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75화
이해되는 판단이다. 1년도 안 된 헌터가 갑자기 튀어나와 A급까지 초특급 승급 코스를 달리고 있다니, 대형 신인의 탄생보단 누군가의 계략이라고 추측하는 게 타당했다.
‘그리고 그런 추측을 하는 사람이 시험관으로 찾아온 거고.’
윤수가 왜 걱정했는지 알 듯했다. 이들은 진희를 헐뜯기 위해 모인 것이다.
한만성은 코웃음을 치며 진희에게 말했다.
“세상 참 편해졌어. 이젠 업적도 떠먹여 줘서 A급을 만드니 말이야.”
그는 진희를 삿대질하며 덧붙였다.
“하여간 시험 못 보면 알아서 하라고. 귀한 분들 모셔서 시험 자리를 만들었는데, 떨어지면 그놈의 금강에서 책임지게 할 테니까.”
“전 시험 보고 싶단 얘기한 적 없이 통보받은 입장이지만, 그렇게 하죠.”
진희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한만성이 계속해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쯧! 요즘 어린것들은 토를 달아서 문제라니까. 능력도 없…….”
“그러게요. 젊은것들이 문제예요. 나 참, 얼른 늙어서 한 자리 차지한 다음 불륜으로 뉴스에도 나오고 그래야 세상 살기 편할 텐데 말이에요.”
“이게……!”
순간 쌍욕이 튀어나오려 했던 한만성을 제지한 건 곁에 있던 다른 시험관이었다.
진희는 조금 전, 한만성이 어떤 뉴스에서 나왔는지 떠올랐다. 그는 최근 불륜 이슈 때문에 한동안 사회면을 뜨겁게 달군 인물이었다. 가정을 놔두고 거액의 보석을 불륜 상대에게 선물하던 게 걸렸다고 했다.
“쓸데없는 대화 계속하지 말고 시험이나 시작하죠?”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시험관이 눈꼬리를 치켜뜨며 묻자 진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친절한 분들이 바라지도 않던 기회를 만들어주셨는데 안 할 수야 있나요?”
* * *
“이하늘 씨가 오다니.”
대련 상대를 듣고 윤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왜요? 그 사람 착하지 않아요?”
소라가 윤수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영상에서 이하늘은 언제나 젠틀한 모습으로 나오곤 했다. 인기 좋고 실력도 출중한, 일명 ‘연예인 헌터’의 대표 중 한 명이었다.
“아뇨, 성격이 나쁜 건 아니긴 한데요…….”
한참 적당한 말을 찾던 윤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좀 관심종자스러워요.”
“……네?”
“주목받는 걸 무지 좋아하고, 엄청 나대는 편이거든요. 영상으로 접하면 그야 모범적이고 착한 히어로지만, 솔직히 호감가는 사람은 아니에요.”
윤수는 차라리 일반 헌터가 와서 대련해 주길 바랐다. 이하늘은 분명 A급 중에서도 상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였지만, 진희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니었다.
그 나대는 거 좋아하는 마법사가 와서 일만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윤수는 산발이 된 머리를 쥐어짰다.
“……진희 씨가 어른스럽게 대처하시겠죠?”
“어른스러운 대처가 뭔데요?”
“이하늘 씨와 상대 좀 하다가 져준다거나?”
“바랄 걸 바라세요.”
소라가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언니 성격을 아직 잘 모르시네.”
* * *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기다린 시간이 10분쯤 지날 무렵, 대련 상대인 이하늘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진 청바지에 하와이안 셔츠라는 마법사답지 않은 옷차림을 한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시험관에게 인사를 건넸다. 가장 반갑게 맞이한 건 진희에게 시비를 걸던 시험관과 한만성이었다.
“어서 오게! 여전히 인물이 훤하구먼!”
“하하, 실장님도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최근 뉴스 보니까 되게 정력적으로 활동 중이시던데요!”
“뭐? 이 사람이 지금, 허허허!”
“역시 젊게 사시는 분은 다른가 봅니다, 하하!”
‘꼴값을 떨고 있네.’
진희는 이하늘과 한만성의 대화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이하늘은 이윽고 한만성을 지나쳐 조혜수에게 다가갔다.
“우리 조혜수 여사님도 정정하시군요! 반갑습니다.”
“이하늘 씨도 여전히 대책 없이 느긋한 얼굴이시네요, 부러워요.”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방금은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진희는 조혜수의 웃음기 어린 인사말에 피식 웃었다. 조혜수는 이하늘이 자신의 손등에 키스하려 하자 자연스럽게 손을 빼고 자오란 곁으로 물러났다.
“반가워요.”
“네.”
이하늘은 자오란이 반갑지는 않은 듯,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고 말았다.
딱 봐도 편애가 심한 타입이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겐 과할 정도로 밝게 인사했고, 아닌 사람은 홀대했다. 당장 문을 열고 들어오던 중에 진희가 있었지만 아예 무시하고 시험관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황이었다.
“아하, 당신이 이번 신입?”
모든 시험관에게 나름의 인사를 건넨 이하늘이 드디어 진희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진희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하하, 아리따운 미녀셨네. 반가워요, 전 이하늘이라고 합니다. 유무브 별명처럼 스카이라고 부르셔도 돼요, 아니면 선배님도 괜찮겠네요.”
이건 또 참신한 멍청이다. 진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이 없자, 그가 가까이 다가와 귀에 속삭였다.
후려쳐서 떨어지게 만들까 싶었지만, 반대편 유리 벽 너머에서 윤수가 사색이 된 채로 고개를 젓고 있는 게 보여 참았다.
“이런이런, 부탁받은 게 있어서 좀 진지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분이 오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한 수 거들어드릴게요.”
“뭐요?”
거친 말 험한 말이 나올 뻔했지만 이번에도 꾹 참았다.
“이번 시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밥 한 번 사주시면 충분해요.”
그딴 거 필요 없으니 얼굴 치우라고 말하려던 진희는 이내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도와주실 건데요?”
“하하, 시험 시작하면…….”
이하늘이 자연스럽게 진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강당 중앙으로 향했다. 시험관들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켜주었고, 진희는 잠자코 이하늘이 말하는 계획이란 걸 경청했다.
* * *
“평가는 이하늘 헌터, 다섯 분의 시험관이 진행하며 각 10점씩 부과됩니다. 60점 중 40점이 넘으면 승급 시험 합격으로 간주합니다. 그럼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시험이 시작되었다. 진희와 이하늘은 각각 거리를 벌리고 대련을 준비했다. 진희는 날이 없는 철검을 들고, 이하늘은 맨손으로 나섰다.
검사의 대련에는 검사로 상대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시험관들은 진희를 창피 주기 위해 이하늘을 불렀다.
이하늘은 바람 속성 마법에 특화된 워메이지로, 근접과 중거리 모두 가능한 만능형 마법사였다. 거리 조절에 능숙하고 속도가 빨라 일반적인 전사, 검사는 상대하기 매우 까다로운 상대였다.
이하늘이 나온 영상 중 바람 마법을 사용해 검사를 괴롭히는 장면은 몇백만의 조회 수를 찍을 만큼 유명할 정도였다.
근접해야 하는 검사들을 약 올리고 거리를 벌려 싸우는 방식이니, 검사의 실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져 보이는 모습이 나왔다.
‘그걸 노린 거겠지.’
진희는 유리 벽 너머, 아이들 곁에서 앉아 구경하고 있는 시험관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의도는 뻔했다. 여기서 이하늘을 이용해 금강의 헌터의 기를 죽이겠단 거겠지.
유치했다.
“자, 그럼 먼저 한 발 갑니다요.”
이하늘이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의 손에 바람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시험이 시작되면 제 공격을 계속 피하세요. 정면으로만 쏠 테니까, 양방향으로 피하시면 될 거예요. 총 다섯 발 피하시면, 제가 포기를 외칠게요.’
이 대련은 그를 이기느냐 지느냐가 아니라, 그의 공격을 얼마나 잘 피하느냐가 중점이 될 거라고 덧붙였다.
그는 애당초 진희가 자신을 이길 것이란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었다.
진희는 검을 잡고 중얼거렸다.
“재밌는 사람들이 참 많네.”
기분 전환 겸 왔는데 딱 좋은 스트레스 해소 샌드백이 눈앞에 생겼다. 진희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하늘의 마법이 날아들었다. 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기초적인 공격 마법. 하지만 실력 있는 마법사의 마법이기에 한 발에 담긴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어지간한 몬스터는 저 한 발에 사지가 찢겨 나가겠지.
“후우.”
이하늘은 웃으며 피하라는 듯 왼쪽으로 턱짓했다. 그러나 진희는 검을 곧게 잡고, 자연스럽게 휘둘렀다.
“……어?”
바람이 잘렸다.
소용돌이가 검에 잘리는 기이한 현상을 마주하며, 이하늘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더 해봐.”
그리고 뜻하지 않은 고행이 시작되었다.
* * *
‘이게 아닌데?’
이하늘은 다시 한번 마법을 던졌다. 이번엔 방금보다 더 강력한 마력을 담았다. 소용돌이가 아닌, 사납게 회전하는 바람의 칼날이 진희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동일했다.
바람은 진희의 검에 잘려나갔다. 날조차 없는 철검은 장갑차도 잘라낼 바람의 칼날을 동강 냈다.
“저, 저기?”
“또 보내.”
“어…….”
이하늘이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시험관들이 이쪽을 매우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진심으로 싸워봐?’
이하늘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다시 한번 마법을 날렸다. 이번이 세 번째.
그러나 진희는 이번에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깔끔하게 마법을 잘라내는 그녀를 보고 이하늘은 묘한 오기가 생겼다.
고작 신입 헌터가 자신의 계획을 무시했단 생각에 짜증이 일었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이렇게 된 이상 저 자존심을 망가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외모가 딱 자신의 취향이라 사정 좀 봐주려고 했더니, 덤벼드는 모습에 기가 찼다.
쉽게 승급시켜 주려고 한 자신의 선의를 무시하다니, 이하늘은 기초적인 공격 마법이 아닌 조합 마법을 실행했다.
[Vent, Vent, Etincelle-!]
바람 마법 두 번 중첩, 불꽃 마법 한 번 중첩. 이하늘의 시그니처이자 특수한 마법인 중첩 마법이 발동되었다.
나타나는 건 불꽃의 창. 바람을 창대로 삼아 불꽃을 휘감은 2m가량의 창이 그의 머리 위에 올라왔다.
“끝까지 안 피한다 이거지.”
이하늘이 코웃음을 쳤다. 진희는 나른한 표정 그대로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A급 마법사의 마법을 B급 검사가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이하늘은 확신에 찬 얼굴로 마법을 쏘아냈다.
이 마법에 관통되면 심하게 다치겠지만, 실력 좋은 의사들이 대기하고 있으니 문제없으리란 생각이었다. 뒤에서 관람하고 있던 시험관들도 조금 심한 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모두와의 예상과도 다르게, 진희는 검을 휘둘렀다.
“와아!”
불꽃의 창은 정확히 반으로 갈라졌다. 철을 녹일 것처럼 타오르던 창은 진희를 기점으로 양쪽으로 갈라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청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환호성을 질렀다.
“앉아, 청하야.”
“누나 봤지? 이하늘의 플레임 스피어를 잘랐어! 그것도 검으로!”
“플…… 뭐?”
“플레임 스피어! 이하늘이 트롤 잡을 때 썼던 건데!”
또다시 시작된 청하의 소란을 뒤로하고 진희는 철검을 들어 살펴보았다. 마력으로 코팅했지만 고위 마법을 맞아서 그런지 성한 곳이 없었다. 앞으로 한 번 정도 사용하면 수명이 다할 듯했다.
진희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말했다.
“더 안 던져?”
“마, 말도 안 돼.”
이하늘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마법은 그의 장기였다. 드래곤의 비늘마저도 상처 입힐 수 있는 관통력을 지닌 상급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