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헌터의 겸직 65화
타락한 정령왕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바르그였지만, 정작 그의 처참한 모습을 앞에 두고 나니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지금이 기다려왔던 순간일지도 모른다.
[무기가 필요해.]
“무기?”
진희가 팔짱을 끼며 경청했다.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바르그가 정령왕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수많은 존재를 사로잡은 이상, 단순한 방법으론 정령왕을 죽일 수 없어. 신체가 없어지더라도 부활할 테니까. 그러니까 무기가 필요해. 그의 영혼을 완벽히 죽일 수 있는 무기.]
바르그는 진희에게 다가갔다.
[내가 무기가 되어줄게. 나랑 계약하자.]
그제야 진희는 바르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 * *
“이 나쁜 새끼!”
소현이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민성에게 던졌다. 딴에는 기습공격이었지만 빤히 공격을 보고 있던 민성이 단검을 맞아줄 리 없었다.
같은 C급이라도 실력 차이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성은 느긋하게 공격을 피하고, 소현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윽!”
“말귀를 못 알아듣네. 말했잖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어쩔 수 없어? 그게 사람 등에 칼 꽂아놓고 할 소리야!”
민성이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누굴 찔러? 말해봐, 내가 누굴 찔렀는지 기억해?”
“그야 당연히…….”
소현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쩐지 동굴 안에서의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민성은 웃음을 지우지 않고 소현에게 다가갔다.
“기억나지 않지? 그야 당연하지, 저 동굴 안에선 모든 게 환상처럼 보이거든.”
“화, 환상?”
“그래, 파티를 와해시키기 위해서 정령들이 환상을 보여주는 거야. 넌 존재하지도 않은 파티원들을 배신하는 환상을 본 거지. 그렇지 않으면 이름도, 얼굴도 떠오르지 않을 리 없잖아?”
소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민성이 말을 이었다.
어느새 소현의 뒤로 다가온 민성의 또 다른 동료이자, 이 작전을 같이했던 여성 파티원이 소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간 소현처럼 파티의 신입인 척했던 그녀는 긴장을 풀어주듯 소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는 거야. 우리라도 도망쳐야 되지 않겠어?”
이것이 민성이 이 던전에서 오랫동안 길잡이를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의 가방엔 한동안 수익이 걱정 없을 만큼 많은 양의 마정석이 들어 있었다.
이번에도 작전은 성공했다. 민성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우선 호전적인 마법사와 파티를 맺어 던전의 보스로 향하게 만든다. 던전 클리어 업적에 대한 열망이 있는 마법사라면 작업은 훨씬 손쉬워진다. 그렇게 동굴에 들어서게 되면, 마법사를 보스에게 던져버리고 모든 전리품을 들고 도망친다.
민성은 C급이라지만 전사이기에 마법사들보다 신체 능력이 뛰어났으니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동굴 속에서 죽으면 그 존재는 주변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남은 목격자는 이렇게 거짓된 기억으로 설득시키면 조금의 증거도 남지 않는 완벽 범죄가 탄생한다.
‘나는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으니 다행이지.’
어째서인지 민성은 동굴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기억을 잃지 않았다. 세세한 정보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대략적인 상황 파악은 가능했다.
그것이 자신만의 특수한 능력인지, 혹은 우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민성은 이 점을 이용해 작전을 꾸몄다.
처음엔 자신을 제외한 모든 파티원을 보스의 먹이로 던져줬지만, 이 던전의 수명을 위해서는 길잡이가 필요하다 판단하여 이렇게 마법사만을 죽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 기이한 형태의 던전을 유지하려면 외부의 마법사들을 꾸준히 영입할 길잡이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민성은 짐짓 슬프다는 표정을 짓고서 말했다.
“하지만 내 잘못이야. 굳이 보스에게 도전할 필요는 없었는데, 욕심에 눈이 멀었지. 마정석 배분은 좀 더 높게 쳐줄게. 사과의 의미야.”
마정석 배분이란 단어에 흐리멍덩하던 소현의 눈에 빛이 돌았다. 길잡이란 다 이런 법이지, 민성은 내심 웃으며 생각했다. 길잡이 중에 금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럼…….”
“걱정 마.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내가 길을 찾아뒀어.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힘내면…….”
“그럼 진희 언니는 어떻게 된 건데?”
“뭐?”
민성은 소현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진희.
그녀의 이름이 아직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그녀도 슬슬 잊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럴 리 없어. 그 여자는 지금쯤…….”
“지금쯤, 뭐?”
쾅!
민성이 등을 강타하는 충격에 앞으로 고꾸라졌다.
“으앗!”
앞에 서 있던 소현이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어, 언니!”
“사람 쳐놓고 어딜 도망가.”
진희가 민성의 등을 사뿐히 밟으며 말했다. 그녀가 검을 어깨에 멘 채 불량한 태도로 웃었다. 당황한 민성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진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비켜주지 않았다.
민성과 진희의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아무리 힘을 줘도 꿈쩍도 하지 않자 민성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금 돌렸다.
“사, 살아나오셨군요. 다행…….”
“다행은 무슨. 다 들켰어.”
“아악!”
진희가 다리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척추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에 민성이 계속해서 비명을 질렀지만, 진희는 힘을 빼지 않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아, 아아.”
소현의 곁에선 민성의 동료로 보이는 여성이 주저앉아 진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나.”
“네, 네?”
“그리고 꺼져.”
진희가 검 끝으로 안개 너머를 가리켰다.
“10초 안에 사라지면 살려는 줄게.”
“하, 하지만 전 길잡이가 아니라서 돌아가는 길을 모르는…….”
“내가 알 바야?”
휙 하고 검을 돌려 검 끝을 땅바닥에 박았다. 히익, 민성은 자신의 목 언저리에 검이 꽂히자 꼴사나운 비명을 내질렀다.
검에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백색의 칼날 속에 번개의 마력이 쉴 새 없이 번쩍거렸다.
“마지막 기회야. 난 괜찮은 검을 얻어서 기분이 좋거든.”
평소의 진희라면 일단 베고 나서 생각했을 것이다. 진희가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웃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협박을 받은 여성은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이내 민성이 다시 신음을 내기 시작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다가 진희에게 살해당하는 것보단, 정령들을 피해 출구로 달아나는 게 그나마 생존확률이 높다고 판단한 것이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진희가 소현에게 말했다.
“따라가.”
“네?”
“출구까지 돌려보내 줘. 안전한 길은 알고 있지?”
“그건 그렇지만…… 왜요?”
어느새 혼란한 머리를 정리했는지 소현이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가다가 죽으라고 그래요. 쟤가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예요?”
“아니, 살려 보네. 출구까지 데려다준 다음에 신분증 뺏고, 경찰에 알려.”
“진짜예요?”
“응.”
소현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떨궜다.
“설마 그 사람도 살려줄 건 아니죠?”
그녀가 손끝으로 민성을 가리켰다.
“내가 알아서 해.”
“아으, 정말이지.”
진희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던 소현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사람 저엉말 착하네요!”
“응, 고마워.”
소현의 빈정거림에 진희는 웃을 뿐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소현은 증오스럽다는 듯 민성을 내려다보더니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좋아요, 대신 나오면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세요. 게이트 입구에서 기다릴게요. 지금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당최 모르겠거든요.”
“그건 걱정 마.”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소현이 안개 속으로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진희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 던전은 곧 무너질 거거든.”
그렇게 되면 이전에 던전 속에서 사라진 이들에 관한 기억이 돌아올 것이다.
진희는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민성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 * *
[굳이 출구로 보낼 필요 없어. 정령왕이 죽었으니까 조금 뒤에 모든 인간은 자신의 세계로 되돌아갈 테니까.]
“알아. 던전이 클리어되면 그렇게 된다는 것쯤은.”
던전이 클리어된 순간 내부에 있는 모든 헌터들은 지구로 되돌아간다. 헌터들에겐 상식이나 다름없었지만, 진희가 다른 사람들을 물린 이유는 민성에게 있었다.
단둘이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기 때문이다.
“이봐요, 민성 씨.”
“으윽.”
“내가 방금 던전 보스를 죽이고 왔거든요?”
헉, 민성이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설마 하는 그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진희가 말을 이었다.
“다른 정령들에게 들어보니, 사람들의 기억을 잡아먹는 괴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저처럼 동굴에 들어와서 죽어간 사람이 제법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건…….”
“당신이 했지?”
진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등을 밟은 채로 가까워져 오는 진희의 얼굴에 민성이 겁에 질린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더라. 많은 사람을 동굴 속으로 집어넣었다나 봐?”
“어, 어떻게 그걸…….”
“기억하냐고? 이제 나만 기억하는 게 아닐 거야. 내가 보스를 잡았으니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민성을 향해 진희가 즐겁다는 듯 말했다.
“보스가 잡아먹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모두 되살아날 거거든.”
“……헉!”
“던전에서 행방불명된 수많은 헌터, 그들과 함께했던 길잡이 C급 헌터, 다른 길잡이들의 기억도 다시 되돌아올 테고, 네 신상정보는 모조리 공개되겠지?”
민성의 안색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갔다. 완전범죄라 생각하고 안이하게 활동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가 지금껏 살려 보낸 길잡이들의 기억이 되돌아올 것이고, 죽었던 마법사의 동료들 또한 민성을 떠올릴 것이다.
정부가 관리하는 던전에서 수많은 B급 헌터를 함정에 빠뜨려 왔으니, 공식 헌터로서의 인생은 종 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진희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죽인 죄, 그리고 그녀를 속이고 함정에 빠뜨린 괘씸함은 이 정도로 갚을 수 없다.
“아, 아아악!”
진희는 검 끝으로 민성의 목 뒤를 베어냈다. 얇게 표피가 잘린 피부 속으로 전격이 스며들었다.
“으아악!”
머리부터 척추까지 스며드는 강렬한 전격의 고통에 민성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목 뒤를 시작으로 진희가 밟고 있는 허리까지 기이한 문양의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응.”
별건 아니었지만, 척추를 중심으로 마력 회로 전부에 바르그의 힘으로 화상을 입혔다. 이제 민성은 마력을 쓸 때마다 등골이 타오르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 상처는 병원이나 마법사에게도 쉽게 치료받을 수 없다.
번개의 늑대, 바르그의 능력은 ‘치유 불가’였으니까. 바르그보다 정순한 마나나 고위의 마법사라면 손을 쓸 수 있겠지만, 고작 C급 헌터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부터 범죄자였다. 일반 병원에도 쉽게 갈 수 없는 처지다.
“허, 허억!”
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민성의 등에서 발을 뗐다. 눌렸던 폐가 다시 돌아오는 느낌에 민성이 거세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며 즐겁다는 듯 진희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