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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64화 (64/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64화

그동안 심심했는지 진희에게 붙은 소현은 이것저것 떠들기 시작했다. 이 던전의 특징, 주변 파티들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앞에서 걷고 있던 상수는 이쪽을 불만스럽다는 듯 흘겨보았다.

“어이구, 꼴에 견제하는 것 봐. 저 사람 언니가 자기 활약을 뺏는다고 생각하고 있을걸요? 마법사 귀족이신 자기가 덜 주목받는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해요.”

실제로 진희가 수월하게 정령을 베자 민성의 태도도 바뀌었고, 소현도 자연스럽게 진희 쪽에 붙었다. 언제나처럼 파티장으로서 갑질을 하려던 상수에겐 눈꼴 시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이제 던전의 끝까지 오긴 했습니다만.”

소현이 한참을 상수에 대해 뒷담을 하던 도중, 드디어 파티는 던전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일반적인 파티는 여기를 기점으로 다시 입구로 돌아가 정산을 한다.

“이 너머는 ‘보스’가 있다고 알려져서요.”

민성은 이 이상 전진하지 않는 사정을 설명했다.

던전, 숲의 끝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절벽에 위치해 있는 동굴은 아직까지 정복한 헌터가 없는 장소였다. 도전한 파티는 다들 실패해서 돌아왔고, 무슨 연유에선지 동굴 안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당최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상대할 수 없는 적이 있단 사족만이 있을 뿐이다.

“한번 들어가 보지?”

“네?”

“아까 네가 그랬잖아, 탱커 해줄 검사 있으면 던전 정복도 가능하다며?”

가만히 듣고 있던 상수가 팔짱을 끼며 코웃음 쳤다.

“아뇨, 그냥 해본 말…….”

“됐고.”

상수가 진희에게 고개를 까닥하며 물었다.

“진희 씨 자신 있어요?”

주목을 받게 된 진희는 흘끔 소현을 바라보았다. 소현은 뭔가 탐탁지 않다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있으면 들어가게요?”

“저야 자신 있으니까요.”

“진짜 애 같네.”

“뭐요?”

진희가 방긋 웃었다.

“아니에요, 들어가 보죠. 대신 마정석 정산 비율을 좀 높여야겠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정령을 잡을 수 있는 이상 김상수 씨가 더 받을 필요가 없잖아요? 오면서 정령 잡은 비율, 우리 둘이서 비슷하죠? 파티에서 가장 정산 비율 높은 게 탱커고요.”

“…….”

전진하기 위해선 탱커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진희에게 맡긴다고 한 이상 정산에 대해 반박할 말이 더 없었다. 상수는 인상을 찌푸리며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 앞을 민성이 파고들었다.

“그, 그럼 제 비율을 좀 줄이겠습니다. 한 게 그다지 없으니까요.”

결국 민성이 교통정리를 한 후 동굴로 진입하기로 결정되었다.

진희도 처음엔 들어갈 생각까진 하지 않았지만, 앞서 보았던 정령 늑대가 떠올라 호기심이 생겼다.

늑대의 말을 떠올려보면 이 던전의 보스는 아마 정령왕일 것이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존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했지만, 늑대가 말했던 성벽이란 단어가 계속 걸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 * *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동굴 진입은 진희와 상수가 전위였고 다른 파티원들이 그 뒤를 따라붙었다. 탱커인 진희가 앞을 막고 마법사인 상수가 중앙에 서는 게 구성으론 옳았지만, 상수는 아까부터 진희에게 묘한 경쟁심을 느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그의 판단에 진희는 알아서 하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바깥 숲과 달리 동굴 안은 안개가 없었다. 오히려 묘하게 공기가 청량해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파티는 랜턴으로 주위를 밝히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 보니까, 보스를 잡으면 던전도 닫힐까요?”

뒤에서 주변을 살피던 소현이 말했다. 다소 긴장된 목소리였지만 곁에서 대답한 민성은 태연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정령들은 거의 무한 리젠되고 있고, 보스를 잡는 거 말곤 딱히 떠오르는 클리어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럼 보스 잡는 사람이 포상금을 엄청 받겠네요.”

정부가 도시 한복판에 있는 던전을 닫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는 헌터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클리어 보상으로 마정석이 푼돈으로 보일 만큼의 포상금이 걸려 있던 게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업적도 엄청날 거라서…….”

“뭔가 있어요.”

진희가 민성의 말을 끊고 걸음을 멈췄다. 파티원들도 동시에 정지했다. 저 멀리서 기척과 함께 마나가 느껴졌다.

‘정령.’

그것도 늑대와 같은 정순한 정령의 기운이다. 거리가 멀어 잘 느껴지지 않지만, 늑대의 말이 맞다면 저 앞에 있는 건 아마 정령왕일 테지. 진희가 검을 꺼내 들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여기가 기점이에요.”

진희는 검 끝으로 땅을 가리켰다. 진희의 감각과 정령왕의 감각이 부딪히는 장소, 이 선을 넘는 순간 정령왕의 감지 범위에 걸린다는 이야기였다.

“앞으로 넘어가는 순간 전투가 시작…….”

고개를 돌리고 준비를 하고 넘어가자는 말을 하려던 진희가 말을 멈췄다. 그녀가 목격한 것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던 파티원이 아니라 눈을 부릅뜨고 칼이 등에 박힌 상수의 모습이었다.

“너…….”

“죄송해요.”

상수를 찌른 범인, 민성이 밝게 웃었다.

“속은 쪽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세요. 이렇게까지 감이 좋을 줄은 몰랐거든요.”

그리고 각혈을 하려던 상수를 힘차게 진희를 향해 밀었다. 얼굴에 피가 튀며, 거구의 사내가 자신의 위로 쓰러지자 진희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윽!”

바로 상수를 옆으로 밀어내고 민성을 잡으려 했지만, 민성은 이미 양팔에 소현과 다른 파티원을 끼고 미친 듯이 달려나가고 있었다.

“어, 언니!”

당황하는 얼굴로 소현이 비명을 내질렀지만, 전사인 민성의 손을 뿌리치기는 버거웠다.

진희가 곧장 민성을 쫓기 위해 달려가려 했으나.

“이런.”

방금 상수와 부딪힌 덕에, 진희 본인이 말했던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진희는 자신의 뒤통수를 향해 맹렬히 날아오는 마나의 기운에 인상을 찌푸렸다.

준비할 시간은 없었다. 민성이 도망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정령왕이 당도했기 때문이다.

‘저 자식, 여기가 선이란 걸 알고 있었어.’

민성은 정확히 진희가 그어놓은 선을 인식하고 있었다. 전투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진희가 주의를 돌리던 찰나, 상수를 찌른 후 진희를 선 너머로 보내버렸다.

민성이 진희와 같은 감지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 그는 애당초 이 상황을 상정하고 있던 것이다.

복잡한 생각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보다 자신의 뒤를 노리는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아-]

한기가 스쳤다. 어린아이가 떠오르는 날카롭고 가느다란 비명이 귀를 찔렀다. 진희는 그 즉시 검을 꺼내 들고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는 정체불명의 마탄을 후려쳤다.

‘얼음?’

검에 의해 박살이 난 얼음 파편을 보며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냉기와 함께 검을 통해 묘한 진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얼음을 막은 검은 쉴 새 없이 진동하고 있었다. 처음엔 충격의 여파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검 날부터 천천히 서리가 끼고 있었다.

[아-]

정령왕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희는 또다시 자신의 머리를 정확히 노리는 얼음 파편을 검으로 막아냈다.

“……또야.”

검에 묻은 서리는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검의 반절을 잡아먹은 서리를 보며 진희가 미련 없이 검을 바닥으로 내다 버렸다.

마력을 두르고 있던 검은 땅에 버려지자마자 서리에 잡아먹혔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다. 검의 날까지 불투명하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얼음에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더 이상 반격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다.

드디어 정령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왕은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까 만났던 늑대와 다르게 정령왕은 흑색의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하-]

또다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에 진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짧은 대치였지만 정령왕의 공격을 직접 맞아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공격에 당하면 대응할 틈도 없이 얼음에 갇혀 버릴 것이다.

“그럼 맞기 전에 때려야겠네.”

[하-?]

“강아지야, 언니가 좀 바빠서 말이야.”

진희가 주먹을 쥐고 자세를 낮췄다. 예전에 현성과 싸우면서 터득한 체술을 사용해 볼 시간이었다.

“좀 비켜줘야겠다.”

안 그래도 민성의 일 때문에 급하던 참이다. 조금의 시간도 지체할 생각이 없던 진희가 빠르게 달려나갔다.

* * *

어째서 인간들은 정령의 충고를 듣지 않는 걸까.

온갖 동화에서도 인간들은 정령의 충고나 조언을 무시하여 재앙을 맞이하곤 했다. 돌아가란 말을 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걸까.

정령왕의 기운이 풍겨오는 동굴을 향해 달려가며, 백색의 늑대 바르그는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치직,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며 바르그의 신체가 빠르게 가속했다. 마치 번개 같은 속도로 단숨에 동굴에 도착한 바르그가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망쳐, 그 얼음에 닿으면…….]

정령왕의 얼음에 당하면 존재를 말살당한다. 자신의 능력, 주변인의 기억, 지금까지 살아온 흔적까지 모조리 얼음에 먹혀 이 세상에 고정되어 버린다.

잡아먹힌 존재의 크기가 클수록 정령왕은 자신의 존재를 확립한다.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한 정령왕의 치졸하고 잔인한 생존방법이었다.

그 어떤 인간도 정령왕의 얼음에 대항할 수 없다.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위해 목숨을 걸려던 바르그는 이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안녕?”

동굴의 안쪽, 그곳엔 정령왕이 피를 흘리며 벽에 처박혀 있었다. 그 앞에 상처 하나 없이 주먹을 쥐고 있던 진희가 태연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뭐…… 한 거야?]

“팼는데?”

‘팼어? 정령왕을?’

바르그는 늑대답지 않게 입을 떡 벌리며 말을 잃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늑대가 정령왕이고, 이 동굴에 들어온 인간들을 잡아먹으며 살아왔단 거지?”

[잡아먹는 게 아니라 존재를 사로잡는 거야.]

“죽는 건 같잖아.”

바르그가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아니라니까. ……그래, 너랑 같이 동굴에 들어온 인간을 기억하고 있어?]

“누구? 민성?”

[아니, 배신당했다던 또 다른 인간.]

민성이 등을 찌르고, 진희가 땅에 버렸던 그 ‘사람’. 진희는 당연히 기억한다며 그 사람의 이름을 꺼내려다 이내 입을 다물었다.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파티 참가를 권유하던 마법사의 이름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인상이었는지는 말할 수 있는데 어떤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진희가 인상을 찌푸리자 바르그가 바로 그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존재를 사로잡힌다는 뜻이야. 네가 이 세상을 나가게 되면 그 인간에 대해서 완전히 잊어버리겠지.]

“그게 말이 돼? 내가 이 던전에 들어온 것도, 정령왕이랑 싸우게 된 것도 그 인간 때문인데?”

[그럼 기억이 수정되겠지. 인간은 기억의 불필요한 공백을 추측으로 덮어버리는 특징을 가졌어. 너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야.]

정령인 주제에 인간보다 말을 어렵게 한다. 진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여간 알았어. 난 그 ‘사람’에 대해선 별 관심 없으니까 넘어가고.”

[넘어가도 돼? 동료 아니었어?]

“글쎄.”

진희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쓰러져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정령왕이 보였다.

“저건 어떻게 할까? 죽일 작정으로 때렸는데 죽질 않네.”

[…….]

자신들의 우두머리였던 정령왕을 패서 죽이려 했다는 진희의 말에 바르그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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