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74화
“응?”
로비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가야 하나 살피던 중, 로비 중앙 계단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현성의 부하 직원이자 B급 헌터인 나윤수였다.
“빨리 오셨네요!”
“윤수 씨 여기서 일하세요?”
“에이, 설마요. 선배가 부탁하셔서요.”
“현성 씨가요?”
“원래 A급 헌터 승급이 쪼끔 복잡하거든요. 아, 일단 이쪽으로 가시죠.”
윤수가 자연스럽게 일행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A급 승급 방법은 두 가지예요. 업적만으로 진행되는 업적 승급, 시험과 업적 인증이 같이 진행되는 공인 승급. 업적만으로 승급되는 건 최근엔 그다지 없고, 대부분이 후자로 승급하죠.”
윤수가 안내하는 장소는 건물에 붙어 있던 돔형 강당이었다. 강당은 중앙에 시합장처럼 생긴 공터를 두고, 사방에 유리 벽을 세워 격리한 형태였다.
“으음, 그래서 진희 씨가 시험 본다고 했을 때, 선배나 이서한 씨가 같이 와주길 바랐는데요.”
“왜요?”
“……약간 줄 싸움이 있거든요.”
윤수가 주변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눈치껏 강당을 구경하겠다며 뒤로 빠졌다.
“A급 헌터 시험을 감독하는 시험관들은 보통 헌터 기업 관리자, 길드 간부, 정부 쪽에서 조금씩 차출돼요. 그런데 아무래도 업적 인증처럼 점수제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다 보니까, 조금…….”
“빽 있는 사람도 있나 봐요?”
“있죠.”
윤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 애들을 추천하는 기업도 있고, 친정부 헌터를 기어코 승급시키려는 공무원이나 실력보다 인기를 중요시하는 길드 간부들, 사례가 되게 많아요.”
“평가가 되게 주관적이에요?”
“그래도 결과만 보면 뽑을 사람 뽑고, 떨어질 사람 떨어지긴 합니다. 애당초 A급 실력이 되는 헌터를 줄 싸움으로 자른다는 건 너무하니까요. 하지만 방해하긴 해요.”
자기들의 꼼수가 실패한다고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방해되는 기업의 인재를 떨어뜨리기 위해 민감한 질문을 해서 집중력을 떨어뜨린다거나, 일부러 시험 내용을 당사자에게 어려운 걸로 바꾸길 종용하기도 한다고.
“A급부터는 대우가 아예 달라지니까요. 세금을 많이 내는 만큼, 정부나 기업 측에서도 중요한 인재가 되죠. A급은 이해관계 충돌이 극심해지는 구간이란 거죠.”
그래서 운수는 현성이나 서한이 진희와 함께 오길 바랐다.
최근 갑자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진희는 이미 유력자들 사이에선 ‘금강 기업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고 소문나 있었다.
그 말인즉 금강 기업에 억하심정이 있는 관계자가 방해하러 올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아무리 대기업 금강이라고 해도, 적이 없는 건 아니니까요.”
국내 헌터 시장을 장악한 두 기업은 금강과 브리온이지만, 둘의 틈을 노리는 기업 또한 부지기수였다.
각자 나름의 영향력이 있는 서한과 현성이 곁에 있다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만, 오늘은 둘 다 이 자리에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죠.”
진희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서한은 진희가 시험을 본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테지만, 따라오지 않은 이유는 뻔했다.
‘엄청 미안해하던데.’
세영의 무례 때문에 서한은 진희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서한에게 사과받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고개까지 숙이는 건 진희로서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있다 보니 서한은 한동안 진희를 찾아오지도, 연락하지도 않았다.
“현성 씨는 바쁘다면서요?”
“네, 엄청요.”
윤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테러범 때문에 위쪽이랑 좀 안 좋게 엮였나 봐요. 저도 얼굴 못 본 지 몇 주는 됐네요.”
저번에 말한 이주민 때문이려나. 진희는 다음 던전 공략에는 늦을 일 없을 것이라 적혀 있던 현성의 장문의 문자를 떠올렸다.
“여기 안으로 들어가시면 돼요. 음, 시험 과목은 들어가서 알려줘요. 어렵거나 그렇진 않을 거예요.”
“뭐 시험 보는데요?”
“근접 계열이면 대련이나 검술 시연 정도였어요. 마법사는 잘 모르겠지만요.”
하여간 실력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단순한 시험일 거라고 윤수가 덧붙였다.
강당 안으로 들어간 진희는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다섯 명의 시험관을 발견했다.
‘제법이네.’
다섯 중 넷이 A급 이상의 헌터들이었다. 모두 가지고 있는 마력량이 심상치 않았다. 유일하게 일반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중년의 노인으로,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진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 있는 애들은 뭐야?”
“아, 여기 서진희 씨의 제자들입니다. 견학차 왔다고 합니다만.”
노인의 날 선 말에 윤수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앞으로 나서려는 윤수를 노인이 혀를 차며 욕했다.
“방위대 어중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그 여우 시중이나 들 것이지.”
“…….”
윤수의 웃는 얼굴이 순간 금이 갔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정부 소속 헌터 중 여우란 별명을 듣는 사람은 현성뿐이다. 아무래도 저 노인이 정부 소속 공무원인 듯했다.
‘진짜 서로 사이가 나쁜가 보네.’
가끔 현성이 직장에 대해 험하게 욕하곤 했는데, 방위대와 다른 부서는 상상 이상으로 사이가 나쁜 듯했다.
“다 돌려보내! 여기가 애들 놀이터도 아니고, 대체 누가 견학을 허락했다고…….”
“좀 보면 어때요?”
그때 가장 구석에 있던 여성이 노인의 말을 끊었다. 온화한 인상의 여성은 시험관 중에서 가장 맑은 마력, 마나에 가까운 기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진희는 본능적으로 저 여성이 정령사라는 걸 눈치챘다.
“시험 당사자가 허락한다면 딱히 비밀 유지가 필요한 시험도 아니잖아요?”
“크, 크흠. 하지만 사전 연락도 안 했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시험 예정을 이틀 전에 알려줬잖아요? 세상에 누가 A급 승급 시험을 한 달 전도 아니고 이틀 전에 알려줘요?”
이번에 대답은 가장 중앙에 서 있던 젊은 사내에게서 나왔다. 말끔한 남색 정장을 입고 있는 작은 키의 사내는 강당의 유리 벽을 가리켰다.
“거기 방위대 선생님, 저기 유리 벽 밖에 의자 있으니까 거기로 안내해 줄래요?”
“아,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요. 선생님 책임도 아닌데.”
노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두 명의 찬성에 트집을 잡을 수는 없는지,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혀만 찰 뿐이었다.
“아, 소개해야죠. 안녕하세요, 전 브리온의 패스파인더 팀장 자오란입니다. 서진희 씨 맞으시죠?”
“네.”
“반갑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험관분들은…….”
작은 키의 사내, 브리온 소속인 자오란이 시험관을 대표해서 다른 시험관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윤수는 눈치껏 그 틈을 타 아이들을 강당의 유리 벽 너머로 데려갔다. 소라는 윤수에게 이끌려 나가기 직전 노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분은 헌터 길드의 길드장이신 조혜수 선생님.”
“반가워요, 진희 양.”
노인의 말을 반박해 주었던 여성은 헌터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주변을 정화하는 것처럼 청량한 마력이 느껴지는 그녀는 깔끔한 단발이 어울리는 중년의 여성으로, 진희에게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여기 있는 선생님은 헌터관리본부 정책기획실장님이신 한만성 선생님.”
“흠.”
노인의 이름은 한만성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뉴스나 신문에서 곧잘 보이던 이름이었다. 그는 심술궂어 보이는 날 선 눈썹과 툭 튀어나온 입이 인상적인 편이었다.
남은 두 사람은 모두 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둘 다 중견 기업, 그것도 제법 이름난 곳에서 온 헌터였고 역시나 눈에 호의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브리온의 자오란과 헌터 길드의 조혜수를 제외하곤 진희의 편은 아무도 없었다.
“시험은 대련으로 치러집니다.”
시험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건 자오란이 아니라, 다른 기업 소속의 시험관이었다.
“저희가 준비한 헌터와 20분 대련하는 게 이번 시험의 과제입니다.”
“대련해서 이기면 되는 건가요?”
“이겨요?”
진희의 물음에 사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네, 뭐, 이길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내는 곁에 있던 한만성에게 말했다.
“이긴다니 참, 대단한 자신감이지 않습니까?”
“그렇군요. 쯧쯧,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이봐, 이번에 대련을 해주는 헌터가 누군지나 아나?”
“몰라요.”
“이하늘일세, 이하늘!”
이하늘은 또 누구야, 진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누구죠?”
“허, 참.”
진희의 말에 한만성과 사내 둘 다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웃었다. 자오란과 조혜수 또한 복잡한 얼굴이었다.
이하늘이 누구인지는 정작 유리 벽 너머에 있는 청하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어떤 처리가 되었는지 유리 벽은 양쪽 소리가 잘 전달되었다. 벽에 딱 붙어 있던 청하가 빠르게 대답했다.
“최근 인터넷에서 유명한 A급이에요! S급 승급이 유력하다던 바람 마법사요!”
이하늘은 중견 기업에 속한 A급 헌터로, 바람 속성을 다루는 워메이지라고 했다. 화려한 몸놀림과 속도, 그리고 스마트한 마법 사용에 팬이 엄청 많다고 덧붙였다.
“너도 좋아하니?”
“그, 조금요.”
진희의 물음에 청하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시험관들의 눈이 이쪽을 향하자, 윤수가 재빨리 청하를 업고 뒤로 빠졌다.
“크흠!”
한만수가 헛기침하며 진희의 시선을 되돌렸다.
“하여간, 그 이하늘이 와서 자네 시험을 봐줄 걸세. 영광으로 알아!”
“아, 다치는 건 걱정 마십시오. 의료진은 대기해 뒀으니까요.”
그러시겠지, 진희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오란과 조혜수는 불편한 얼굴이었다.
한만수 등이 진희를 무시하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뭐, 영상 찍을 땐 연기 잘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연기요?”
“네, 미국에서 찍은 그 영상이요.”
사내의 말에 자오란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이봐요, 무례합니다.”
“어이쿠, 농담이었어요, 농담.”
진희는 연기란 단어의 뜻을 곰곰이 생각하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 제가 찍힌 그 영상이 연출이었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물론 서진희 씨가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런데 조금…… 피해자분들과의 인터뷰를 들어보니, 이서한 대표가 이미 양념을 해놨다는 소리가 있어서요.”
사내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서진희 씨의 업적을 무시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암, 그럼요. 막타를 쳤어도 사냥은 사냥이죠.”
“……저질이야.”
자오란은 입을 가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한 목소리였지만, 곁에 있던 조혜수는 듣고 쓰게 웃었다.
A급 승급 시험에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금강 기업에서 서포트하는 헌터의 시험이다 보니, 이번엔 방해의 정도가 다소 심했다.
“그렇게 미심쩍었으면 A급 시험은 왜 보러 오라고 했나요?”
“이런, 화나셨군요. 아무리 그래도 금강에서 업적을 그렇게 만들어줬는데, 무시하는 건 시험관으로서 예의가 아니지요.”
사내는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이번 시험이 끝나면 이서한 대표님께 부디 좋은 말씀 좀 올려드리길 바랍니다. A급 되시게 하려고 제가 얼마나 힘을 썼는데요.”
“꼭 말해드릴게요.”
이쯤 되면 도발이 귀엽다. 진희는 사내처럼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안목을 지녔는지 꼭 덧붙여서요.”
“하하! 고맙습니다, 진가를 알아주시니 기쁘네요.”
진희의 말이 비아냥인지 칭찬인지 알아차렸을 텐데도 사내는 한 점의 당황도 없이 받아쳤다.
짧은 대화였지만 진희는 이 시험관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이들은 진희의 소문, 업적 대부분이 금강이 만들어준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