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68화
이제 주인의 곁에서 기사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기쁨과 또다시 과거가 되풀이될 것 같은 걱정이었다. 비참했던 그녀의 마지막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네.”
진희는 카온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기사단을 만든 건 충동적이었다. 과거의 기억 덕도 있었지만, 불쌍한 아이들의 모습에 동정이 생겨 일을 벌였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기사단에 나쁜 추억만 있는 건 아니거든.”
자신을 저주하다 죽어간 부관도 있고, 전쟁을 나갈 때마다 걱정해 주던 스콰이어도 있었다. 시간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이란 흔한 소리처럼, 진희에게 피로 얼룩진 과거 속에서 기사단이란 안식처와도 같았다.
“……적어도 내 단원들은 날 배신하지 않았으니까.”
나지막이 중얼거린 진희의 말에 카온이 이를 악물었다.
진희, 바제트의 단원들은 그녀에게 충성을 지켰다. 죽을 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울부짖으며 그녀를 찾았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아.”
“절대 배신하지 않습니다.”
“안다니까.”
“당신의 동생처럼…….”
“카온.”
진희가 카온의 뺨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상냥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거기까지야.”
“……죄송합니다.”
악의가 있어 한 말이 아니란 건 알지만, 선을 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진희가 카온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그의 정수리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믿고 있으니까. 내가 용인을 한두 명 봤겠어?”
용인의 충성심은 알아준다. 진희의 명령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갈 인물이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진희도 카온의 앞에선 평소 꺼내지 않았던 속내를 드러내곤 했다.
“그러니까 걱정 말고, 너도 훈련 적당히 해. 괜히 서한 씨에게 시비 걸지 말고.”
“…….”
이건 또 대답을 안 한다. 진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온이 서한을 적대시하는 이유는 뻔했다. 그가 바제트의 죽음을 보았다면, 황태자와 얼굴이 똑같은 서한을 좋아할 수만은 없겠지. 당장 자신만 해도 서한의 얼굴을 보면 때때로 짜증이 날 때가 있었다.
“어차피 질 건데 왜 싸움을 걸어?”
“……비켜주십시오.”
“왜, 훈련하게?”
“예.”
고작 그거 훈련한다고 해서 이기겠나. 진희는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고, 그 말을 들은 카온이 굳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훈련 적당히 하라고 충고한 주제에 괜히 건드려서 욕구만 돋우고 말았다. 진희의 장난스러운 얼굴을 보며 카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강당의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거치대에 있는 자신의 목검을 들고 말했다.
“대련 좀 해주시겠습니까?”
“와, 이제 나한테 화풀이도 하려나 봐.”
“그럼 화풀이 되게 좀 져주시겠습니까?”
“승부의 세계엔 그런 거 없단다, 울보야.”
울보란 소리에 카온의 굳은 미간이 꿈틀거렸다.
“……안 울었습니다.”
“그을쎄, 악몽 꾸면서 흘린 건 식은땀일까~ 눈물일까~”
진희도 목검을 들고 카온에게 걸어갔다.
한밤중, 두 기사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소라, 종혁, 민혁과 청하는 강당에 모였다. 각각 자신 있는 무기를 들고 강당의 구석에 앉았다.
“이러니까 꼭 기말고사 보는 것 같아.”
“청하 너 공부 못하잖아.”
“주, 중상은 하거든?”
청하가 소라의 말에 발끈하며 소리쳤다. 마침 방학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보육원 선생님인 지은정에게 전 학기보다 떨어진 성적표를 제출했던 청하는 안 그래도 이 화제에 민감했다.
반면 소라는 시험 기간이든, 방학이든 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소라 넌 이번에 기말고사 어땠어? 어려웠잖아.”
“평범했어.”
평범한 게 전교 순위급이다. 종혁은 소라의 짧은 대답을 듣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3인방 중 가장 수련에 매진한 소라였지만, 성적은 이 중에서 가장 높았다.
민혁과 종혁은 딱 중간에서 조금 위였지만, 소라는 고등학교 입학 후 단 한 번도 순위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민혁은 곁에서 머리 차이는 별수 없어, 하고 한 층 더 절망적인 말을 내뱉었다.
“이 내신으로 대학교 수시 장학금 받긴 글렀겠지?”
“헌터로 돈 많이 벌면 되잖아.”
소라의 말에 종혁이 그럼 좋겠지만, 하며 쓰게 웃었다.
저렇게 당당한 포부를 밝힐 정도로 실력이 있다면 좋았겠지. 아직 자신의 성취에 자신이 없던 종혁은 소라에게 받아칠 말이 없었다. 종혁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 뒤에 서 있던 시영이 다가왔다.
“괜찮아, 형! 형도 이제 마법 사용할 줄 알잖아!”
“으응, 고, 고마워.”
최근 들어 시영의 칭찬이 무겁다. 종혁은 슬쩍 시영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시영은 최근 조금이라도 시무룩해지려 하면 이렇게 달려와 칭찬해 주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소라와 민혁이 둘이서 뭐라고 소곤거렸다.
“잡담은 다 했니?”
마침 강당 문이 열리고 진희가 들어왔다. 그녀는 평소 쉴 때처럼 청바지에 박스티를 대충 걸치고 있었고, 그 뒤에서 서한은 말끔한 정장을 입고 입장했다.
“시험이라며, 그런 차림으로도 괜찮냐?”
“우리 집에서 하는 건데 굳이 차려입을 필요 있어요?”
“나한텐 진지하게 오라며.”
“순진하게 믿으실 줄은 몰랐죠.”
‘이게 진짜.’
서한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넥타이를 풀었다.
“신현성은 안 오나?”
“바쁘대요.”
테러범의 단서를 찾은 이후 현성은 수련과 업무를 겸하며 바쁜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 이번 시험의 감독을 현성에게도 부탁했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나도 한가한 게 아니야.”
서한도 바쁜 몸이었다. 업무는 매일 쌓여가고 있고 성장을 위해 훈련할 시간도 부족했다. 서한의 말에 진희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아요, 그래서 와준 게 참 고마워요.”
“…….”
서한이 훅하고 들어온 진희의 말에 질끈 눈을 감았다. 넘어가면 안 된다, 넘어가면 안 된다 되뇌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 웃음에 넘어간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 앉죠.”
의자는 세 개 준비되어 있었다. 의자는 마치 포장마차에서나 볼 법한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였다. 서한이 설마 하는 얼굴로 의자를 가리켰고, 진희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착석했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고 턱을 괴는 진희를 보며 서한은 포기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카온은 언제나처럼 의자에 앉지 않고 진희의 뒤에 섰다.
아이들은 눈치를 보며 강당의 중앙으로 나왔다. 진희는 웃는 얼굴이었지만 서한은 진짜 시험 감독관처럼 진지한 눈으로 아이들을 살폈다.
각각의 장비가 모두 다른 게 특징이었다.
우선 전사를 지망하는 아이는 둘. 청하와 소라로, 각각 롱소드와 가시가 박힌 건틀릿을 장비하고 있었다. 마법사인 종혁은 스태프를, 민혁은 무기는 없으나 마정석이 박힌 손목 보호대를 끼고 있었다.
“다들 진검을 쓰는군.”
“그러니까 위험하면 나서야 해요.”
“그건 걱정 마. 포지션은 마법사 둘에 전사 둘?”
“맞아요.”
서한은 앞서 진희가 설명했던 아이들의 능력을 떠올렸다.
청하는 염동력, 소라는 염파력, 민혁은 염화력, 종혁은 텔레파시.
손을 대지 않고도 물건을 움직이는 염동력, 진동과 소리를 조절하는 염파력, 불을 일으키는 염화력, 마지막으로 상호 통신이 가능하다는 텔레파시.
텔레파시를 제외하면 전투에 제법 도움이 될 것 같은 능력들이었다.
‘이능력을 쓰는 헌터는 들은 적도 없긴 하지만.’
서한도 이능력자를 본 적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는 어린아이였고 능력의 크기도 보잘것없었다. 이능력자는 오랜 역사와 신비를 가진 것에 비해, 만능이라 불리는 마력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능력으로 라이터 불꽃만 한 불을 일으킬 바에야 마법으로 불구덩이를 만드는 게 더 흔했으니까.
“시험은 알다시피 대련이야. 두 명씩 진행해서, 이기는 사람끼리 한 번 더 대련한 후 승자를 가릴 예정이고. 이건 너희의 성장을 보기 위한 시험이지, 승자를 보상하기 위한 시험이 아니야. 승자가 아니라 파티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뽑는 시험이란 걸 잘 알아둬.”
“네.”
승자라고 무조건 파티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파티에 어울리는 사람을 뽑기 위한 시험이기에, 지더라도 자신의 개성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게 더 중요했다.
“우선 처음은 청하와 소라가 대련하자. 앞으로 나와.”
진희의 말에 민혁과 종혁은 뒤로 빠지고, 청하와 소라가 서로를 마주했다.
청하는 자신의 신장에 어울리지 않는 롱소드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자세를 잡았고, 소라는 건틀릿을 끼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수습 기사 중 가장 많은 대련을 치러본 게 이 둘이었다. 서로 방심할 수 없는 상대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진희가 청하와 소라를 번갈아 보았다.
“시작!”
종소리 대신에 진희의 손뼉 소리가 대련의 시작을 알렸다.
* * *
선수는 소라가 가져갔다. 자세를 낮추고 달려든 소라는 단숨에 청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청하는 고개를 기울여 공격을 피한 후, 곧장 검을 휘둘러 소라의 옆구리를 노렸다.
그러나 청하의 반격을 예상한 듯, 소라는 반대편 팔의 건틀릿으로 검을 막았다. 동시에 검을 밀어 청하의 자세를 무너뜨리고 몸을 돌려 명치를 정확히 걷어찼다.
“윽!”
밀려나는 와중에 낙법을 빠르게 취한 청하가 땅을 박차고 소라에게 달려들었다. 신장의 차이는 있지만, 무기의 공격 범위는 청하가 유리하다. 청하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들어 소라에게 던지며 검을 찔렀다.
청하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십자드라이버였다.
“능력 쓴다 이거지.”
공구 상자에서 가져온 드라이버는 세 개. 청하는 그것들을 능력을 사용해 허공에 띄워 소라에게 던졌다. 속도는 크게 위협적이지 않지만 시야를 가리는 건 문제다. 소라는 혀를 차며 드라이버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러나 튕겨 나간 드라이버는 금세 돌아와 소라를 노린다.
그 틈을 타 청하가 계속해서 검을 찔러 넣었다.
“……저 둘이 훈련을 받기 시작한 게 1년이 안 됐다고 했나?”
“맞아요.”
둘의 대련 모습을 진지하게 지켜보던 서한이 짧게 말했다.
“천재로군.”
그가 내린 평가였다.
염동력까지 사용하기 시작한 청하의 공격은 점점 화려해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소라를 노리는 드라이버들과 청하의 변칙적이고 날쌘 움직임은 몇 달이 아니라 1~2년 수련한 헌터를 보는 듯했다.
신체를 강화하고 있는 마력량은 C급에 겨우 도달하는 정도였지만, 유동적이고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은 어중간한 C급들보다 좋다.
저게 초등학생 고학년의 능력이다 이거지. 서한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둘을 훑어보았다.
염동력을 사용하는 청하가 화려한 공격으로 밀어붙여서 그렇지, 그걸 차분하게 받아내는 소라 또한 대단했다.
검보다 범위가 짧은 건틀릿을 끼고 철벽과도 같은 방어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야 바깥에서 공격해 오는 드라이버를 피하거나 쳐내고, 청하의 검 끝의 궤도를 아슬아슬하게 밀어내는 모습은 마치 진희를 보는 듯했다.
“……다 네 솜씨였군.”
“제 단원이니까요.”
어디선가 많이 본 움직임인가 했더니, 청하와 소라의 자세는 모두 진희의 전투 방식을 따라 한 것들이었다.
청하는 검을 든 진희를, 소라는 체술을 하는 진희의 자세를 모방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