 말았죠.”

“함정이 아니라 내가 걸어 들어간 거라니까.”

“가만히 좀 있어, 등장만 화려하지 말투는 여전히 양아치라니까.”

혜수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정령왕이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렸다. 입이 없는데 입술을 내밀다니, 재주도 좋다고 진희는 내심 생각했다.

“그로부터 5년 후, 그이는 정령왕으로 환생했어요.”

“……환생이요?”

“네, 진희 씨처럼.”

진희가 환생했단 것을 알고 있었다. 진희는 놀란 감정을 숨기며 혜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혜수는 당시를 회상하는 듯 아련한 눈이었다.

“그이는 죽고 나서 정령이 있는 세계의 정령왕으로 환생한 거죠. 그리고 인간일 때의 기억을 떠올려, 절 다시 만나기 위해 수많은 세계를 찾아다녔다고 해요.”

로맨틱한 이야기였다. 정령으로 환생하고 나서도 사랑을 잊지 못해 자신에게 돌아온 정인의 모습이라니.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보험금 수령 다 한 다음에 돌아와서. 수령 전에 왔으면 얼마나 귀찮았을지.”

“……서로 부부 맞으시죠?”

“물론이죠. 아직도 사랑한답니다. 그치?”

정령왕은 대답이 없었다. 머쓱해진 혜수는 흠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정령왕이 된 그이와 계약하고 전 이 자리에 올랐어요. 제자가 아닌 이상 아무에게도 말해주지 않은 비밀이니까, 지켜주셔야 해요. 사실 제 능력으로 소환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거든요.”

“아, 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실물이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진희는 여전히 껄렁한 자세의 정령왕을 보며 말했다.

“제가 환생한 건 어떻게 아셨죠?”

“영혼을 보면 알아. 환생을 한 사람은 두 가지 영혼이 뒤섞인 모습이거든. 네 영혼은 다른 환생자에 비해 굉장히 안정적이고, 완벽해서 처음엔 좀 헷갈렸지.”

그래서 바르그도 자신을 보고 바로 환생자란 걸 알았던 건가. 정령들에게 진실을 가리는 눈이 있단 건 정령사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였다.

“환생이 꼭 지구에 하는 건 아닌가 봐요.”

“뭐, 내 경우가 특별한 거야. 보통 게이트가 열려 있거나 성벽이 무너진 세상이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없어. 내가 들어갔던 던전의 함정이 좀 특이했거든. 애당초 같은 인간으로 환생하는 경우는 드물어도, 다른 생명체로 환생하는 경우는 결단코 없어. 내가 운이 좋았지. 하여간 그건 그렇고.”

비록 눈이 없어 시선이 어딜 향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희는 묘한 마나의 움직임에 정령왕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흠, 다시 봐도 성벽을 부순 경험이 있는 인간이구먼.”

성벽, 그 단어에 진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바르그에게도 들었던 이야기다.

“저와 다니는 정령도 제가 성벽을 부쉈다는 이야기를 하던데, 대체 뭘 보고 그런 소릴 하는 거죠?”

“몰라? 진짜?”

정령왕이 허허하고 헛웃음을 냈다.

“인외의 업적을 이룬 인간에겐 진화의 징조가 나타나지. 무색이었던 인간의 영혼의 색이 변해. 상위의 존재를 뜻하는 ‘영혼의 색’, 우린 그걸 징조라고 부른다.”

정령왕이 자신을 가리켰다.

“징조의 색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나타나지만, 나처럼 자연계, 세상의 구조를 담당하는 영혼은 백색. 그리고 너처럼 세상의 구조를 무너뜨린 자는 흑색으로 나타나.”

“제 영혼이 흑색이란 얘긴가요?”

“정령들이 보기엔 그렇지. 흑색의 영혼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야. 세상의 성벽을 무너뜨린 적 있는 초월자란 뜻이지.”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온갖 전쟁에서 수많은 전적을 세우긴 했지만, 그게 세상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사건은 아니었다.

바제트는 강하다 한들 결국 인간이었다.

“전 성벽이고 뭐고, 전생엔 아무것도 몰랐어요.”

“꼭 자의로 벌인 일이 아닐 수도 있지. 네가 일으킨 사건이 나비효과처럼 커졌을 수도 있어. 결국 성벽이 무너진 원인이 너라면, 넌 원흉이 되는 거야.”

정령왕은 곁에 있던 혜수의 찻잔을 가로채더니 단숨에 마셨다.

“운명을 순리를 무너뜨리는 방법은 다양하니까. 뭐, 사실 난 네가 성벽을 무너뜨린 인간이든 뭐든 상관없어. 내가 널 만나고 싶은 이유는 다른 거니까.”

“혹시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성격이란 소리 안 들어요?”

“많이 들어, 아내가 그걸로 항상 구박하거든.”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혜수가 쓰게 웃었다.

“내가 널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네가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서다.”

정령왕은 진희를 처음 본 게 영상에서였다.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는 그 영상을 보며, 정령왕은 진희가 곧 ‘영웅’임을 눈치챘다.

지금껏 영웅의 자질을 가진 헌터는 많았지만, 진희처럼 세상에 등장한 직후부터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 자는 많지 않았다.

많은 영웅 중, 굳이 진희를 만나려 한 이유는 다름 아닌 그녀의 영혼의 색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웅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는, 곧 세상의 위기가 찾아온다는 결론과 직결된다.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다. 그게 정령왕이 생각하는 운명의 순리였다.

그런데 영웅인 자가 흑색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니, 정령왕에게 큰 의구심이 들게 만든 광경이었다.

“네가 이 세상을 무너뜨리려 하는 대악마인지, 혹은 구하려고 하는 대영웅인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정령왕은 직설적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지금 진희에게 너는 선한가, 악한가를 질문한 것이다.

정령왕의 비약적인 논리에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의 자질이 뭔데요? 전 영웅이 될 생각도, 악당이 될 생각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평범? 농담도.”

정령왕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정령왕이 되고 내겐 특별한 눈이 생겼어. 세상의 구조를 보고, 운명의 크기를 가늠하는 능력을 가진 눈이지. 넌 내가 본 그 어떤 인간보다 거대한 운명을 손에 쥐고 있어. 그게 세상에 이로운 운명인지, 해로운 운명인지 확인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무를 누가 쥐여 줬는데요?”

“내가 내게 줬어. 나야 정령이라 지구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아내가 살아 있을 때까진 지켜야 하거든.”

자기 멋대로의 논리였지만, 오히려 직설적이라 마음에 들었다. 진희는 막무가내로 질문을 퍼붓는 정령왕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니까 당신 말은, 제가 무진장 강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이 힘으로 악당이 될 건지 영웅이 될 건지 궁금해서 이 자리를 만들었다, 이건가요?”

“정확해.”

“진짜 시간 많은가 봐요.”

“불로불사인데 시간이야 차고 넘치지. 자, 그럼 대답해봐.”

정령왕은 차분히 기다렸다.

* * *

“민혁이는 안 왔어?”

“안 오겠다고 하던데요?”

혜수의 제자이자 민혁의 마법 스승인 유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1층 로비로 향했다. 건물 안엔 특별히 볼만한 시설은 없었기에, 유나가 대신 정령들을 보여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길드 로비 구석엔 작은 화단이 있었는데, 그 안엔 반딧불이처럼 작은 요정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청하가 정원 안을 구경하고 있던 사이, 유나가 소라에게 민혁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소라는 오던 길에 민혁을 가르친 게 유나라는 사실을 들었다. 유나는 그 증거로 민혁이 썼던 마법을 그 자리에서 보여주었다.

“원래라면 정령의 힘과 마법을 결합해서 위력을 증폭시키는 마법이야. 내가 개발했지.”

“와, 그럼 정령사면서 마법사이신 거예요?”

“맞아.”

“대단하네요.”

“난 천재거든.”

“……아, 네.”

칭찬했다고 그대로 받고 한 수 더 뜰 줄은 몰랐다. 유나는 특유의 졸린 눈을 하고선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데 민혁이는 왜 이 천재의 지도를 더 안 받겠다고 거절한 거야?”

“저야 모르죠, 여기서 수업받았단 사실도 오늘 처음 알았는걸요.”

“나 참, 그 이능력 좀 살펴보겠다고 실험하잔 게 그렇게 싫었나.”

“……실험이요?”

잘못 들었나 싶어 소라가 되물었다.

“그래, 실험. 이능력으로 만든 불로 나를 공격해 보라고 했는데 계속 거절하더라고. 결국 손을 붙잡고 내 피부에 가져다 댔는데, 도망치더라.”

“…….”

소라는 민혁이 사색이 된 계기가 뭐였는지 알 듯했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그에게 그런 낯 뜨거운 실험을 강요하다니, 도망칠 만했다.

“근데 왜 직접 불을 맞아보려고 하신 거예요?”

“난 다중 속성을 다루는 정령사거든. 마나의 속성 분석은 직접 맞아보는 게 편해.”

“그러다 다치잖아요.”

“다치는 게 문제야? 난 아직도 민혁이 능력의 메커니즘이 궁금해서 밤새 잠도 못 잔단 말이야.”

‘아, 그래서 눈가에 다크서클이 진했던 거구나.’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정보였다. 소라는 유나의 불만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정원에선 청하가 자기 손으로 잡은 정령을 종혁에게 보여주며 자랑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려나.”

“금방 끝날걸?”

소라의 중얼거림에 유나가 대답했다.

“어떻게 알아요?”

“왜냐면 곧 도청할 거거든. 슬슬 알아차리지 못할 테니까, 정령 하나 벽에 붙여서 도청을…….”

유나가 음흉한 얼굴로 웃으며 손가락을 휘둘렀다.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정령이 나타나, 천장을 향해 날아갔다.

로비의 바로 위가 응접실인 것을 노린 그녀의 술수였지만.

“우리 제자는 참 영리해.”

“헉!”

곧장 들린 목소리에 정령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언니!”

어느새 로비의 계단에서 진희와 혜수가 내려오고 있었다. 소라가 가장 먼저 진희에게 걸어갔다.

“이야기 다 끝나셨어요?”

“응, 잘 놀고 있었어?”

진희의 곁에 바로 달라붙는 소라와 달리, 유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혜수에게서 멀어졌다.

“저쪽 애들은 참 착한데, 우리 애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모르겠어, 그렇지?”

“아, 아하하.”

혜수가 웃는 얼굴로 유나의 어깨를 주물렀다.

명백히 분노가 담긴 누르기에 유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아, 그럼 진희 씨. 여기까지 와주셔서 고마워요.”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다. 정원에서 청하를 챙기고 돌아온 종혁을 보며 혜수가 말했다.

“그이가 한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괜찮아요, 저도 새겨들을 만한 충고였으니까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