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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72화 (72/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72화

부려먹더라도 자신을 위해 주는 서한과 책임을 강요하는 세영의 차이는 뚜렷했다.

재미있는 구도였다. 우리를 위하는 서한, 모두를 위하는 세영. 후계자 싸움에 신경을 쓴 적은 없었지만, 승자가 누가 될지는 제법 궁금해졌다. 진희는 신나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세영을 보며 생각했다.

* * *

세영의 스케줄은 이동의 연속이었다. 호텔 숙소에서 짐을 풀고 금강의 본사에 들른 후, 본사의 사업장을 둘러볼 계획이었다.

“사업장?”

“표현하자면 사업장이란 거지, 의미는 다양합니다. 아카데미, 기업용 사냥터 던전, 마력 측정 기관, 연구소 등등을 통틀어 사업장이라고 부르곤 해서요.”

“……전부 갈 건 아니죠?”

일정이 복잡하고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진희가 입을 내밀었다. 세영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늘 일정은 본사와 아카데미뿐이에요. 아무리 저라도 이틀 사이에 모든 사업장을 들를 순 없으니까요.”

호텔에 짐을 내리거나 본사에 도착 보고를 올리는 잡다한 일은 모두 경환이 처리했다. 진희는 그저 차에 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거나, 세영이 사 온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렇다고 진희가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 명 정도 있네요.”

“파파라치인가요?”

“헌터예요. 셋 모두, 으음, B급은 될 것 같네요.”

지역을 옮길 때마다 세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고 있어, 그들에 대해 세영에게 알려주었다. 노골적으로 시선이 느껴지는 데다 진희의 눈엔 뻔히 헌터들의 수준이 보이다 보니 찾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놔두세요.”

한 명 정도 잡아 와 볼까, 진희가 물어봤지만 세영은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했다.

“괜히 치우면 더 늘어날 하루살이들이에요. 차라리 모르는 척 놔두는 게 편해요.”

“인기가 많으시네요.”

“진희 씨만 할까요?”

세영의 사업장 방문은 순조롭게 이뤄졌다. 본사에 들른 후 곧장 차를 타고 이동한 일행은 ‘신월 아카데미’라고 하는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아카데미의 구조가 신기했던 진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자, 세영은 몸소 아카데미를 안내해 주겠다며 나섰다.

“금강이 후원하는 아카데미는 총 두 개가 있습니다. 여기가 국내에선 내로라하는 신월 아카데미죠.”

신월 아카데미는 마치 대학교처럼 교정이 나뉘어 있었다. 훈련장, 식당, 도서관, 연구소 등, 의외로 평범한 구조였다. 좀 더 폐쇄적이거나 난해한 시설이 있지 않을까 싶었던 진희는 활기차고 개방적인 교정에 놀란 눈치였다.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마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꽤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실속은 없네요.”

“진희 씨 눈엔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진희의 말에 세영이 쓰게 웃었다. 아카데미가 분명 헌터를 양성하는 우수한 기관인 건 맞지만, 진희의 눈에 찰 정도의 인재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B급으로 올라갈 만한 인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싹이 보일 정도로 우수한 인재는 보통 기업에서 직접 양성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실력에 자신을 가진 사람들은 애당초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도 않죠. 흔하지도 않고요.”

헌터의 대부분이 C급 이하에서 상주하고 있는 걸 떠올리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진희는 문득 자신이 생각하는 인재의 기준이 많이 올라갔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그저께 보육원에서 아이들의 시험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우리 애들이 잘나긴 했구나.’

“보육원 아이들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잘 없죠?”

“……당신.”

진희는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하는 세영을 바라보았다. 진희의 메마른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세영은 여전한 웃음으로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진희 씨. 전 유망한 신인이라면 모두 조사한다고.”

새삼스러운 사실을 말하게 한다며 세영이 덧붙였다.

“보육원의 아이들이 특별하다는 건, 진희 씨보다 먼저 알고 있었답니다.”

“……당신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이제야 저에 대해 궁금해지셨나요?”

진희와 세영은 드디어 아카데미의 이사장실 앞에 섰다. 세영은 이사장실 문을 열며 말을 이었다.

“마침 여기까지 온 김에, 차나 한잔 마시면서 얘기를 나눠 봐요. 제 친구도 진희 씨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문이 열리자 방의 중앙, 중역 의자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진희를 맞이했다.

“안녕-! 오랜만이야! 나 기억하지?”

그곳에 있는 건 미국에서의 악연, 바로 괴짜 니케 레만이었다.

* * *

“저엉말 보고 싶었다니까! 나 참, 한국은 입국하기도 어려워서 위치를 알아도 따라갈 수가 없지, 그렇다고 진희가 해외로 나갈 기미도 안 보이지. 전화번호라도 수소문해서 알아보려 했더니 찾을 수도 없더라. 진희는 정보 조작하는 부하라도 두고 있는 거야? 결국 여기 이 짜증 나는 애한테 도움을 받고 말았잖아!”

폭풍처럼 몰아치는 니케의 말에 진희가 눈꼬리를 치켜떴다.

“시끄러워.”

“아앗, 그 날카로운 말투! 듣고 싶었어!”

“농담 아냐.”

“응! 목소리 줄일게.”

진희의 목소리에 살기가 담기자 니케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입에 자크를 채우는 시늉까지 하며 입을 꾹 다문 니케에게서 시선을 돌린 진희가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지켜보던 세영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수작을 부리시네요?”

“많이 화나셨나요?”

“대답에 따라서 더 화날지도 모르겠어요.”

진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마법적인 처리는 보이지 않는 평범한 방이었다. 벽엔 아카데미의 이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밝게 웃으며 학생들과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사장님은 지금 휴가 중이세요.”

“흐음.”

이사장실의 의자는 편안해 보였다. 진희는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니케를 내려다보았다. 니케는 꾹 닫은 입꼬리를 올리며 헤실헤실 웃었다. 녹슨 금발의 머리카락이 입가에 걸려서 인상이 귀엽기보단 위험해 보였다.

“비켜, 다리 아파.”

“잉.”

진희는 니케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발로 찼다. 니케가 과장되게 바닥에 넘어졌다.

마치 당연히 자신의 자리인 듯 의자에 앉은 진희가 다리를 꼬며 세영에게 말했다.

“이 괴짜를 한국에 데려온 게 세영 씨인가요?”

“네, 맞아요.”

“괴짜의 목적이 저란 건 알고 계셨고?”

“당연하죠.”

“괴짜와 친한 걸 보니, 그간 보육원이나 제 소식도 모두 괴짜한테 들었나 봅니다?”

“괜찮은 추리력이시네요.”

좀처럼 의도를 종잡을 수 없었다. 괴짜와 친한 계기, 보육원의 정보까지 조사한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왜 이런 상황을 굳이 자신에게 보여주려 하는 것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제게 접근한 이유가 뭔가요?”

“…….”

니케가 버젓이 아카데미 이사장실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는 세영이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게 타당했다.

계획의 시작이 서한이 자신에게 부탁하는 것부터였는지, 공항부터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진희의 물음에 잠깐 침묵하던 세영은 천천히 진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책상 앞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제 것이 되어주실래요, 진희 씨?”

뜬금없는 고백이었다. 진희는 인상을 찌푸렸고,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니케는 뺨에 손을 올리며 무왓 하고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 * *

세영의 인재를 찾는 재능은 그와 만났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다. 부하 직원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상주의자였지만, 세영이 키운 헌터들은 손색없는 일류였다.

세영이 인재를 찾는 방식은 단순했다. 눈에 띄는 인재를 발견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신상을 조사하고, 영입하기 위해 물심양면을 지원한다.

세영은 자신이 픽한 헌터의 재능을 믿고 있기에 언제나 전력을 다해 영입에 몰두했다.

진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다른 헌터들과 진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일반 헌터들처럼 명예와 금전을 위해 활동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강자든 특정한 욕심을 가지게 마련이다. 재화, 명예, 권력 등등, 지금껏 세영은 그런 욕심들을 충족시켜 주는 방식으로 영입을 해왔지만, 진희에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욕심이 터무니없이 많거나 특이한 경우는 있어도, 진희처럼 아예 보이지 않는 경우는 세영도 처음 봤다.

욕심이 없으니 영입을 위한 미끼도 흔들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의 곁엔 언제나 서한이 있었다. 함부로 접근하는 것도 어려웠고, 소용없는 미끼를 들이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에 넣을 수 없으니 갈증은 더 깊어져만 갔다. 처음 눈여겨본 건 드래곤을 잡았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였는데, 미국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잡았단 소식엔 첫사랑에 빠진 것처럼 감정이 격해졌다.

그 와중에 접근한 게 바로 괴짜 니케였다.

“니케는 진희 씨가 관심이 있을 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제안했죠.”

“둘이서 멋대로…….”

진희가 치밀어오르는 욕을 가까스로 참았다. 바닥에 앉아 있던 니케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방구석으로 도망쳤다.

“괴짜는 믿을 수 없지만, 말해준 정보가 제법 인상적이었거든요. 그래서 니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도움을 줬죠.”

“무슨 정보였는데요?”

“당신의 출신에 대해서 알려주더군요.”

“출신?”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네, 당신의 출신에 대해서요. 다른 세상에서 온 환생자라, 흥미로운 정보였어요.”

“컥!”

세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진희가 니케의 목을 손에 쥐었다. 방구석에 있던 니케에게 순식간에 다가가, 조금의 망설임이 목을 압박했다. 니케가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목의 핏줄이 돋을 정도로 강하게 압박하며 진희가 세영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말했나요?”

“다, 당신이 이 세상 태생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세상에 관한 기억을 가진 자들이 당신 말고도 많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들의 정보를 모아오면, 당신이 관심을 가질 거라고도 말했어요. 그게 끝입니다.”

“더 들은 건 없나요?”

“없습니다. 맹세코.”

세영은 식은땀을 흘렸다. 니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진희에게 역린이 될 수 있는 정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격한 반응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진희의 얼굴에 조금의 감정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가장 두려웠다.

그녀는 아무런 내색 없이 니케를 이 자리에서 죽이려 하고 있었다.

“입 참 가볍네. 아는 걸 떠벌리지 않으면 못 참는 스타일인가?”

“윽,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기서 피를 보긴 장소가 안 좋긴 한데.”

“사, 알.”

“살려줘?”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던 니케가 손을 거세게 흔들었다.

“어떻게 생각하나요, 세영 씨?”

친구의 생사를 결정해 달라고 상냥하게 묻는 진희에게 세영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살려주세요.”

“흐음.”

진희가 손아귀에 힘을 풀었다.

“커헉!”

니케가 자신의 목을 감싸고 거세게 기침했다. 목에 확연히 드러나는 손자국을 바라보던 진희가 말했다.

“그럼 변명을 들어볼까? 그렇게 떠벌리고 나서, 내 앞에 나타난 건 무슨 자신감이야?”

“컥, 그, 하악.”

니케는 한참을 숨을 고르다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침을 질질 흘리며 웃는 모습은 마치 실성한 것처럼 보였다.

“다, 너를, 위해서야.”

“뭐?”

“진희야, 넌 아무것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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