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73화
니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목을 매만지던 니케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진희에게 건넸다.
기사 정복을 고정하는 용도의 브로치였다. 드래곤과 별이 그려진 문양. 진희는 브로치를 받고서 물었다.
“어디서 얻었어?”
“던전. 몬스터 ‘기사’의 유류품이야.”
“몬스터?”
“응, 그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기사였다고 해. 붉은색 갑옷을 입고 있던 기사. 이성을 잃은 괴물이었다고 해.”
“……괴물이라.”
진희는 천천히 브로치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무게와 감촉, 바제트 때에 사용했던 브로치와 완벽히 동일했다.
“내가 네 환생에 대한 이야기를 세영이에게 한 건 이것 때문이야. 이곳엔 네가 살던 세상의 흔적이 많아.”
“……그래서?”
“넌 너의 과거를 다시 찾아야 해. 네가 몰랐던 것들. 세상의 결말, 사람들, 그리고 지구와의 연관성. 나는 알려줄 수 없어. 내 능력의 제한이거든.”
니케의 말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제국, 전생의 기억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녀와 같은 환생자인 클로이의 과거 이야기, 정령 바르그가 했던 성벽과 세상의 몰락, 이민자, 그리고 니케의 참견.
“저번에 말한 적 있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가 너라고. 저번 세상의 결말도 너로 인해 정해졌어. 이번 세상도 마찬가지일 거야. 난 확신해.”
이제 어느 정도 목이 풀렸는지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온 니케가 진희가 들고 있는 브로치에 손가락을 얹었다.
“알고 싶지 않아? 왜 네가 이 세상으로 환생하게 되었는지, 왜 네 주변에 있는 인물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지. 그리고 또 누가 이 세상에 몬스터, 혹은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을지.”
“내가 궁금해야 할 이유는 없어.”
“거짓말. 거짓말이야.”
진희의 말에 니케가 고개를 들이밀며 말했다.
“넌 생각보다 상냥하고, 의외로 섬세하지. 그리고 애정이 강해. 네가 네 사람을 버릴 리 없어.”
그런 의미에서, 하고 니케가 말을 덧붙였다.
“세영이는 너와 딱 맞는 파트너야. 세영은 권력자 중 가장 이상적이니까. 이서한, 신현성보다 더 너에게 어울려. 그래서 네 얘기를 한 거야.”
“내게 도움이 된다고?”
“응.”
물론 한국에 오고 싶은 마음에 저지른 일이기도 하고, 니케는 진희가 화낼 것 같은 뒷말을 꾹 참았다.
“네 운명만큼 중요한 건 없어. 그 운명에서 방해될 이서한과 신현성 보다, 세영이가 더 큰 도움이 될 거야.”
결국 니케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었다.
“난 네가 세영이와 함께하길 바라.”
세영이 진희에게 자신의 것이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권유였다.
“내가 뭘 믿고 네 충고를 들어야 해?”
“난 괴짜니까. 삼라만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몇 번이고 말하잖아, 진희야.”
니케가 진희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언제나 네 편이야.”
“푸.”
니케의 말엔 웃음기가 없었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던 진희는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막고 킥킥 웃던 진희가 니케의 손을 어깨에서 밀어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응?”
진희의 손이 다시 니케의 목으로 다가갔다. 니케가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동시에 진희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니케에게 다가갔다. 서로 숨소리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진희가 니케의 목을 어루만졌다.
“누구와 다닐지는 내가 결정해.”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진희의 서슬 파란 눈동자가 세영을 향했다. 이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세영이 진희와 눈을 마주했다. 서로 조금의 물러남도 없었다.
세영의 눈엔 확신과 믿음이 보였고, 진희의 눈엔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알아서 해. 운명이고 과거고, 알고 싶으면 내가 알아낼 거고, 해결도 직접 하겠어.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마.”
“……진희 씨.”
“당신도 마찬가지야. 의도가 어떻든 난 내 인생 참견하는 사람 싫어해.”
진희는 니케를 밀어냈다. 니케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쌌다.
방 안은 어느새 진희의 마력으로 가득했다. 살기가 어린 짙은 마력은 지금 당장에라도 세영과 니케를 찍어 누를 것처럼 주변을 에워쌌다.
“미안하지만 호위는 여기까지야. 더는 어울려주고 싶지 않으니까.”
진희가 세영을 지나쳐 걸어갔다. 세영은 굳은 표정으로 진희를 멈춰 세우려 했으나, 돌아서자마자 온몸을 압박하는 마력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도일 줄은…….’
세영도 명색이 A급 헌터였다. 마력량에선 누구에게 밀린 적이 없었는데, 방 안을 채운 마력의 밀도는 세영도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지금 진희를 멈춘다면, 그녀가 돌아서서 자신의 목을 떨어뜨릴 것만 같았다.
눈으로 보일 것 같은 살기에 세영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진희를 보내주고 말았다.
“……괴물.”
그저 자그마한 경악, 감탄만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16. 준비
-서진희 씨, A급 헌터 업적 평가를 위해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청하를 비롯해 3인방은 최근 진희에게 말도 못 걸고 있었다. 외출한 후부터 진희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한이 찾아와 진희에게 사과까지 했지만, 그녀는 웃으며 그를 돌려보낼 뿐 기분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덕분에 훈련하던 아이들은 적막한 분위기에 기가 눌릴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헌터관리본부란 곳에서 전화가 도착했다. 진희의 A급 헌터 승급을 위해 업적 평가를 진행하겠다는 이야기였다.
“흐음.”
“A급 되는 거예요?”
진희의 전화가 끝나자, 곁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청하가 다가왔다. 최근 진희의 분위기가 안 좋다곤 해도, A급이란 단어가 들리자 호기심이 생겼다.
청하는 아이 중 유독 상급 헌터에 환상이 많았다. 소라와 함께 진희라면 곧 S급 헌터가 될 거라고 곧잘 떠들기도 했다.
진희는 자신을 기대에 찬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청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잉?”
그리고 오동통한 볼살을 꼬집었다. 최근 살이 빠지고 키가 크기 시작하면서 젖살이 빠지긴 했지만, 여전히 귀여운 미소년의 얼굴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아, 아파여.”
“후우.”
청하가 으아아 하면서 진희의 손을 떼려 했지만, 진희는 계속해서 볼살을 주물럭거렸다.
최근 머릿속이 복잡해져 주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3인방과 카온이 이쪽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본의 아니게 주변에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응, 갈 거야.”
“우, 우와아! 그럼 A급 바로 되는 거예요?”
“몰라, 시험을 보라던데? 합격해야 하지 않을까?”
B급이 된 지 고작 몇 주가 된 참에 A급 승급은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인들은 이게 당연한 순서라고 생각했다.
드래곤을 처치한 후 B급이 되었고, 미국에서 1등급 던전이 아닐까 추측되는 신화 속 괴물을 처치했다. 거기에 관리본부의 골칫덩이였던 정령의 동굴까지 홀로 돌파했으니, 관리본부는 진희의 실력을 A급 이상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이례적인 최단기간 A급 승급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한동안은 던전 공략에 집중해야 하니 미룰까 생각했지만, 청하의 얼굴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너도 갈래?”
“어! 저도 따라가도 돼요?”
“되겠지?”
기분 전환 겸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간 세금 때문에 승급하는 걸 꺼리긴 했지만, 이제 이름도 알려진 판국이라 아예 높은 등급을 챙겨놓는 것도 좋을 듯했다. 적어도 A급이 된다면 언론이나 어지간한 기업들도 쉽사리 건드릴 순 없을 테니까.
게다가 시험에서 떨어진 아이들을 위로해 줄 수도 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학생들에게 헌터란 환상의 직업으로 통하다 보니, 헌터 업무를 하러 간다고 하면 이렇게 눈을 빛내곤 했다.
역시나 같이 가잔 소리에 가장 좋아하는 건 소라와 청하였다.
* * *
시험은 정부 서울청사의 헌터관리본부에서 예정되었다.
“관리본부면 현성 씨가 일하는 곳 아니에요?”
“잘 모르겠어. 뭐가 어떻게 다르다고 설명은 해줬었는데.”
소라의 물음에 진희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청하가 눈을 빛내며 대신 대답했다.
“헌터관리본부는 일반적인 헌터 인사업무, 정책 총괄을 맡는 곳이에요. 현성 아저씨가 있는 곳은 관측방위대로 헌터의 치안 및 법률 준수를 위해 일하는 실무팀이죠. 기관의 상하 관계로 따지면 관리본부가 더 위라고 보면 돼요.”
“너 되게 잘 안다?”
“헤헤, 나 기말고사 헌터 이론 과목은 100점이야.”
소라가 대단하다며 청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디 보자, 우리가 가야 할 곳이…….”
관리본부의 대지는 거대했다. 건물도 여럿이었고, 훈련장으로 보이는 강당도 여기저기에 보였다. 크기만 따지자면 저번에 본 헌터 아카데미의 배는 될 것 같았다.
정부청사가 아니라 자연공원에 온 것처럼 말끔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건물 사이사이엔 호수나 꽃밭이 위치해 있었다.
돈이 많긴 한가 봐, 진희는 서울 한가운데에 있는 인공적인 숲을 보며 내심 생각했다.
진희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살폈다. 안내 문자엔 가야 할 곳이 ‘상급 헌터 업적 관리실’이라 적혀 있었다.
“저기래요!”
쏜살같이 표지판을 살핀 청하가 길을 찾아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일행은 청하의 안내대로 걷기 시작했다.
“근데 민혁이는 왜 안 온대?”
“모르겠어요. 관리본부 간다고 하니까 식겁하던데요.”
“그래?”
진희가 종혁에게 묻자, 종혁은 얼굴이 새파래진 채로 바깥으로 나가버린 민혁을 떠올렸다. 무뚝뚝한 민혁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건 종혁도 처음 보는 일이었다.
“아, 여기에 헌터 길드가 있구나.”
길을 따라가던 중, 숲 사이로 한 건물을 보며 진희가 중얼거렸다. 건물 앞에 놓인 낡은 표지판엔 ‘헌터 길드 서울 본부’라고 적혀 있었다.
“길드는 뭐 하는 곳이에요?”
“관리본부가 정부에서 헌터 관리를 위해 만든 곳이라면, 길드는 헌터들이 사냥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만든 민간 조합이야! 관리본부가 교육부라면, 길드는 학부모연합, 학생부인 거지!”
“어, 어어.”
또다시 질문한 소라에게 청하가 달려와 설명했다.
“……헌터 이론 선택 과목 아냐? 왜 그렇게 잘 알아?”
헌터가 되기 전까진 큰 관심이 없었던 소라는 조금 질린다는 얼굴로 청하를 바라보았다. 청하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헌터가 되고 싶다면 이 정도는 상식이지!”
졸지에 상식도 모르는 사람이 된 소라는 헛웃음을 냈다.
이윽고 일행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커다란 돔 형태의 강당을 끼고 있는 건물이었다. 관리실로 보이는 곳으로 다가가서 신분증을 보여주자 문을 열어주었다.
“우와아.”
가장 먼저 들어간 건 역시나 청하였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마감된 바닥과 벽을 보며 청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별다른 게 있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헌터관리본부에 왔다는 감상 때문에 모든 게 신기해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