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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헌터의 겸직-63화 (63/191)

기사와 헌터의 겸직 63화

“마력을 잘 사용하면 검사도 정령을 벨 수 있다고 듣긴 들었는데, 전 힘들더라고요. 역시 B급 헌터는 다른가 봐요.”

“마력 사용은 헌터의 기본이니까요.”

“하하, 하긴 그렇겠죠?”

정령을 베어버린 직후, 민성은 어째서인지 유독 진희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비굴했던 모습은 상수의 시선이 사라지자 귀신같이 돌변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음이 분명했지만 진희는 굳이 티 내지 않았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서진희예요.”

“아하, 그럼 진희 씨네요?”

“아뇨, 서진희예요.”

“……아, 네.”

진희가 태연하게 호칭을 정리하자 민성이 잠깐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서진희 씨는 베테랑이신가 봐요? 검술 실력도 대단하시던데, 혹시 어디 기업 소속이세요?”

예의 없는 호구조사였지만, 민성은 본인이 말을 잘 돌렸다고 생각하는지 필사적으로 웃는 낯을 하고 물었다. 진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내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는지 작게 웃었다.

“아뇨, 솔로예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거든요.”

“헉, 그러세요?”

“네, 제가 한 보육원을 후원하고 있는데, 여러모로 도와줄 게 많아서요.”

“…….”

보육원이란 단어에 민성의 얼굴이 순간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진희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군요. 대단하세요, 헌터가 되면서도 후원을 하고 계시다니요.”

“후원뿐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지내기도 해요. 워낙 귀여운 아이들이라.”

“…….”

민성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차마 어디 보육원이냐고 묻지 못하고, 설마 아니겠지 하는 의심 어린 눈동자가 한참을 허공을 헤맸다.

온갖 의심과 걱정이 휘몰아치고 있을 테지만, 진희는 굳이 민성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감돌았지만 파티는 던전 깊숙한 곳으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 * *

반나절 정도의 사냥이었지만 벌이는 쏠쏠했다. B급 헌터가 솔플을 하는 것에 비해 어림잡아 2배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이 사냥터가 인기가 있는지 새삼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법사만 있으면 던전 난도는 확연히 내려가는데, 벌어들이는 금액은 동급의 던전을 뛰어넘었다.

자신의 몫으로 떨어질 마정석의 수를 세던 진희가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저녁 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음, 야영을 할까요?”

마침 상수도 시간을 확인했다. 이런 사냥터 던전에서 야영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민성은 살며시 진희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이제부터 돌아가기엔 시간이 늦었습니다. 체력 문제도 있고요.”

진희나 상수야 아직 견딜 만했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었다. 마력과 체력의 소모가 현실보다 큰 던전 안에서의 행군은 C급 헌터에겐 제법 피로한 일이었다.

진희는 고민하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침번을 정할게요.”

민성은 능숙하게 야영지를 차렸다. 주변에 마정석으로 만든 알람 아티팩트를 설치하고, 조를 짜 불침번을 설정했다.

진희가 초번인 대신에 혼자 서고, 성별끼리 짝을 지어 불침번을 서기로 결정되었다. 상수는 민성과 같이 불침번을 선다는 사실에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굳이 조를 바꾸잔 말을 꺼내진 않았다.

시간은 2시간씩, 6시간의 휴식 후 탐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맛없어.”

다른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서 잠을 청하기 시작하고, 가져온 랜턴으로 주변을 밝히고 바닥에 앉은 진희가 혀를 찼다.

배가 고파 민성이 나눠준 건식을 먹었지만 도저히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희는 고개를 돌려 잠에 빠진 일행을 돌아보았다.

‘안 자네.’

그리고 민성이 잠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숨소리와 심장박동은 편안했지만, 그가 실눈으로 진희를 살피고 있는 게 보였다.

보육원 이야기를 꺼낸 후 민성의 경계심은 크게 올라갔다. 그때부터 그는 진희의 말, 표정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하기야 그걸 노리고 한 거니까. 진희는 작게 웃으며 마력 감지의 범위를 넓혔다.

“어?”

주변에 정령이 있으면 미리 처리한 다음 눈이나 붙일까 싶었는데, 마침 감지에 무언가가 걸린 게 느껴졌다.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기묘했다. 앞서 만났던 정령의 마력이 아니라, ‘마나’가 느껴지는 진짜 정령이었다.

진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령의 마나가 느껴지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혹시 몰라 검을 손에 꽉 쥐고서 어두운 숲속을 랜턴으로 비추었다.

민성의 시선이 뒤에 느껴지고 있었지만 무시한 채로 앞으로 조심스레 나아가자, 마나의 정체를 수풀 속에서 발견했다.

“늑대?”

그곳엔 새하얀 늑대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아직 성체는 아닌 듯 미묘한 신장의 늑대는 어딘가 아픈 것처럼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었다.

안개로 인해 어두웠지만 늑대의 백색 털은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진희는 무릎을 굽혀 늑대의 등에 손을 얹었다.

“크릉.”

동시에 늑대가 눈을 뜨며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힘은 없었는지 공격해오지 않았다.

“번개…… 구나.”

늑대에게서 느껴지는 마나의 속성은 번개와 바람이었다. 마나의 양은 적었지만 질 만큼은 최상급이다. 처음 느껴보는 정순한 정령의 기운이었다.

‘이대로 두면 죽겠는걸.’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지금이라도 꺼질 것 같았다. 될지 모르겠다 싶었던 진희는 손에 마력을 휘감고 천천히 늑대에게 주입했다.

대부분의 마력은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는지 늑대에게 활력이 돌았다.

“너는…… 누구야?”

“말도 할 줄 알아?”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늑대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바람을 통해 자신의 말을 진희에게 전하고 있었다.

수준 있는 정령이 높은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늑대는 진희가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차원의 존재인 듯했다.

“그냥 지나가는 사냥꾼.”

“……날 사냥할 거야?”

“그럴 생각은 없어.”

자신을 해칠 생각도 없는 정령을 굳이 사냥할 생각은 없었다. 진희가 짧게 대답하자 늑대가 안심한 듯 드러냈던 이를 감추었다.

“이곳에 있으면 안 돼.”

“뭐?”

“여긴 위험해. 도망쳐야 해.”

뜬금없는 늑대의 경고에 진희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곳은 ‘자신을 잃는’ 숲이야. 성벽이 무너져서, 오래 지낼수록 자신을 잃고 망자가 되어버려.”

성벽? 망자? 이해할 수 없는 단어에 진희가 물었다.

“이곳의 정령들처럼 변한다는 이야기야?”

“정령? 아니야, 그 아이들은 정령이 아니야.”

늑대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흰 털에 가려진 야윈 몸이 보였다.

“그 아이들은 정령의 자리를 빼앗긴 망자야.”

“자리를 빼앗겼다고? 누구한테?”

“정령왕.”

“…….”

갑작스럽게 등장한 단어에 진희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령왕이라면 동화에서나 나오던 정령들의 군주를 뜻하는 단어였다. 바제트도 평생 본 적 없었고, 정령사들도 이름만 알 뿐 실존하는 건지 장담치 못하는 존재였다.

“정령왕은 성벽을 잃고 힘을 잃었어.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정령에게서 자리를 빼앗았어.”

“아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거든? 성벽은 뭐고, 자리를 뺏는다는 게 또 무슨 뜻이야?”

늑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몰라? 어째서? 너도 성벽을 무너뜨린 인간이잖아?”

“뭐?”

진희가 다시 물으려 했지만, 늑대는 귀를 쫑긋하더니 이내 수풀 속으로 달려나갔다.

“야, 잠깐…….”

“진희 씨- 어디 계시나요?”

“아, 진짜.”

어떻게 타이밍이 이렇게 완벽할까. 이미 멀어져버린 늑대의 기운을 느끼며 진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자 민성이 이쪽을 찾아 헤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불침번 교대 시간이 되자 찾아온 것 같았다.

“아, 여기 계셨군요. 갑자기 없어지셔서 놀랐어요.”

“하아.”

진희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야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민성은 멋쩍은 얼굴로 그녀를 따라와,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침번 서시느라 피곤하셨죠?”

진희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어깨에 올라온 민성의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민성의 손등 위에 얹었다.

“박민성 씨.”

“네?”

“적당히 해요.”

“……네?”

부드럽게 손을 어깨에서 내려놓은 진희가 말했다.

“계속 친한 척 구는 거, 보기 좋진 않아요.”

“…….”

“할 거라면 눈치 못 채게 하든가, 안 그래요?”

이 모든 게 친절이 아니라 아부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탁탁, 어깨를 턴 진희가 그대로 민성을 지나쳐 걸어갔다. 치욕으로 얼굴이 붉어진 민성이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이내 입을 다물었다.

* * *

“언니는 솔로 플레이시죠?”

다음 날, 귀환과 탐험 중 탐험을 선택한 파티는 좀 더 전진하기로 결정했다.

상수는 무슨 일인지 또 민성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고, 그 와중에 파티원 중 한 명이 진희에게 다가왔다.

투척 단검을 주렁주렁 달고 있던 그녀는 자신을 임소현이라고 소개했다.

“왜요?”

“‘길잡이’나 ‘짐꾼’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그게 뭔데요?”

소현이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길잡이, 저기 민성이란 분이 길잡이 겸 짐꾼이에요. 파티가 진입하기 전에 먼저 던전을 탐사해서 탐사 루트를 짜는 사람을 길잡이라고 불러요. 아까 상수 씨한테 길 물어봤죠?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몰라요. 사실 루트는 민성 씨가 짠 거거든요.”

눈이 좋거나 감각이 좋은 C급 헌터들이 곧잘 하는 일이 길잡이였다. 전투할 필요가 적으니 위험 부담도 적고, 유능하면 어지간한 B급 헌터 수준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니 혹시 고정 파티 구하실 생각 없어요?”

“고정 파티요?”

“네. 아까 보니까 정령도 잘 잡으시던데, 이 파티 나가서 저랑 파티 짜는 건 어때요? 제가 길잡이 해드릴게요.”

소현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법사인 상수보다는 진희 쪽이 믿음직스러운 듯했다.

“전 솔로가 편해서요.”

“에이, 여기 던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로는 힘들어요. 길잡이가 없으면 상위 헌터라도 길 잃어버린다니까요.”

“으음.”

그건 맞는 말이었다. 이 던전을 일주일 정도 탐험해서 자금을 만들어 놓으려 했기 때문에, 맵의 특성상 길잡이 역할은 한 명 정도 필요하긴 했다.

“생각해 볼게요.”

“헤헤, 이거 제 연락처거든요? 꼭 연락해 주세요. 이 파티는 이제 질색이라 돌아가면 바로 백수거든요.”

“……박민성 씨랑 김상수 씨를 평소에도 알고 있었나 봐요?”

“당연하죠. 특히 민성 씨는 이 던전 열릴 때부터 있던 붙박이예요.”

소현은 진희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사 계열 길잡이는 드물긴 한데, 오래 한 만큼 이곳 지리는 빠삭하거든요. 솔직히 소문은 별로 좋지 않긴 한데, 뭐 헌터 중에 소문 좋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무슨 소문인데요?”

“증거가 있는 건 아닌데, 유독 파티를 자주 바꾼다나? 아마 이번 달에만 세 번째일걸요? 성격도 나쁘지 않아 보이던데, 볼 때마다 다른 파티더라고요. 그리고 상수 씨야, 보면 알겠지만 성격도 저렇고 눈도 변태처럼 떠서 싫어해요.”

아하, 진희는 마지막 말에 동감하며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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