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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66화 (66/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66화

진희가 보았을 때 민성은 잠자코 경찰에 자수할 인물이 아니었다. 인맥도 능력도 없는 그가 경찰에 잡혀봤자 남는 것은 사형 집행뿐이으니까, 그는 온 힘을 다해 도망치겠지.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를 입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그리고 죽어간 헌터들의 동료들의 복수를 피할 수 있을까.

‘소라도 슬슬 마음을 다잡았으려나.’

소라가 민성을 죽이고 싶어 한다면 도와줄 것이고, 용서하겠다 한다면 잠자코 민성을 다른 헌터들에게 넘길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든 민성이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엔 변함없다.

“헉, 허억!”

목에 난 상처와 허리의 통증 때문에 바닥에 주저앉은 민성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진희가 뒤돌아섰다.

“곧 던전이 클리어될 거야. 안 잡히게 잘 도망쳐봐.”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민성의 원망과 증오가 담긴 눈초리가 진희의 뒤통수를 째려보고 있었지만, 고작 그 정도의 감정에 두려워할 진희가 아니었다.

“눈 깔고.”

“악!”

발뒤꿈치로 바닥에 있는 돌을 걷어차 민성의 이마에 명중시켰다.

그렇다고 싸가지 없는 민성의 눈초리를 가만 참아줄 성격도 아니었다.

[너 되게 무섭다.]

“그래?”

검 속에서 울리는 바르그의 질린 목소리를 들으며 진희가 휘파람을 불었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 * *

[난 번개의 정령, 바르그야.]

안개가 걷히자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던전이 클리어되는 광경을 안에서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진희는 허물어져 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바르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세상은 정령들의 쉼터였어. 얼음과 어둠의 정령왕은 이 세상의 중심이었지. 하지만 그들이 나타나고서 이 세상의 성벽은 부서지고 말았어.]

[그들은 정체불명의 군세를 몰고 이 세상을 헤집었어. 정령들을 미치게 만들고, 온 세상에 통로(게이트)를 열며 세상의 법칙을 뒤바꿨지.]

그들의 정체는 바르그도 알지 못했다. 대화조차 통하지 않는 그들은 그저 파괴만이 목적인 것처럼 세상을 파괴했다.

그것을 바르그는 ‘성벽이 파괴되었다’고 표현했다.

“성벽이 대체 뭐야?”

[세상을 지키는 벽. 올바른 인과, 법칙, 영혼의 수, 신의 존재, 그런 것들.]

말하자면 자연, 과학, 상식 따위의 ‘당연한 일들’을 뜻한다. 생물은 태어나면 죽고, 중력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며,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들.

성벽이 부서진다는 건 그런 당연한 사실들이 붕괴한다는 뜻이었다.

“이해가 안 돼. 뭘 어떻게 하면 성벽을 부술 수 있는 거야?”

[절대적인 자연법칙은 함부로 바꿀 수 없지. 하지만 그 세상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의 운명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성벽은 흔들려.]

무너진 하늘이 검은색 공백으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던전이 곧 닫힌다는 신호였다.

[내일 죽어야 할 자가 오늘 죽고, 오늘 죽어야 할 자가 영원히 살면, 그 두 존재의 값만큼 성벽은 마모돼. 거주민들의 운명이 견고하고 변하지 않을수록 성벽은 높고 단단한 법이니까. 반대로 모든 거주민의 운명이 가변적이고 변칙적이라면, 그 세상의 성벽이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겠지.]

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법칙이 무엇일까.

죽이거나 살리는 것은 하수의 방법이다.

[힘을 쥐여 주면 돼.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힘과 욕망을 세상 주민들에게 쥐여 주면, 모든 운명이 흔들리고 성벽은 무너져. 마치 정령왕이 존재를 사로잡는 힘을 가져 타락해버린 것처럼.]

“그건 꼭…….”

현대, 지구의 이야기 같다.

진희는 빛이 사라져가는 던전 속에서 중얼거렸다.

* * *

“잠깐만, 그럼 내가 성벽을 부순 자라고 했던 건 무슨 뜻이야?”

던전이 클리어되고 게이트가 닫혔다. 진희는 건물의 로비로 돌아왔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바르그를 불렀지만, 바르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기운이 없어. 힘을 많이 써서…… 조금 있다 얘기하자.]

“궁금하게만 만들고 자면 어떡해!”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에…….]

정령왕을 죽일 때 큰 힘을 사용하고, 자신의 세상에서 나온 후유증으로 잠이 몰려왔다. 진희는 검 속에서 잠이 든 바르그에게 몇 번이고 말을 걸었지만, 바르그는 결국 깨어나지 않았다.

진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저번에 만났던 전생의 인연, 클로이의 대화와 이번 바르그의 이야기까지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았다.

이걸 어디서부터 풀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마침 주변을 정리하고 있던 소현이 다가왔다.

“언니! 설마 언니가 던전 클리어한 거예요?”

소현의 말에 주변 헌터의 이목이 단숨에 진희에게 몰렸다. 진희는 그 헌터들 사이에서 민성을 찾았지만, 그는 진작에 도망친 듯 보이지 않았다.

“응.”

소현이 입을 떡 벌리며 말을 더듬었다.

“세, 세상에. 그럼 그 동굴에서 돌아올 때 보스를 죽이고 온 거였어요? 진짜로?”

“맞아.”

“언니 생각보다 진짜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응, 맞아. 나 대단해.”

“조금 재수 없기도 하고.”

진희가 싱긋 웃었다. 웃고 있음에도 묘하게 노려보는 듯한 진희의 눈에 소현이 헛기침을 하며 진희를 이끌었다.

“그럼 어서 관리자한테 가요, 이거 업적 등록하면 포상이 대박이잖아요.”

소현이 굳이 진희를 데려가지 않아도, 던전을 관리하던 정부 측 공무원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마정석도 챙겨왔거든?”

“와! 다행이다, 저 이번에 아예 공치는 줄 알았거든요!”

“배분은 9 대 1이야.”

“……2 정도 주면 안 돼요?”

“양심 없어?”

“해본 말이에요.”

말은 그래도 소현의 입꼬리는 하염없이 올라갔다. 그 많은 마정석 중 1할 정도면 자신의 몫은 충당하고도 남았다.

이 마정석을 다 팔고 포상금도 받으면, 다음 던전을 위한 준비물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겠지. 진희는 허겁지겁 달려와 말을 꺼내려던 공무원에게 먼저 말했다.

“포상금 현금으로 되나요?”

14. 후회스러운 과거와 강해진 병아리들

아이들의 수련 욕구는 목표가 정해지자 더욱 커졌다. 청하와 소라는 매일 대련을 했고, 종혁은 시영에게 마법뿐 아니라 워메이지 특훈까지 받고 있었다. 민혁은 자신이 가진 이능력인 염화력(파이로키네시스)을 키우기 위해 보육원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아이들은 경쟁을 시작했고, 카온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근데 굳이 나와 대련을 할 이유가 있나?”

대상은 서한이었다. 진희가 보육원을 비운 틈에 카온은 서한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여 수련을 부탁했다. 자신만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적의를 품던 카온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서한은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서한도 최근 자신의 성장에 벽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강자와의 대련은 언제나 환영하는 바였다.

게다가 자신의 전력이 외부에 유출될 걱정도 할 필요 없으니, 서한에게 보육원은 꽤나 괜찮은 수련장이었다.

하지만 카온이 굳이 자신을 지목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에게 호의적인 현성이나 기술 면으로 우월한 진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

“여전히 말이 없군.”

카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한은 작게 혀를 찼다.

“하긴 편하게 대화할 상황도 아닌가.”

폐허처럼 변해버린 주변을 훑어보며 서한이 중얼거렸다. 이곳은 보육원에서 조금 떨어진 폐교의 운동장이었다. 안 그래도 으스스했던 풍경은 이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처참해졌다.

뭉개진 운동장 바닥을 흘끔 본 서한이 한쪽 무릎을 꿇고 거세게 숨을 들이쉬고 있는 카온에게 말을 걸었다.

“조금 쉬었다 하지.”

“……아직 괜찮습니다.”

카온은 약하지 않았다. 체력과 근력 면에선 A급을 넘어서고, 마력량 또한 어지간한 마법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마력 출력과 파괴력, 방어력은 일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모든 수치에서 서한이 조금씩 상위 호환이었다는 게 문제였을 뿐.

서한은 저려 오는 왼팔을 두들겼다. 서한과 카온의 수준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걸음 하나, 공격 한 번의 차이로 둘의 승패는 엇갈렸다.

‘1년 전이었다면 졌겠는데.’

진희와 엮이게 되면서 이런저런 전투가 많다 보니, 새삼 성장한 게 체감되었다.

최근 성장이 지체된다고 생각되었던 건 착각이었던 걸까.

‘하긴 그 녀석을 보고 있으면…….’

서한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자신이 더 강해지고 싶어서 안달이었는지 그 이유가 떠오른 탓이다.

“당신은…….”

어느새 체력을 회복하고 일어선 카온이 서한에게 말했다. 회복력만큼은 인간을 벗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뭐가?”

“과거에 대해서.”

과거? 서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 기억력이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무슨 소리야?”

“…….”

역시 모르고 있나. 카온은 서한의 말에 이를 악물었다. 서한을 미워하는 건 화풀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저렇게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얼굴을 보면 분노가 끌어올랐다.

무엇보다 진희의 곁에 서한이 있는 것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대련, 계속하죠.”

“주인 따라 화제 돌리기도 뜬금없군.”

서한은 한숨 대신 검을 잡았다. 카온에게 묻고 싶은 게 적지 않았지만, 대답해 주지 않을 걸 알기에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대련 중간, 서한을 향해 날아오는 살의를 생각하면 이렇게 존댓말을 하는 게 용할 지경이었다.

‘미움받는 건 익숙한데.’

누군가에게 미움이나 질시를 받는 건 일상이었다. 단지 이유 정도는 알고 싶었다.

서한은 공격을 시작하려 달려오는 카온을 보며 검을 들었다. 의문의 대답은 승리 후에 듣기로 다짐했다.

* * *

“뭔데 둘이서 나란히 거지꼴이에요?”

보육원에 돌아온 카온과 서한을 보며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둘의 옷은 넝마처럼 해졌고 몸엔 잔상처가 가득했다. 그나마 멀쩡한 건 카온이었다. 보나 마나 햇빛을 받으며 돌아온 덕에 회복이 된 거겠지.

진희는 상비하고 있던 붕대와 연고를 서한에게 던져줬다.

“둘이 사이가 좋은 줄은 몰랐는데.”

“좋아 보이냐?”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라잖아요.”

“나 너보다 연상이다.”

“젊어 보여서 좋겠어요.”

“너, 진짜…….”

도대체 한마디를 지지 않는다. 서한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하나 가져와 앉았다. 마침 바깥에서 놀다 온 아이들로 인해 복도가 시끄러웠다.

이곳도 많이 바뀌었다. 팔의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서한이 말했다.

“여기도 이제 사람 사는 곳 같네.”

“그렇죠?”

“그런데 할 얘기란 게 뭐야?”

서한은 대련이 끝나고 곧장 돌아가려고 했다. 대련으로 인해 얻은 성과를 정리할 시간도 필요했고, 다음 던전을 위해 장비를 점검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희가 보내온 문자 때문에 카온과 함께 보육원으로 오게 되었다.

내용은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보육원에 들르란 이야기였다. 진희답지 않게 진지한 문자에 서한은 심각한 이야기인가 싶어 상처도 치료하지 않고 왔던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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